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사의 쌍둥이 탐정일지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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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상은 미스터리의 연속 - 도연사의 쌍둥이 탐정일지 _ 스토리매니악


인간이란 종족이 둔해서 그렇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일상은 미스터리의 연속이다. '왜?' 라는 의문을 달고 보면 알쏭달쏭한 일들이 정말 많이 벌어진다. 어쩌면 너무 일상적인 일이라, 너무 사소한 것이라, 또는 더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냥 지나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지나치지 않고, 살을 좀 붙여 나가면, 한 편의 근사한 미스터리 소설이 되지 않을까? 바로 이 소설처럼 말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분위기 속에 작은 미스터리들이 등장하고, 그것을 총명한 쌍둥이가 풀어낸다는 것이 이 소설의 골자다. 상당히 평범하다면 평범한 구성이지만, 몇 가지 장치로 인해 꽤나 재미난 이야기로 둔갑한다.


하나는 탐정이 쌍둥이라는 것이다. 쌍둥이라는 것 자체가 특별한 장치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정반대 성격의 존재로써의 쌍둥이라면 좀 얘기가 다르다. 사람의 선의를 믿는 '란'과, 사람의 악을 경계하는 '렌' 이라는 캐릭터는 묘한 대칭을 이루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기존의 탐정들과 살짝 다른면도 있는데, 그들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타 미스터리 소설의 탐정들은 빈틈이 없다. 추리 과정에서는 어수룩한 면들도 있지만, 추리에 들어가면 날카로운 총명함이 빛을 발해 실수하는 법이 없다. 허나 이 소설의 두 탐정은 다르다. 한 사람이 추리를 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으면 다른 한 사람이 그 추리의 잘못된 점을 짚어 뒤집어 놓는 식이다. 뭔가 불완전한 탐정과 이를 보완하는 다른 한 쪽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 쌍둥이로 결국은 하나의 탐정처럼 느껴지는 점은 꽤나 매력적이다. 또 이런 추리의 차이가 각자의 사람을 보는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인물들이 존재하는 배경 공간이 '절' 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절하면 우리의 것과는 좀 다른 면이 많은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으로써의 절은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공간으로써 절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주인공들과 그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 또 그런 인물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상에서의 다양한 미스터리의 접점은 소설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또, 절이라는 공간에 등장하게 된 주인공들의 사연 또한 미스터리 그 자체로 이야기에 흥미로운 점을 더 만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절 아래 버려진 쌍둥이 갓난아기, 이들을 기르자는 결정을 한 가족, 또 절의 가업을 잇게 된 '잇카이' 라는 소설 속 화자까지, 이들의 미묘한 감정의 어울림 또한 일상에서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분위기적으로나 장치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플러스 점수를 주고 싶은 소설이다. 거기에 비해 추리의 소재로 등장하는 사건들은 무게감이 떨어지는 듯도 하다. 하지만 이는 전체 밸런스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 이런 캐릭터에 묵직한 사건을 떨어뜨려 놓으면 상당히 어색할 것 같다. 오히려 딱 좋을 만큼의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미스터리다. 사라진 조의금 봉투, 유산한 아이에 대한 공양 등, 그 소재의 선택이 이야기의 전체적 분위기와 딱 맞을 만큼 물려 돌아간다는 느낌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수첩>으로 더 유명한데, 개인적으로는 분위기나 캐릭터, 사건까지, 이 소설이 훨씬 재미있었다. 앞으로 시리즈로 나올지 어떨지 모르겠으나, 충분한 기대감을 갖고 기다려도 좋겠다 싶다. 일상의 잔잔한, 분위기가 살아있는 미스터리를 원한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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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 미드나잇 스릴러
제니 블랙허스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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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아들을 죽였는가? - 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 _ 스토리매니악


소설에서의 장르의 구분은, 그 소설에 기대하는 바를 다르게 한다. 로맨스 소설에는 로맨스 소설로써 기대하는 바가 있고, 추리소설에는 추리 소설에 기대하는 바가 생기기 마련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펴게 되고, 나름의 기대한 바를 기준으로 세우고 소설을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장르에 따른 기대에서 벗어난 서술 방식이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분위기의 생소함을 맞닥뜨렸을 때는, 잠깐 혼란해지기 마련이다. 그 혼란함을 참지 못하면 읽는 것을 중간에 멈추고 재미 없는 소설로 낙인을 찍게 되거나, 아니면 끝까지 참고 읽다 그러한 생소함이 다시 그 장르에서 원하는 바를 안겨 주는 경험을 만나게 되면 그만한 희열이 또 없다. 즉, 생소함에 낙오하거나, 반전의 묘미를 몇 배 불려 안겨주거나, 약간의 도박적 모험일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소설 아닌가 싶다. 스릴러 장르임을 내세우고 있지만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다른 관점에서 스릴러 장르에 접근한다. 일반적으로 스릴러 소설이, 수사 혹은 추리라는 기본 틀 위에서 진행되고, 그 안에서 서사를 만들고 사건을 만들고 그 과정을 보여주며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반해, 이 소설은 그러한 수사 위주의 이야기 없이 진행된다. 오히려 수사라는 캐릭터간의 집합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주인공 캐릭터에 온전히 집중하여 단서를 짜맞추고, 하나하나 이야기의 진실을 밝혀가는 구조다.


방식은 낯설지만, 이야기는 스릴러로 통한다.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3년의 치료 감호소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주인공을 뒤흔드는 익명의 봉투, 죽은 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통해, 사건의 뿌리를 추적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스릴러 장르의 기본을 보게 해준다. 또 스릴러 소설이 과거의 원인이 생겨나는 지점부터 중간을 싹둑 짤라먹고 현재의 결과를 보여주며, 그 중간의 과정을 궁금하게 하고 그 중간을 추적해가는 구조를 가진 소설이라고 볼 때, 이 소설 또한 그 원인의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며 단서를 맞추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어떤 면에선 어색하지만, 어떤 면에선 신선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일반적 스릴러 소설이 사건에 감정을 이입해 이야기를 즐기게 된다면, 이 소설은 사건 자체가 아닌 주인공 캐릭터에 찰싹 달라붙어 감정을 이입해 읽게 된다. 아들을 죽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가진 인물에, 그 충격적인 사실에 의문을 갖게 되는 인물에, 하나하나 과거를 탐색해가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이야기 전체를 맞닥뜨리는 경험은 꽤 즐겁다.


때로는 캐릭터의 감정이 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또 여성이 가지는 섬세함을 캐릭터로 뿜어내고 있는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들을 모두 캐치하지 못하는 점도 아쉽다. 독자에 따라 그 깊이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그래도 캐릭터에 이입하여 이야기에 뛰어들고, 그 이야기에서 만나는 사건의 단서들은 스릴러 소설이 주는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생소함을 극복하고 꾸준히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가가 이 소설의 재미를 가르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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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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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끓어오른다 - 저스티스맨 _ 스토리매니악


사회는 욕망의 집합체다. 저마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안에 머무르고,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사회를 이용하며, 그런 욕망의 분출과 구축과정이 모이고 모인 곳이 사회라는 공간이다.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주위를 조금만 돌아보면, 모든 것이 욕망이라는 단어와 맞닿아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욕망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분출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회악이라는 것이 그런 존재다. 사회라면 필연적으로 잉태하게 되어 있는 사회악은, 개개인의 욕망이 비뚤어져 분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모습은 다양하다. 사회가 복잡다단하게 변화하고 분화됨에 따라 사회악의 모습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무거운 것부터 가벼운 것 까지, 멀리 있는 것부터 가까이 있는 것까지, 사회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은신하여 몸을 웅크리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지금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사회악은 무엇일까? 바로 익명성 뒤에 숨은 악, 그리고 가상 공간 위에 펼쳐지는 악의 재생산과 폭력성일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타고 우리 바로 옆에 바싹 다가앉은 사회악, 이 소설은 그 사회악을 조준하고 있다.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난 일곱 건의 살인, 피살자들의 이마에 난 탄알 구멍, 피살자간의 연결고리 없음, 살해동기 미상, 경찰의 연속되는 헛발질, 자라는 공포와 불안... 이쯤되면 누리꾼이 나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연쇄살인에 대한 호기심, 총기 사용에 대한 두려움, 무능한 경찰,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놀려 생산해낼 단어들이 무궁무진하다. 그렇게 작은 둑이 터진다. '저스티스맨' 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자가 개설한 카페에, 그가 작성한 살인의 인과관계에 대한 추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와 논리가 올라온다. 이것에 누리꾼은 반응을 보이고, 논쟁과 설전, 군중심리를 따라가는 여론, 또 다른 폭력과 맹목성이 뒤덮는다. 이 소설은 이와 같은 장면들을 따라가며,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추리소설 기법으로 파헤치고 있다.


소설 전반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정통적인 추리기법을 선보이는 추리소설이 아닌, 변형된 형태의 추리를 보여주는 소설이지만, 그 긴장감만은 의외다 싶을 만큼이다. 연쇄살인의 사연과 저스티스맨의 추론, 누리꾼의 반응이 얽히면서 진행되는 방식은,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들이 아닌, 떨어져 있는 인물들에게서, 그 감정의 증폭이 얼마나 더 심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과정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긴장감이 기분 좋을 정도다.


분위기는 마치 '우타노 쇼고' 의 <밀실살인게임>과 '하라 료' 의 <내가 죽인 소녀>를 믹스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인터넷 상에 모여 추리게임을 하는 이지러진 시각을 보여주는 분위기와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무거운 공기가 깔린 분위기가 섞여 조금은 무겁고, 조금은 엽기적인, 또 익명성에 숨은 폭력성의 날카로움이 분위기에 녹아 있다. 이런 분위기 위에 전개되는 전지적 시점의 작가가 르포를 보여주듯 이끌어 가는 이야기는, 묘한 긴장감과 묘한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다만, 그 분위기와 긴장감이 주는 장점을 이야기 자체가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 모양새다. 전지적 시점에서 어찌보면 등장인물이 드러나지 않는다 싶을 정도의 캐릭터가 미미하고, 완독 이후에 덮쳐오는 주제의식이 아쉽다.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힘 들어간 문장들은 영 거슬리며, 자칫 잘못 읽으면 긴 설명을 읽고 있는 듯 느껴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장르소설이 지닌 재미적인 요소에 대한 장치들이 아쉽고, 사건과 사건 이야기와 이야기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도 느슨해 보인다. 익명성 뒤에 숨은 폭력성, 그리고 맹목적 추종이 갖고 오는 권력의 탐욕 등이 잘 드러난 이야기지만, 그것이 어떤 신선함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분위기는 잘 형성되었으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이 날카롭게 파고들지 못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꽤나 아쉬운 부분이다.


이 시대의 한 모습을 잘 옮겨 놓았다는 생각은 든다. 다만 그 옮겨 놓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좀 더 극적으로 포장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뒷맛이 내내 남는다. 그러나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내내 책을 손에 놓지 못하게 만드는 몰입감은 적지 않았다는 것을 꼭 밝혀두고 싶다. 긴장감에 빠져 스토리를 읽어나가지만, 책을 덮고 난 후에 몰려오는 허전함 또한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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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100쇄 기념 특별판 리커버)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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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종교적인 소설, 그러나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울림 - 오두막 _ 스토리매니악


우선, 내가 신을 믿지 않는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둔다. 아, 물론, 급한 일이 있거나 간절한 일이 있을 때는, 주님도 찾고 부처님도 찾으며 한울님도 찾고, 도사님도 찾고, 공자님 맹자님도 찾는다. 뭐, 흔히 있는 무신론자 내지는 신적 존재에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세계 문화의 여러 곳에, 특히 서양 문화에 짙게 남아있는 종교적 색채들을 철저히 그 문화를 즐기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해석한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문학도 신이라는 존재 위에 그 이야기가 성립되고 캐릭터를 분석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에 문학의 장치로써 또는 작가의 철학 정도로만 공감하고는 한다.


이번에 만난 <오두막>이라는 소설도 이 연장에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소설은 꽤 유명하다. 그 탄생 스토리도 그렇지만, 소설이 주는 울림 또한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 이 소설의 근간이 '신' 이라는 존재임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 간단히 말하면 이 소설은 너무나 종교적인 소설이다.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베어나오고 하나님이라 불리는 신이 주는 삶의 이치를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 울림은 신이라는 존재에만 기대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다. 너무나 종교적인 소설이지만,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울림을 자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맥 필립스' 라는 인물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막내 딸을 처참하게 잃고, 거대한 슬픔이 가득한 공간인 오두막으로 찾아오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연락을 받는다. 슬픔과 증오로 가득찬 맥이 그 오두막으로 찾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흑인 여성, 중동의 노동자, 아시아 여성을 만나 주말을 보내며 겪는 일을 담고 있다.


슬픔으로 가득찬 맥에게 증오의 대상인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또는 세사람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나누며, 한 인간의 내면을 아주 작은 단위로 분해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사람이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 인간의 내면과 구성을 낱낱이 보여주고, 이를 통합한, 다시 인간을 보여주며, 한 인간의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간단히 소설의 구조를 보자면, 증오와 슬픔만이 가득한 오두막이라는 공간을 방문하여, 자신의 슬픔과 증오, 사람으로써의 근본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 변화된 사람으로 오두막을 떠나는 그 일련의 스토리가 깊은 감동을 만들어낸다.


맥이 변해가는 과정을 위해 동원되는 신학적 이슈들도 생각해 볼만하다.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있고, 무엇보다 우리가 신에 대해 궁금했던 질문들이 여기저기 등장하며 그에 대한 답도 소설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르치려는 그 근본적인 교리, 즉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여러 이슈들과 버무려 유연하게 풀어내고 있다. 물론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나 신을 믿고 있는 교인들이 보면 책의 내용이 기본에서 어긋나 보이는 것도 있을 것이며, 이론적 핵심에서 비껴간 것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분해, 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신의 가르침을 이해시키려는 모습은, 단지 신학의 문제를 벗어난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져야할 삶의 이치를 보게 만든다.


신은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 왜 내가 힘들때는 도와주지 않는가? 우리가 신에게 보내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이 소설은 답을 구하고 있다. 고통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며,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각자의 오두막을 만들지 않는한 그 고통은 지속되고 반복될 것이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깨달음을 선사하고 있다. 그것을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하나님의 인간화라는 장치를 통해 읽는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작가의 재치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진다.


다만, 나 같이 신을 믿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던질 수 있는 또 다른 질문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소설을 읽으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라는 점과, 소설과 현실의 차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다. 만약 소설처럼 인간을 이해시킬 수 있는 신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소설 속의 가르침들이 믿음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맹목적인 믿음과 맹목적인 이해의 산물만 존재한다. 그 맹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혹자는 맹목적인 믿음을 통해 신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종교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말의 울림을 한 사람의 가슴에 철썩 붙여 그 사람을 감화시키기에는 현실의 종교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소설의 감동이 온전히 삶의 감동으로 치환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지닌 가치가 퇴색하지는 않는다. 종교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삶을 살면서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 우리가 안고 살아야 할 것들, 우리가 깨닫고 진보해야 하는 것들을,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이 지닌 가치를 종교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어 전하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남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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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술사 1 - 기억을 지우는 사람 아르테 미스터리 10
오리가미 교야 지음, 서혜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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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는 것과 기억되는 것, 무엇이 더 두려울까? - 기억술사 1 _ 스토리매니악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내용을 떠나, 기억을 잊는다는 것이 참 공포스럽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감퇴하거나, 치매로 저항하지 못하는 기억력 상실이라면 어떨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그 답답한 공포는 몸을 부르르 떨리게 만든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너무나 잊고 싶지만,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기억. 너무나 괴롭고 자기자신을 좀 먹는 기억이지만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라는 것은 그 나름대로 다른 의미의 공포다. 누구나 살며 정말 잊고 싶은 기억 한 두가지 쯤은 있다. 그러나 결코 지워지지 않고 잊혀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그 기억은 살아 있는 내내 자신을 괴롭힐테니 말이다.


이 소설 <기억술사>는 바로 이런 기억의 상반된 공포를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다. 꼭 잊고 싶은 것을 지워주는 도시전설 속 괴인 '기억술사', 그 기억술사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에 관한 기억이 사라지는 경험,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어우려졌을 때의 공포, 감성적이지만 슬쩍 한기가 드는 이야기다.


애달픈 호러, 노스탤직 호러 같은 수식어가 붙어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호러라는 장르를 붙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판타지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공포라는 감정이 드러나고, 이를 표출하는 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 소설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굵직한 힘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요즘 대다수의 소설이 그렇듯, 약간의 호러적인 설정, 약간의 미스터리적 장치, 약간의 로맨스적 구성이 잘 버무려져 있다 하겠다.


'기억' 이라는, 추상적이라 더 감상적인 느낌이 드는 이 단어가 이야기를 좀 더 신비스럽게 만들고, 몽롱한 분위기 안에 가벼운 호러적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이야기의 중심 소재로써, 캐릭터들이 어떻게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궁금하게 만드는 유용한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미지의 정체인 기억술사에게 다가가기 위한 기본 설정이 좀 아쉬운 감은 있지만, 이야기 내내 긴장감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야기의 분위기에 잘 빠져들 수 있다면, 다양한 장르의 재미가 어우러진 소설로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 속에 존재하는 미지의 존재를 안고 조여드는 긴장감을 맛볼 수도 있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둥둥 떠다니는 몽롱한 기운을 느낄 수도 있으며, 그 과정을 따라가며 느끼는 미스터리적 풀이의 만족감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좋게 보면 다양한 장르의 재미를 한껏 맛볼 수 있다 하겠지만, 그 분위기에 젖어들지 못하면, 이도저도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다 싶다.


모호한 지점에 서서, 신비스런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소설이었다. 시리즈 도서인데,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전체적인 소설의 느낌을 즐기기에는 충분했지 싶다. 뒤의 이야기를 읽게 되는 것은, 온전히 주인공들의 다음 이야기, 기억술사의 정체에 대한 또 다른 결말이 궁금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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