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100쇄 기념 특별판 리커버)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나 종교적인 소설, 그러나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울림 - 오두막 _ 스토리매니악


우선, 내가 신을 믿지 않는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둔다. 아, 물론, 급한 일이 있거나 간절한 일이 있을 때는, 주님도 찾고 부처님도 찾으며 한울님도 찾고, 도사님도 찾고, 공자님 맹자님도 찾는다. 뭐, 흔히 있는 무신론자 내지는 신적 존재에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세계 문화의 여러 곳에, 특히 서양 문화에 짙게 남아있는 종교적 색채들을 철저히 그 문화를 즐기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해석한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문학도 신이라는 존재 위에 그 이야기가 성립되고 캐릭터를 분석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에 문학의 장치로써 또는 작가의 철학 정도로만 공감하고는 한다.


이번에 만난 <오두막>이라는 소설도 이 연장에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소설은 꽤 유명하다. 그 탄생 스토리도 그렇지만, 소설이 주는 울림 또한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 이 소설의 근간이 '신' 이라는 존재임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 간단히 말하면 이 소설은 너무나 종교적인 소설이다.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베어나오고 하나님이라 불리는 신이 주는 삶의 이치를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 울림은 신이라는 존재에만 기대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다. 너무나 종교적인 소설이지만,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울림을 자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맥 필립스' 라는 인물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다. 사랑하는 막내 딸을 처참하게 잃고, 거대한 슬픔이 가득한 공간인 오두막으로 찾아오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연락을 받는다. 슬픔과 증오로 가득찬 맥이 그 오두막으로 찾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흑인 여성, 중동의 노동자, 아시아 여성을 만나 주말을 보내며 겪는 일을 담고 있다.


슬픔으로 가득찬 맥에게 증오의 대상인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또는 세사람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나누며, 한 인간의 내면을 아주 작은 단위로 분해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사람이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 인간의 내면과 구성을 낱낱이 보여주고, 이를 통합한, 다시 인간을 보여주며, 한 인간의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간단히 소설의 구조를 보자면, 증오와 슬픔만이 가득한 오두막이라는 공간을 방문하여, 자신의 슬픔과 증오, 사람으로써의 근본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 변화된 사람으로 오두막을 떠나는 그 일련의 스토리가 깊은 감동을 만들어낸다.


맥이 변해가는 과정을 위해 동원되는 신학적 이슈들도 생각해 볼만하다.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있고, 무엇보다 우리가 신에 대해 궁금했던 질문들이 여기저기 등장하며 그에 대한 답도 소설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르치려는 그 근본적인 교리, 즉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여러 이슈들과 버무려 유연하게 풀어내고 있다. 물론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나 신을 믿고 있는 교인들이 보면 책의 내용이 기본에서 어긋나 보이는 것도 있을 것이며, 이론적 핵심에서 비껴간 것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분해, 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신의 가르침을 이해시키려는 모습은, 단지 신학의 문제를 벗어난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져야할 삶의 이치를 보게 만든다.


신은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 왜 내가 힘들때는 도와주지 않는가? 우리가 신에게 보내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이 소설은 답을 구하고 있다. 고통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며,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각자의 오두막을 만들지 않는한 그 고통은 지속되고 반복될 것이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깨달음을 선사하고 있다. 그것을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하나님의 인간화라는 장치를 통해 읽는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작가의 재치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진다.


다만, 나 같이 신을 믿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던질 수 있는 또 다른 질문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소설을 읽으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라는 점과, 소설과 현실의 차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다. 만약 소설처럼 인간을 이해시킬 수 있는 신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소설 속의 가르침들이 믿음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맹목적인 믿음과 맹목적인 이해의 산물만 존재한다. 그 맹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혹자는 맹목적인 믿음을 통해 신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종교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말의 울림을 한 사람의 가슴에 철썩 붙여 그 사람을 감화시키기에는 현실의 종교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소설의 감동이 온전히 삶의 감동으로 치환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지닌 가치가 퇴색하지는 않는다. 종교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삶을 살면서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 우리가 안고 살아야 할 것들, 우리가 깨닫고 진보해야 하는 것들을,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이 지닌 가치를 종교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어 전하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남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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