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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 마인드 1
토머스 J. 스탠리 지음, 장석훈 옮김 / 북하우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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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돈에 관심 없는 사람은 없다. 큰 돈에 관심 없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아예 돈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는 절에 계시는 스님들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게 요즘 세상을 사는 이치이다. 뭘 하더라도 필요한 돈, 돈, 돈. imf가 풀리면서 사람들은 자산을 키우기 위한 투자 방법을 찾느라 골몰한다. 주식 시장이 불안정해지니까 부동산으로 여유 자금이 몰리고, 책에서 지혜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경제, 경영 코너는 붐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히트를 친 것도 사람들의 이런 욕망을 잘 읽어낸 탓이겠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이런 방향으로 유도하는 측면도 없진 않을 것같다.

경제 감각 없고 무심하기로 나같은 사람도 없을 거다. 수입 없고 모아 둔 돈도 당장 1달 정도밖에 버틸 수 없는 빈곤한 처세가 걱정되었던 탓인지 친구가 <백만장자 마인드>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인문사상예술 쪽 서적을 주로 읽는 나에게 이런 경제, 경영 마인드 컨트롤 서적은 그다지 상관없는 책이지만, 혹 지금과 같은 빈한한 재정 사정을 타개할 만한 묘책이 숨어있을까 해서 2권으로 된,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미국 저술들의 두드러진 특징인 사례 연구 방법과 인구통계학적 방법을 병용하여 백만장자들의 사고방식, 생활 방식, 가치관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근데 우선 걸리는 건 내가 사례 연구 방법은 이 방법이 주는 생생함 때문에 좋아하지만 인구통계학적인 방법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치를 계량화한다고 해서 진리가 명료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의 최상급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은 백만장자들의 대충의 양상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같지는 않다. 나는 중간쯤 순위에 올라와 있는 게 더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 경우도 있다.

저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만장자의 상당수는 자영업자다. 누구나 알고 있다. 샐러리맨 해서는 집 장만하고 자식 교육시키고 하는 거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 웬만하면 틈새 아이템이나 기발한 아이템을 가지고 자기 사업하려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나같이 재능도 자본도 없는 인문주의자마저 그런 생각을 하는 판국이니 누군들 이런 대열에 빠지겠는가. 하여튼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자영업을 하라는 저자의 충고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저자가 백만장자의 마인드라고 서술하고 있는 측면들은 대체로 사회나 윤리 교과서에서 봤음직한 고상한 덕성을 강조한 것이고, 어떤 집을 살 것인가 시간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는 대한민국의 천민자본주의 졸부들이나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일 뿐, 나같은 평범한, 아니 평범하다 못해 그 이하인 사람에게는 해당 사항 없음이다. 제발 졸부들이 이 책을 보고 좀 고상하게 놀아줬음 하는 게 내 바램이다. 자본주의 1세계의 부자들은 결코 소비에 목숨걸지 않는다는 걸 이 땅의 졸부는 이해하고 행동하기 바랄 뿐이다.

적잖은 시간을 들여 1, 2권을 읽었는데, 약간 허탈하다. 읽은 것에 비해 내가 받아들인 부분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어떤 책들은 내가 받아들이기 곤란할 만큼 산처럼 다가오는데, 이 책은 무슨 벌레 하나 날아온 정도만큼의 파급력밖에 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책은 그 책 나름의 필요 독자가 있는 법인데,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음이 문제일 뿐이겠지.

하여튼 평소에 돈 문제 조금도 생각 안 해봤고, 난 왜 이렇게 돈이 없을까 탄식을 내뱉어 본 사람과 자기가 졸부여서 좀 고상하게 보이고 싶다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선택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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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제국주의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김성곤.정정호 옮김 / 창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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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전공이 비교문학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비교문학은 경계선상의 학문이다. 자국의 문학을 기반으로 타국의 문학과의 영향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 비교문학의 기본과제인데, 그러므로 비교문학은 끊임없이 자국 문학과 타국 문학의 접변 지역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미국인 비교문학자로서 사이드가 제국의 형성기 영국, 프랑스 소설을 매개로 하여 문학과 제국이 맺는 관계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시도한 저서이다. 그러나 사이드는 제국의 소설뿐만 아니라 이 제국의 식민지 출신의 다양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도 그만큼의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사이드는 제국주의와 더불어 탈식민주의의 내러티브를 함께 분석함으로써 민족주의가 빠져드는 토착주의, 환원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민족의식이 성공한 이후 사회 의식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민족주의는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는 식민지 경험을 가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이드는 파농의 해방 이론이 그런 측면에서 훌륭한 본보기임을 말하고 있다. 파농은 최근 들어 다시 소개되고 있는데, 파농의 유효성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인으로 그에게 팔레스타인도 미국도 엄밀한 의미에서 정체성의 확고한 근거가 아니다. 그의 이런 위치처럼 그는 일방적으로 중동이나 아랍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오도된 민족주의로 인해 시민사회가 소멸된 아랍 국가들에 대한 시선도 만만치 않게 비판적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다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순수하지 않으며 타자와의 교섭이 빚어낸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와 같은 생각은 사무엘 헌팅턴같은 문명충돌론과는 대조되는 입장이 분명하다.

비교문학은 지역 연구, 인류학 등처럼 제국주의 확장기에 제국 확장과 관리 차원의 필요성 때문에 생긴 학문 분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태생의 조건일 뿐, 이들 학문 분과는 다층적이며 다면적인 세계 문화의 공존과 평화를 위해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정확히 이런 일이다.

마지막으로 번역본에 대해서 한 마디 6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역저를 내는 일은 끔찍하게 힘든 일이다. 번역이란 걸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그 고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공역이라고 하기에는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의 번역 편차가 심한 편이다. 최종 감수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역서 후반부로 갈수록 오자, 탈자, 비문 등이 엄청나게 등장해서 한 문장의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수두룩하다. 영문학 전공자로 번역이 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부실한 번역은 원저의 가치에 대한 훼손이자 독자에 대한 불친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개정판을 하루바삐 내서 오류를 말끔히 정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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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혹은 없어짐 - 죽음의 철학적 의미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8
유호종 지음 / 책세상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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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혹은 없어짐>의 표지는 테레사 수녀가 관속에 누워있는 장면을 사용하고 있다. 마치 곤한 잠을 자고 있는 사람처럼 테레사의 얼굴은 약간 찡그리고 있다. 테레사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는 앞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접하는 무수한 죽음들에 대해 우리는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형상을 차용한 비유적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죽음은 여전히 존재론적 사건일 뿐, 그 존재의 신비를 애써 해명하거나 이해할 필요는 없는 수동적인 사건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수동적이고 존재론적인 사건인 죽음에 대해 그 철학적 의미를 따져보고자 젊은 철학자가 화두를 끄집어낸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떠남 혹은 없어짐>으로 존재하는데, 그의 논의의 화두가 된 것은 '뇌사'라고 하는 생명윤리적 문제이다. 흔히 말하는 죽음도 아니요 삶도 아닌 그 중간지대에 놓여 있는 모호한 사건, 뇌사를 통해 지은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모호한 인식의 근저를 파헤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런 시도는 충분히 그럴 듯해보고 그 의미도 충분하다. 그러나 죽음이 존재론적 사건으로만 착색된 현실에서 그 사건을 마치 인과관계의 맥락에서 해명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는 지은이의 인식적 관심은 생각보다는 다소 허망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의 탐구가 시작되었을 때와 비교해 그의 탐구가 끝난 시점에서 도출된 결론은 저자 자신의 인식적 관심은 물론이려니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의 인식적 관심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한 것같다. 삼단논리적 추론을 따라가느라 골치만 아팠을 뿐, 그 과정 자체도 과연 이런 추론이 정당한가라는 의심을 곳곳에 던지게 했다.

죽음에 대한 연구가 과연 논리적 추론만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까? 죽음은 논리적 사건이 되기에는 가려진 게 너무 많은 존재론적 사건이다. 그리고 죽음 의식에 기반한 삶은 이성적 계산에 따르기도 힘들뿐더러 자신의 계산이 반드시 훌륭한 삶을 보증해주는 것일 수도 없다. 차라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의 논리적 탐구보다는 죽음의 윤리적 탐구에 기반해 현재 삶에서 죽음이 어떤 의미를 띠고 내 삶에 녹아날 수 있는가와 같은 실천적인 측면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볼 때 <죽음의 한 연구>같은 소설이나 죽음과의 힘겨운 대결을 거친 이들의 자서전을 읽으며 내 삶의 죽음과 삶을 반추해보는 작업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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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 산다는 것 - 숨어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
박영택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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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작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일간지 주말판 북가이드를 기다리고 뒤적이는 것만이 유일한 낙처럼 되어버린 그때 알게 되었고 기회만 닿으면 꼭 한번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후 책을 읽을 시간이 적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게 되기까지는 반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왜 이 책에 마음이 이끌렸을까? '숨어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나는 아마도 '숨어사는 예술가'라는 말이 주는 그 어떤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렸던 게 분명하다. 문학, 미술, 음악 등에 한때 심취하고 그것에 자기 한 평생을 걸어보겠노라고 다짐했던 사람들은 '예술가'란 말이 주는 묘한 기대와 설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장사와 밥벌이로 비루해지고 예술마저 그 어떤 진정성도 내포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안락과 풍요를 거부하고 오직 자기 자신과의 대면으로 질료만을 부여잡고 형상을 꿈꾸는 자들의 세계와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신비롭다. 그들은 마치 불가의 선승처럼 일상의 번잡과 현란에 거리를 두고 지상 최저의 조건을 감수하며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길어 올리는 데만 집중한다.

나는 그들이 적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존경스럽다. 여전히 현실의 부족과 앞날의 불투명함에 기죽고 불안해하면서 아무 일도 제대로 해나가지 못하는 나 자신에 비할 때 그들은 너무나 단호하고 평온하다.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재보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일은 불편하면서도 설레는 일이다.

화가나 사진가는 하나의 캔버스, 한 장의 필름 위에 자신을 투사한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인상을 정신 없이 흘러보내는 이미지 과잉 시대에 그런 그들의 작업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그들의 작품은 그들의 생계를 해결해줄 수도 없다. 집중을 요하는 작품 감상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에 사람들의 일상은 너무나 번잡하고, 그들의 작품은 상품을 장식하는 커버가 되기에는 너무 난해하거나 무겁다.

이 시대 예술의 존재 조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그들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은둔과 고독으로 이어진다. 일상의 버거움을 애써 던져버리고 찾은 깊은 산 외딴 골짜기에서 그들이 마주친 고독, 그 고독을 그들은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대도시의 삶도 고독하긴 매한가지지만 외적인 풍요와 내적인 고독 사이의 불화에 너무나 익숙한 현대인에게 그들 예술가의 고독은 어쩌면 한 차원 높은 고독일 것이다. 그 차원 높은 고독을 그들이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그 고독만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대담해지고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 여기에는 '이 시대에'라는 수식어구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환쟁이라도 시대 환경에 따라 그들의 위치는 달라질 것이므로. 그러나 굳이 그런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의 예술가라도 고독과 궁핍은 그의 본질적 존재조건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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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과 페미니즘
리타 펠스키 지음, 김영찬 옮김 / 거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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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근대성을 이해할 때 헤겔, 맑스 등의 지적 전통과 결부시키는 경우가 많다. 근대성에 대한 논의에서 헤겔과 맑스가 빠지면 뭔가 중요한 국면에 대한 이해가 누락된 것같은 주위의 시선을 받게 되는데, 이는 신맑스주의적 경향의 근대성론자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이나 <맑스주의의 향연>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맑스를 정점으로 재배열되어 있다. 물론 그에 의해 새롭게 부각된 인물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 역시 남성들이라는 점에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근대성이 비단 남성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성론자들의 대부분은 남성들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들을 중심으로 근대성을 논하고 있다. 근대를 마치 남성의 전유물인 듯 남성의 업적과 작품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으며, 여성들은 근대의 외곽에 존재하는 신화적 전통쯤으로 비가시화하는 일은 일종의 '해석적 폭력'일 수 있다.

리타 펠스키의 <근대성과 페미니즘>은 부제가 말해주듯이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근대성을 탐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젠더적 관점을 겸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논의도 진정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요즘 현실을 놓고 볼 때 펠스키의 이 책은 우리의 근대성 논의에서 고려되어야 할 지점을 부각시켜주는 훌륭한 예시인 셈이다.

펠스키는 그동안 여성과 주로 연관된 것으로 폄하되어 온 향수(노스탤지어), 소비의 문제에 근대성의 측면에서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고급문학, 남성문학에 의해 폄하되어온 연애소설의 근대성을 복원한다. 이와 같은 작업은 결코 젠더 그 자체의 특성을 신비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근대성이 결코 남성의 영역만이 아닌 근대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 모두의 것임을 밝히고, 근대성의 다양한 영역 중 특권적인 중요성을 가진 영역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젠더 논의는 이제 더 이상 페미니스트들만의 영역은 아니다. 근대성 논의 그 자체도 동일성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고 그 어떤 생산성도 쉽게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젠더는 근대 사회가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동일성, 다시 신화화해가는 동일성의 논리를 제어할 강력한 무기다. 이런 측면에서 리타 펠스키의 이 책은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어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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