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에 대한 정보는 어딘가 다른 책에서 얻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읽을 때, 나중에 꼭 읽어봐야지 하는 다짐을 했었던 것같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기가 그렇고,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도 힘들다. 하물며 문학이나 영화나 음악같은 예술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중국산 문화예술에 대해서 대체로 관대한 편이다. 때로는 도전적인 정신으로 무장하고 덤벼들 때도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소위 중드라고 하는 중화권 드라마, 그중에서도 사극은 내가 제일 싫어하고 아예 관심을 둘 관심 부스러기도 없는 쪽이다.
특히 가끔 채널 돌리다 보면 변발한 황제 가문의 남자들과 예쁜 궁중 처녀들의 투샷이 잡히면 그렇게도 소름이 돋을 수가 없다. 변발은 청나라의 상징일 텐데, 굳이 청나라만 내 취향이 아닌 건 아니고 여하튼 시대를 막론하고 중국 사극 드라마는 그 콘셉트 자체에서부터 비호감이다.
그런 거부감은 연예 멜로드라마 자체에 대한 거부감인 것같다. 중국 무협 영화는 꽤 많이 봐온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협지나 수십부 짜리 무협 사극은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시간을 들일 가치는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러던 차에 공상임의 <도화선>을 읽게 됐다.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이 작품이 희곡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소설이라고 짐작하고 읽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산 희곡을 읽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고, 또 이건 청초 작품이라 갑자기 책을 잡았던 손에 힘이 약간 빠지기도 했다.
'도화선'이란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를 뜻하는 것으로 극중 연인의 애정 상징같은 것이다. 처음엔 그런 이야기로 시작되길래 뭔가 잘못된 선택인 걸까, 하는 낭패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양상은 작품 초반에 불과했고, 이후는 명 멸망 당시의 어지러운 정황들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충신과 역신들이 뒤얽히면서 결국은 명은 망하고 청이 들어서기 전 충신들이 강호에서 은거하고 열사를 제사지내면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충신장 이야기같은 느낌이다.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고 지조를 지키며 자신의 지위를 탐하지 않는 자들은 무수한 중국 협객들의 '반청복명'적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작가 공상임도 조심조심하면서도 그런 정신을 내비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을 대본으로 한 드라마도 분명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중국 전근대 희곡이라는 태생적 핸디캡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려하고 경쾌하게 작품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마치 실제 무대에 선 배우들의 움직임을 보는 듯한 실감을 갖고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기존 세계 명작 리스트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이 왜 명작 반열에 포함됐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읽고 나니 포함시켜도 좋을 것같았다. 번역자의 번역 솜씨 좋았고, 다 읽지는 않았지만 꼼꼼한 각주도 빛나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