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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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줌파 라히리 제임스 설터

 

톰 행크스의 말처럼 <스토너>는 그저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된 사람의 연대기다. 그렇지만 분명 매혹적인 이야기다. 이 소설엔 나를 매혹시키는 세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 : 이런 멘토를 만났더라면.

 

스토너는 집안의 농사일을 위해 농과대학에 진학한다. 2학년 1학기 때 누구나 듣는 교양과목인 영문학 개론 강의가 결국엔 그의 인생 행로를 결정지을 줄이야! 스토너는 아처 슬론 교수의 지도에 따라 책을 읽고 또 읽지만 항상 낙제를 겨우 면할 수준이었다.

 

원래 목표로 하던 농과 수업은 뒤로 하고 점점 더 스토너는 영문과 수업을 늘려가더니 아예 전공 자체를 영문학으로 바꿔버린다. 그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아처 슬론이 그를 교수실로 부른다.

 

모르겠나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스토너는 아처 슬론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지 묻는다. 슬론은 대답한다.

 

사랑일세.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슬론은 스토너도 미처 깨닫지 못한 그의 문학에 대한 사랑을 간파한다.

미래에 불안해하고 방황하는 젊은이 앞에 진로를 정해주는 멘토가 나타나는 것만큼

근사한 일이 있을까. ‘넌 이걸 하기 위해 태어났어.’라고 말해주는 멘토가 있었더라면

나의 삶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스토너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강단에 서 학생들에게 40년 간 영문학을 가르친다.

 

두 번째 장면 : 이런 사랑을 했더라면

 

스토너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이디스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지만 신혼 첫날부터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그는 젊은 강사인 캐서린 드리스콜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 역시 스토너를 사랑한다. 바야흐로 불륜으로 접어든다.

 

욕망과 공부.” 캐서린이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것뿐이죠, 안 그래요?”

스토너가 보기에는 딱 맞는 말 같았다. 이것이 그가 살면서 터득한 것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욕망과 공부를 달리 표현하면 사랑과 책이다.

스토너는 책꽂이를 들일 정도로 많은 책을 캐서린의 집에 갖다 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책을 읽거나 논문을 쓴다.

 

스토너는 의자에 널브러지거나 침대에 누운 자세로 역시 그녀처럼 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가끔 두 사람은 시선을 들어 서로를 향해 빙긋 웃은 뒤 다시 읽던 자료로 눈을 돌렸다. 때로 스토너가 책을 읽다가 눈을 들어 항상 머리카락이 덩굴손처럼 덮고 있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과 우아한 곡선을 그린 등을 지긋이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느긋한 욕망이 천천히 차분하게 솟아나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등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팔을 올렸다. 그러면 그녀는 등을 똑바로 펴면서 고개를 젖혀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양손이 헐렁한 로브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난 뒤 두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누워 있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사랑과 공부가 마치 하나의 과정인 것 같았다.

 

책을 읽다 서로를 바라보다 사랑을 나누다 도로 책을 읽다......

이 장면에서 정신이 약간 혼미해졌던 것 같다. 너무 너무 너무 매혹적이다.

이건 정말이지....... 천국이다. 에로틱하기보단 그저 따스하다.

저 따스함을 표현하기에 나의 언어는 절대적으로 초라하다.

 

세 번째 장면 : 이렇게 죽을 수 있다면

 

스토너는 대학을 은퇴하여 암 판정을 받고 수술대신 그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린다.

 

그는 고개를 돌린다. 협탁 위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손으로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가늘어진 손가락, 관절의 섬세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그 안의 힘이 느껴져서 그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가락으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그가 찾고 있던 그 자신의 책이었다. 손에 그 책을 쥔 그는 오랫동안 색이 바래고 닳은 친숙한 빨간색 표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감동적인 죽음이다. 운명의 순간, ‘그의 작은 일부가 앞으로도 있을 책장을 펼치며 그는 짜릿함을 느낀다. 책 쓴 사람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필립 로스가 떠올랐다. 대학 사회가 배경이라는 점, 학생과의 불화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 불륜 혹은 섹스라는 소재 등이 로스의 소설과 비슷했다. 특히 주커먼 시리즈 중에서도 <휴먼 스테인>. 콜먼은 출석부를 부르던 중 출석치 않은 두 흑인 학생을 ‘spooks’라 불렀는데, 이 단어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해를 산다. 콜먼은 결국 학교와 타협하지 않다 교수직을 사직한다.

스토너는 스토아적인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는 성격이라기보단 관조하고 인내한다. 그러나. 스토너 역시 콜먼처럼 자신의 신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스토너는 곤경에 처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학과장이 될 로맥스가 추천하는 찰스 워커의 박사 과정을 실력미달이라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는다. 이 일로 그는 은퇴하는 그날까지 로맥스로부터 불이익을 당한다.

 

스토너에게도 매스터스와 고든 리치라는 대학 친구가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매스터스와 리치는 군대에 자원하지만 스토너는 대학에 남기로 결정한다. 고든 리치는 돌아와 그와 마지막까지 학교를 지키지만 매스터스는 입대한 지 1년 만에 사망한다.

 

주요 인물인 듯 보이는 캐릭터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여성 캐릭터 때문에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가 떠올랐다. <저지대>가우리도 이상한 캐릭터지만 <스토너>의 이디스만큼 괴상망측한 여성 캐릭터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가우리를 이상하다고 해서 성차별주의자로 낙인찍혔는데, 숙녀님들, 그래도 가우리는 좀 이상하지 않나요? ) 줌파 라히리는 제임스 설터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빚을 졌다고 말했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를 여성 화자로 다시 쓴다면 <저지대>와 비슷하지 않을까?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의 바스락거림, 취기가 도는 문장은 다분히 제임스 설터를 연상시킨다. 설터나 존 윌리엄스의 문장을 읽을 때면 햇빛 찬란한 바닷가, 황금빛 모래알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듯한 느낌? 혹은 어디선가 짙은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설터의 소설이나 <스토너>를 읽고 우는 것은 슬퍼서라기보단 아름다워서다.

이런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할 운명이라는 자각 때문에 우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극복할 수 없음에

눈물 흘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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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3-03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고 있는데 너무 사실적인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들어내는것 같아 왠지 불편한중에 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스토너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볼까 합니다

시이소오 2016-03-03 12:22   좋아요 0 | URL
저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읽으며 멘붕이었어요 ^^;

징가 2016-03-0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긴 한데 좀 기분더럽다는느낌이라 할까요? 저도 전형적인 꼰대가 되어가는건 아닌가 합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벗어난 생각에 이리도 불편해하니

시이소오 2016-03-03 12:35   좋아요 0 | URL
잔혹동화죠. 잔혹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감히 현실보다 잔혹하다고 말할 순 없으니^^;;
그런 현실을 외면하는 게 더 잔혹한 일인지도 모르죠. ^^;;

2016-03-0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히 <저지대>를 읽었는데 가우리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스토너>의 이디스는 결코 인연을 맺고 싶지 않은 여자라는 기억이 생생한데요...

시이소오 2016-03-03 12:39   좋아요 0 | URL
수바시와 우다얀의 여자 가우리요. 여자 주인공. 기억 나실텐데...^^
우다얀이 죽자 다시 수바시와 결혼해 영국으로 가서 딸 벨라를 버리고
철학 교수가 되잖아요.
그럴 수 있다 싶은데도 눈곱만큼의 모성이 없다는 게 도무지 이해불가였어요. ^^

2016-03-0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이소오님 설명을 들으니까 떠올랐어요. 저는 훗날 가우리의 선택보다도 남편의 형과 재혼하게 되는 상황이 충격이라면 충격이었어요. 시어머니에게도 소박 맞았던 것 같은데 동정도 가고...^^

시이소오 2016-03-03 12:58   좋아요 0 | URL
소설에서 화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는 소설 같습니다.
객관적 화자였다면 가우리는 남편이 죽자 남편 형(시아주버니)을 꼬셔 다시 결혼해 인도를 탈출,
영국으로 가자 딸과 남편을 버리고 도망친 나쁜 년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가우리를 사랑한 수바시는 `공사`당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해요 ^^;;




2016-03-0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바시가 침착하고 온정적인 화자였던 것 같기는 해요. ^^

시이소오 2016-03-03 15:17   좋아요 0 | URL
수바시나 스토너나 둘 다 스토아적인 캐릭터네요 ^^

2016-03-03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말에 공감이 가요. 스토아적인 캐릭터. 그 분류군에 들어갈 만한 캐릭터예요 정말. ^^

가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보바리즘적 캐릭터 같고.

시이소오 2016-03-03 15:29   좋아요 0 | URL
가우리는 자칫하면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캐릭터죠. 조심하셔야 ㅋ

2016-03-03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입장이지만, 조심은 하겠습니다. ^^

2016-03-03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03 18:06   좋아요 1 | URL
자신이 살기위해 사랑했던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딸을
버려야 했던 선택이 안타깝기도 합니다만 수바시와 딸 벨라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자신의 책임감으로부터 도망친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이 단순히 페미니즘적 저항`이라 생각진 않아요. 가우리를 이야기하다보면 그런 논쟁들이 불거질 우려가 있다는거였죠. ^^;

펠릭스 2016-03-05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내용을 잘 구분하여 써 주셨네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내용을 읽다보면 지금의 한국의 교수사회의 분위기와도 비슷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 조직내의 문화가 있는데도요.
그것은 그 조직의 임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3-05 09: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스토너를 읽으면서 대학교수도 꽤 매력적인 직업처럼 보였어요. 좋아하는 문학을 가르친다는 게 부럽더라구요^^

singri 2016-03-05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라히리 ㅡ 제임스셜터 읽는중인데 꼬리로 스토너가 연결됐네요 .언제 이런 긴글에 다 읽었다는 꼬리만이라도 올릴수 있길 바래봅니다ㅋㅋㅋ

시이소오 2016-03-05 09:51   좋아요 0 | URL
줌파 라이리, 설터, 스토너 리뷰 기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