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사뮈엘 베케트 선집
사뮈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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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사가 없는 소설을 싫어한다. 그런데 왜 베케트를 읽었던 걸까? 나탈리 레제의 베케트 전기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을 읽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서사도 없고 묘사도 없다. 오로지 목소리()의 헛소리만이 가득하다. 이 소설은 애초에 이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을 왜 읽었는가

재밌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떠올라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카프카,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 들뢰즈, 바르트, 조로 아스터교, 수메르 신화, 데모크리토스, 원자, 기하학, 물리학, 신학, 특히나 모리스 블랑쇼. 쓰고 싶은 말들이 흘러 넘치는데, 이걸 다 쓰려면 독후감이 아니라 아예 논문을 써야 할 지경이다.

 

베케트는 1934년에서 35년 사이에 250회에 걸쳐 비온 박사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었다.

 

우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귀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에 대해 자기 살갗의 구멍들에서 흘러나오는 땀에 대한 것과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 대목을 상기시키는 베케트의 말은 몇 년 후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 등장한다. “내 눈물이 가슴 위에서, 옆구리에서, 혹은 등을 타고 내리며 나를 놀리는 게 느껴진다.” 이 둘은 모두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의 눈물을 찾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음으로써 암흑으로부터 헤어나고자 하는 거대하고 이산된 몸이 그것이다.

 

-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는 오로지 자아의 무한한 분열밖에는 없다. 소설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마후드 일 수 있고, 웜일 수도 있으며, 신일 수도 있고, 오물 덩어리일 수 도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베케트적인 영화라면 아마도 <존 말코비치 되기>가 아닐는지. 이런 소설에서 논리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베케트는 왜 이런 정신분열증 환자의 헛소리로 이루어진 소설을 썼을까.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득한 언어 규칙이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이며,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아까 읽었던 책의 일부입니다.

 

이와 반대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하고 때 묻지 않은 나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비슷한 이야기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고 앞뒤가 모순되며 주어가 도중에 바뀌는, 그래서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난감한 문장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베케트는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문장을 통해서 진정한 자아가 도출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윗 문장에서 방점은 잘 모르는에 찍혀져야 한다. 제임스 조이스였다면 에피퍼니의 순간이라 했을 것이다. 조이스가 여러 개의 에피퍼니를 수집했다면 베케트에겐 인생에 단 한 번의 에피퍼니의 순간이 있었다. 베케트는 계시라고 표현했다. 어머니를 간호하던 밤,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친다. 그것이 지나고 그는 안다.

 

사물들에 관한 일반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얻은 그것은 자기 자신에 관한 아주 비좁은 지식이다. 이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자꾸 곱씹는 일(조이스처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않는다....)이 끝난다. 대신, 죽어가는 어머니의 방에서 둥글고도 단단한, 마치 한 개의 돌멩이 같은 말이 떠오른다. 받아들이다(consentir). 자신의 취약함을, 어리석음을, 한계를 받아들이자. 찰나의 계시.

 

-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

 

베케트는 이후 자신의 모국어 안에서만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파울 첼란의 가르침을 버리고, 비코의 말을 따른다.

 

무릇 뛰어난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 고향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들의 최초의 불행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베케트는 이후 영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다. 최초의 불행 상태, 결핍의 언어. 그 결핍의 언어를 가지고 베케트는 침묵과 말 사이를 오간다. 계속.

 

.....계속해야만 하잖아,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계속해야만 해, 그렇다면 내가 계속해야지, 단어들을 말해야만 해, ......그 단어들이 어쩌면 내 이야기의 문턱까지, 내 이야기로 통하는 문 앞까지 나를 데려갔을 수도 있고, 에이 설마, 만일 문이 열리면, 내가 있을 거야, 침묵이 있겠지, 내가 있는 그 곳에,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걸 영원히 모를 거야, 침묵 속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해, 계속해야만 해, 나는 곧 계속할 거야 (p119)

 

윗 문장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마지막 구절이다. 왜 그는 끊임없이 계속 말해야 할까?

베케트는 언어에 구멍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언어에 구멍을 내기 위해선 계속 말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가가 말없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피분석자의 내용 없는 이야기에 분석가가 응답을 하면, 그것도 긍정적인 응답을 하면 침묵 이상으로 피분석자의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증진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채워지지 않음이 아닐까? 즉 피분석자라는 주체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기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결국 피분석자는 자기의 존재가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 작품이 지금 그의 자기확신과 어긋난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주고받기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이야기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화 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창조행위이지요.

 

라캉이 자아moi’je’주체sujet’라는 동의어를 마술사처럼 교묘한 손놀림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는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언어로 거기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입니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라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주체가 로서 말을 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 규정, 자기정위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하더라도 자아에 도달할 수 없다. 베케트는 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지만 어쩌면 그것만이 창조행위가 아닐까.

 

만일 베케트가 오늘날 활동했다면 그는 연극, 영화 연출가보다 힙합 프로듀서나 힙합 아티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요즘 <언프리티 랩스타>를 즐겨 본 영향 탓일까. 책을 묵독하면서 랩을 하듯이 읽었다. 이런 식으로 읽은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읽다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한참이나 정신이 나가 있었다. 아직 안타깝게도 마약 경험이 없는데 뽕 맞은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책인지라 뇌가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뉴런과 시냅스의 새로운 연결을 모색해서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랩처럼 읽히는 운율을 타는 문장 탓이었을까. 마치 테크노 음악에 취한 것처럼?

한마디로 약 빤 느낌이었다.

 

베케트를 통해 처음으로 워크룸 프레스 출판사 책과 접했다.

이웃님들이 왜 워크룸 프레스 책을 사 모으는지 절절이 느꼈다.

최고의 편집이다. 편집에 감동을 먹다니!!

 

나탈리 레제의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을 손에 잡을 땐 마치 여인의 가녀린 허리를 잡는 듯하여 놓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책이 이렇게 손에 쏘옥 안길 수 있지? 놓았다 하더라도 다시 손에 쥐었다. 반납일 지났는데 아직 반납 못하고 있다. , 이 책 진짜 반납하기 싫다

 

워크룸 프레스 출판사에서 출간된 사뮈엘 베케트 책을 계속 읽어야겠다.

 

계속 읽어야 하잖아, 계속 읽을 거야, 계속 읽어야만 해,

나는, , 계속 할,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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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9-0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은 왠지 어려울 것 같은데 편집이 좋다니 또 혹하네요.

근데 이거 원 허리 굵은 사람은 서러워 살겠습니까?
평생 좋아하는 사람 품에 안 겨 보지도 못하고..
왜 남자들은 허리 가녀린 여자만 좋아할까요?ㅠㅠ
허리가 굵던 가녀리던 여자는 똑같은데...
그럴 땐 남자가 팔이 짧은 것을 안타까워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ㅠㅠㅋㅋ

시이소오 2016-09-07 14:33   좋아요 0 | URL
굵은 허리도 좋아합니다. ㅋ

안 안기는 책도 좋아하구요 ㅋ ^^

cyrus 2016-09-07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서사 없는 소설이 재미있어요. 굳이 줄거리를 파악할 필요 없이 그냥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 보기만 하면 되잖아요. 계속 보다 보면 지루하지만, 일반 소설과는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어요. 재미없어서 읽고 싶지 않은데도 결말이 궁금해서 끝까지 보고 싶은 느낌이 들어요. ^^

워크룸프레스 사드 전집을 모으고 싶은데, 출간 소식이 뜸하네요.

시이소오 2016-09-07 17:42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베케트 소설이 맞으실듯

사드전집을 기획하다니 대단한 출판사에요 ^^

나뭇잎처럼 2016-09-08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운 이름. 베케트. 베케트 하면 저는 자동반사적으로 크누트 함순이 떠올라요. 베케트가 좋으셨다면 크누트 함순도 좋아하실 듯!

시이소오 2016-09-09 18:15   좋아요 0 | URL
베케트에 비하면 함순은 친절하지 않나요? 굶주림 을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