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시작된 백신휴가는 어느덧 끝나가고 있다.


역시 휴일이라 밀린 책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대변혁 2권을 완독했고

남성됨과 정치도 마키아벨리 챕터까지 끝냈다^^

뭔가 막히고 체한 것이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렇다 해도 1월의 남은 날동안 읽을 책이 여전하지만 오늘만큼은 자축을!



어제 백신 접종 후 저녁 무렵부터 뼈마디가 쑤시며 아프고 팔 주변이 묵직해지는 증상이 있었다. 

타이레놀을 먹고 잠들었고 오늘은 주사 맞은 팔은 만지면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어제만큼은 아니다. 

비교적 가볍게 지나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이번주 인문 책들 중 마음에 들었던 책을 꼽아보았다.


1. 바다 인류


대항해 시대로 유명한 저자인 주경철 교수가 바다를 통해 바라본 역사를 그려냈다.

바다는 역사의 중요 무대였기에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바다는 문명과 문명이 맞부딪치는 공간이었고 세계의 변화가 뒤섞이는 공간이었다.

고대 제국, 아시아, 대항해 시기의 유럽과 아메리카, 연결된 지구 세계에서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 속의 역사를 세밀하고 촘촘하게 그렸다.


2. 연구자의 탄생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각자의 개인적이고 연구적 경험을 통해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진단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를 통해서 인문사회 연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문화연구, 사회학, 국문학, 여성학, 인류학, 영문학 등의 전공자, 작가, 평론가 등의 글이 엮인 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담긴 글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깃발의 세계사


제목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짐작하듯 깃발에 모여든 이들의 역사를 그려낸 책이다.

성조기부터 십자군의 깃발, 아라비아의 깃발, 분쟁을 낳은 중동의 깃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국기,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까지.

지역별로 분류한 것도 같지만 여기에 국가와는 관련 없는 깃발들도 포함되어 있어 호기심을 낳는다.

왜 깃발에 모여들었는지 그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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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21 20: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주위에서 보면 1, 2차 때 아무렇지도 않다
3차 때 약간 힘들어 하는 것 같더라구요. 저의 엄니도 그렇고.
저도 2차 때까지 거의 이상 없었는데 3차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맞으라고 문자 오는데 될 수 있으면 늦게 맏ㅈ아보려고요.ㅋ

얄라알라 2022-01-21 20:43   좋아요 3 | URL
저도 주변에서 3차 응급실 보아서요..

이제 막 백신완료자 ˝지위˝를 갖게된지라 3차는 먼 일이지만 벌써 걱정됩니다

거리의화가 2022-01-21 22:14   좋아요 4 | URL
그러게요 저도 진짜 3차 맞긴 싫었는데ㅠㅠ 내일까진 경과봐야겠죠 어차피 길게 갈 것 같으니 늦게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mini74 2022-01-21 20: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바다 인류 랑 깃발의 세계사 장바구니 담아놨어요. 전 3차 맞고 며칠 앓았어요 ㅠㅠ

얄라알라 2022-01-21 20:43   좋아요 2 | URL
mini74님이시라면 누구와도 겹치는 책을 장바구니, 혹은 서가에 두고 계실듯^^
3차 반응이 의외로 호된 분들이 있으시네요. 제 주위에도...지금은 괜찮으신거죠?

거리의화가 2022-01-21 22:16   좋아요 2 | URL
오 미니님하고 통했군요^^ 안 그래도 며칠 안보이시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그러신거였군요ㅠㅠ 이젠 괜찮으신가요? 몸조리 잘하셔요

mini74 2022-01-21 22:17   좋아요 2 | URL
이제 괜찮아요. 북사랑님 화가님 고맙습니다 ~~

책읽는나무 2022-01-21 20: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3차도 통증이 있군요?
주변에서 다들 괜찮다고 해서 그런가?싶었는데 아녔군요?ㅜㅜ
그래도 많이 괜찮아 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거리의화가 2022-01-21 22:18   좋아요 4 | URL
네 전 2차보단 더 후유증이 세네요 2차는 하루 정도 지나고 괜찮았는데 이번은 아닌 것 같네요 약간 몸살 증상도 겹치는 것 같습니다. 심한 건 아니구요 타이레놀이 효과가 좋습니다!

그레이스 2022-01-22 0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플래그 눈에 띔!
저는 그렇게 깨끗하게 재활용을 못해요
항상 뭉쳐서 돌아다니다 쓰레기통으로 ^^

거리의화가 2022-01-22 07:30   좋아요 3 | URL
플래그 원래 잘 이용안했는데 책 좀 더 께끗이 쓰고 싶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네요^^

scott 2022-01-22 10: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3차 휴우증 가볍게 지나가서 다행 입니다
화가님이 셀렉트 하신 책들 골라 담아가여~
주말 행복 만땅 ^ㅅ^

거리의화가 2022-01-22 13:05   좋아요 2 | URL
네^^ 스콧님 감사해요 행복한 주말 되세요*^^*

바람돌이 2022-01-22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3차 접종 무사히 지나심을 축하드립니다. 주경철씨 새책이랑 깃발의 세계사 흥미롭네요. 일단 담아갑니다. ^^

거리의화가 2022-01-22 18:26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책들 같습니다. 저와 관심사가 비슷하신 것 같아서...ㅎㅎ 여행 잘 다녀오신 것 같아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네요. 남은 주말 행복하게 보내시길!
 

19세기는 통상적 혁명사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19세기 저항은 보편적으로 발생했으나 국가에서 임계점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공한 혁명만 혁명인가? 

현존하는 제도를 소멸시키려는 목표를 지닌 운동이 국가 정치무대에서 위상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제도에 맞서는 대항세력이 되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대항력을 유지할 때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럼 혁명은 반드시 ‘아래에서’ 시작되는가? 

위로부터의 혁명도 있다.

메이지유신은 위장된 이념을 동원해 진행된 과거와의 급진적 단절이 일어나고 그 결과 주변부의 엘리트가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성공과 실패의 문제는 흔히 지나치게 학술적으로만 다루어진다. 19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문제를 동태적으로 파악했다. 그들은 자신이 느낌대로 혁명을 이해했다. 그들은 지원하거나, 환영하거나, 두려워하면서 혁명의 동향을 주시했다. 역사가는 이런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연구과정을 통해 이를 현실에서 발생한 운동의 기준으로 적용할 수 있다. 현존하는 제도를 소멸시키려는 목표를 지닌 운동이 국가 정치무대에서 위상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제도에 맞서는 대항세력이 되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대항력을 유지할 때 우리는 이것을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 P1395

혁명의 시대를, 유럽을 뛰어 넘는 혁명적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은 라이프치히의 연구자들이 제시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좌파를 연구한 사회학자 발터 마르코프와 그의 제자 만프레드 코속이 라이프치히에 비교혁명사 연구소를 세우고 마르크스와 독창적 견해를 가진 라이프치히에 비교혁명사 연구소를 세우고 마르크스와 독창적 견해를 가진 라이프치히의 역사학자 칼 람프레히트의 사상을 종합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코속이 만들어낸 ‘혁명주기‘란 개념이 활용되면서 상이한 국가와 지역에서 발생한 혁명 사이의 상호작용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비교적 쉽게 세계사의 시대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P1407

오직 아이티에서만 처음에는 인종차별 금지가, 이어서 노예해방의 강령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 P1423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혁명은 최소한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는 백성이 시민으로 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낡은 계층사회의 구조가 흔들린 것이었다. - P1431

대서양 연안의 혁명은 전례가 없는 기본적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광범위한 민중의 지속적인 정치화였다. 이런 현상의 후과로서 어떤 혁명이든 발생 후에는 혁명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정치는 더 이상 엘리트 정치가 아니었다. 혁명의 유산은 상당 부분이 혁명의 열기가 식은 뒤에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 P1434

대서양혁명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긴밀한 관계망 속에서 태어났다. 통합은 몇 가지 단계에서 중첩적으로 발생했다. - P1435

혁명은 오직 서적과 추상적 토론을 통해서만 서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미래의 혁명가들은 현장에서 배웠다. - P1442

19세기 중반 무렵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는 대규모 집단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 P1445

유럽의 혁명시대는 "전통적인 집단폭력의 형식으로부터 조직적인 이익주장으로" 바뀌어 간 전환점이었다. - P1450

인도와 중국의 봉기는 둘 다 애국주의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두 봉기는 다 같이 유럽의 1848-49년 헝가리 봉기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있다. 또는 두 봉기를 원시 민족주의 봉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1848-49 혁명과 비교했을 때 인도와 중국의 저항운동은 더 심각한 실패를 경험했다. - P1465

교전 쌍방은 모두가 ‘자유‘를 입에 달고 다녔다. 충돌의 심층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미국내전은 전형적인 유럽혁명과는 달리 입헌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내전은 입헌체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서 비롯된 혁명 이후 시대의 후속조치이자 충돌이었다. - P1469

멕시코혁명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내전으로 발전했다. 혁명이 몇 개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 멕시코 인구의 1/8이 목숨을 잃었다. 멕시코혁명은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식의 ‘대‘혁명이었다. 멕시코 혁명은 광범위한 사회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멕시코혁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광범위한 농민동원의 규모와 적대적인 외부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제시된 혁명 이론이나 이론이 없다는 점이다. - P1476

이란, 오스만제국, 중국의 혁명은 서방 모델의 불완전한 모방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상호 모방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들에게 상호 학습의 의지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혁명의 ‘전파‘ 현상은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발생했다. - P1480

러시아, 이란, 오스만, 중국 혁명의 발생은 모두 국제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네 나라의 당시 정권은 한결같이 심각한 군사적 패배 또는 외교적 실패를 겪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개혁을 통해서, 더 나아가 현존 정치체제의 폐지를 통해서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민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열강과 일부 자본주의 국가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강대한 국가를 만들려 했다. 그런데 이것은 러시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구상이었다. 러시아는 그 자신이 호전적인 제국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오히려 비용은 많이 들고 효과는 미미한 외교정책이 저항을 촉발했다. - P1494

혁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통치능력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반대로 통치능력의 문제는 문화적 가치관의 변화와 사회적 충돌의 강도에 따라 결정됐다. 이 밖에 외부 요인으로서 일반적으로 변경지역과 사회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의 혼란도 일정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 P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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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남성됨과 정치 세계

정치적 인간은 필요를 낳고 질서를 확립하고 영광된 이상을 추구하며 더 넓은 통제 구역을 찾는 방식으로 포르투나, 여성, 평화, 나태 등 이해할 수 없는 정치세계와 외양의 문제에 해당하는 기만, 유혹, 만족에 맞서 투쟁한다.
그는 장애물을 설치하거나 이들을 공격하면서 싸움을 걸고 그것들에 떨어져 소외될수록 그것들을 더 강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힘들이 인간을 유혹하고 괴롭히며 인간을 좌절시키고 위협한다.

정치의 묘책은 자신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확보하고, 행동에 돌입하게 강제하고 싶은 이에게는 시간을 줄여주고, 혼란과 지연을 통해 꺾고 싶은 이에게는 시간을 늘려 주는 것이다. 성공적인 정치 행위자는 정치 조건의 외양적 특성을 강조하거나 훼손하기 위해 정치 공간의 차원과 씨름한다. 인간은 자기 손에 닿는 것 그리고 사물의 피상적인 외양에 반응하기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구성원과 적에게 상황을 제시하며 이 지식을 활용한다. 군주는 "사물이 가까운 것이 아닌 멀리서 모습을 드러낼 때 두려움은 훨씬 커진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믿음을 염두에 두고 공간적 차원이 수반하는 왜곡을 활용한다.

마키아벨리가 분석하는 정치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 낸 필요가 정치적 사건의 역학을 움직이는 세계이고, 이렇게 확립된 정치 세계에서 성공의 명령은 이 역학을 영구화한다.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정치 기술에는 내용이 전무하며, ‘너 자신이 되라’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교훈은 ‘네가 맡은 역이 되라’는 것이다. 목적은 천의 얼굴이 있는 인간, 결국 자신이 맡은 역에 녹아들 대가급 연기자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관점으로 볼 때 모든 권력이 부패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목적 조직 행동의 주요 원칙으로서, 정치를 ‘선한 삶’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저주와 같은 권력이 부패한다. 올바르게 구성된 공적 삶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정의가 놓여야 한다.

‘질서’는 인간이 지배하지 않으면 인간을 지배해 버릴 자연과 세계, 바로 그것들에 대항하는 요새다. 인간 또는 그의 국가가 통제하지 않는 것은, 그가 기술로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가진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행위자들이 많이들 이렇게 외견상 평범한 지점을 무시한다고 보았고, 이 지점을 향해 지칠 줄 모르고 회귀한다.

권력은 언제나 무언가에 의존하고, 언제나 누구 또는 무언가를 통해 생기거나 만들어지고, 이런 관계를 피하거나 끊으려고 할 때마다 그 기반이 위협받는다.

마키아벨리의 ‘신군주’는 자신의 청사진이 작동하는 순간 무력하게 공동체에서 퇴장하는 루소의 입법자가 아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신군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권력을 얻거나 지키거나 행사하기 위해 공국을 손에 넣는다. 이 신군주는 인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자신의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기 때문에, 인민이 이 형상을 흡수하거나 영구화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군주의 권력이고, 군주는 그에 따라 자기 세계를 형상화한다. 그리고 그가 형상화를 부여하는 질료는 그의 권력 기반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 질료 또는 기반과 그의 관계는 반드시 도구적일 수밖에 없다.

질서는 유동성과 변화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남성적 대응으로, 인간의 근시안 강직성 자족성의 필요 등 본래 위협적이다 싶을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든 것들을 강화하는 반응이다.

포르투나는 마키아벨리 정치학 속 행위자가 자신의 상황이나 정치 환경에서 소외된 상태를 구체화한다. 그녀는 문화의 산물이자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인화된 자연으로 고안되었다.

여성에게 권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그녀가 움직이는 동기와 양식을 남성이 모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맞서 일어날 때, 남성은 그녀가 어디에서 오고 어떤 무기로 자기를 공격하는지 모른다.

정신적 물리적 힘에 있는 권력은 정치에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무기다. 야생에서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이런 권력이 부족할 때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약해지고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정치에서 인간의 취약성은 공격성으로 변하고, 그의 맹목에는 잔인성이 보충된다. 세계에서 인간의 불안한 관계는 그의 비르투에 가려진다. 자연계의 정글에서 살아가기에 부적합하던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마키아벨리의 정치라고 할 만한, 문명 속 정글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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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정치적 특질이 야심이라고 보았다.

야심은 지각과 판단을 왜곡하는 효과로 외관과 실제를 혼동하는 것이다.(실체화)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데 실패한 것을 포르투나로 부르며 이는 어떤 외부의 힘이 아닌 정신의 문제거나 정신이 꾸며낸 것이라고 당대 퍼져 있던 신비주의나 미신을 타파하려고 한다.

비르투는 인간이 가진 열정, 빈약성, 환경과의 양립 불가 등에서 비롯된 취약성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으로 아레테처럼 적극적인 탁월함인 것에서는 같지만 투쟁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에서 차이를 가진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무한하고, 지배에 대한 관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통제 욕구는 기정사실이라는 가정에서 정치적 이론화를 시작한다.

인간에게는 특유의 동물적 본성이 있는데, 거기에서 비롯한 충동과 존재 이유가 야심이다. 야심 때문에 인간은 정글의 생명체가 아닌, 정글 속 생명체가 된다. 즉 다른 어떤 동물보다 더 많기도 하고 더 적기도 한 생존 도구를 지닌 생명체, 자신의 존재 수단을 영원히 복잡하게 만들고는 자기 스스로 만든 문제 앞에 경외와 혼란을 느끼며 서 있는 생명체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에 나타나는 비르투의 다양한 적용 사례와 의미에 공통으로 함축된 특성은 극복이고, 이런 점에서 비르투와 아레테가 구별된다. 아레테는 압박과 분투를 수반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압박과 분투의 노고가 인간의 본성을 완벽하게 하거나 완성하는 운동이라고 보았다. 이와 달리 비르투는 인간의 타고난 방종, 목적 없는 열정, 나태 또는 수동성 따위에 맞서는 투쟁을 수반한다. 압박과 분투는 비르투와 아레테의 공통 요소다. 다만 비르투는 인간의 목표와 관련한 한계점을 바로잡으려는 세속적 추구고, 아레테는 완벽을 지향하는 투쟁이다.

이탈리아어 비르투가 라틴어 비르투스에서 왔고, 거장virtuoso이 성과를 낸 위대한 남성을 뜻하고 정력virility이 힘세고 강한 남성을 뜻하듯 비르투는 남성적 행위를 함축한다.

자신의 거처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 안에 있기를 불편해하는 마키아벨리의 인간은 환경을 징발해 자신의 보호 아래 다시 형태를 잡고는 그 세계에 기획과 목적을 새겨 넣어 자신의 연약함을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 때문에 합리성과 통찰력이 제한되어 있을 때, 비르투는 인간의 마음을 욕망 성취를 위한 수단과 기회에 더욱 외곬으로 집중시키고 대담하게 기회를 잡도록 격려한다. 세계에서 자신의 나약함에 압도되지 않으려면 인간은 지적 물리적으로 맹렬해야 하고 결기를 내보이는 한편 어떤 의미에서는 일차원적이어야 한다. 비르투적 의미의 자유는 평화를 적대자나 적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 대가로 집단의 사회성과 안정성을 희생한다.

비르투는 남성됨의 실용적 상징이다. 이것이 최대로 발휘될 때 남성에게 모든 부드러운 면이, 자신을 무너뜨려 노예로 삼으려는 여신들에 뒤덮이고 압도되고 유혹당할 모든 위험이 제거된다. 비르투를 추구하고 표현하는 데 목표를 제외한 모든 것은 도구나 걸림돌이 된다. 거장의 공간과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은 억눌러야 할 대항력이거나 형상을 부여할 질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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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민간기구인 적십자회.

사회주의 운동. 1914년 이전은 국가화했는지를 판단하는 걸 저자는 유보하고 있다. 그러나 1914년 이후에는 국제주의를 국가주의가 능가했다고 보고 있다. 사회주의의 갈래에서 나온 무정부주의는 국가주의에 밀려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여성운동의 시작. 제1차 여성운동의 물결로 참정권 획득 등 권리쟁취를 위한 투쟁이 이어진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해리엇 테일러 등. 자주 듣는 이름으로 이제는 익숙해졌다.

평화회의운동. 제일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평화회의라는 미명하에 참여국들 대부분은 식민지 정복을 위한 전쟁에 한창이었다. 평화회의에 참여하고 싶어도 개인의 이름으론 소집할 수 없었고 반드시 어느 정부의 공식발의가 있어야 했다. 대한제국도 제2차 헤이그회의에 참여하려했지만 실패했다.

몇 명의 제네바 시민의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태어난 적십자회는 ‘국제사회의 양심’이 성장해가는 중요한 단계였다. 인도주의는 강대국정치 일변도의 시대적 흐름에 균형을 잡아준 운동이었으며 민족과 국가 사이의 무정부 상태를 교정해주는 최소한의 규범이었다. - P1351

1914년 이전의 각종 사회주의 운동이 ‘국가화’했는지, 그렇다면 각자의 정치환경 속에서 어떻게 ‘국가화’했는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사학계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1914년에 사회주의운동의 국가화 추세는 국제주의를 능가했다. 출생기에 사회주의의 쌍둥이였던 무정부주의는 쌍둥이 형제와는 달리 튼튼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무정부주의는 근본적으로 망명정치와 음모 행동에 주력했다. 국경 초월은 무정부주의의 본질이었다. - P1352

50년대 중반에 여성운동은 정점을 이르렀다. 그 후 노예제 문제가 여성운동 조직 내부의 의견을 분열시켰고 19세기 50, 60년대 유럽의 각종 정치운동이 국가화하면서 유럽은 국제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60년대 초, 국제 여성운동 조직은 희소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25년 뒤의 여성운동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운동의 조직화란 면에서 보자면 그렇다.
1888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2회 국제여성대회가 열렸고 이 회의를 통해 탄생한 국제여성평의회(ICW)는 각국의 여성연합회를 거느린 우산조직이었다. 1907년, ICW는전 세계 400-500만 여성의 대변인이라 공언했다. 그러나 이때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제외하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만 평의회 구성원이었다. ICW 조직도 갈수록 보수적으로 변해가며 충돌을 피해가고 친귀족 치노앙실 경향이 강해졌지만 몇몇 나라의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각국의 정치운동을 자극했다. - P1355

19세기의 평화운동은 ‘자연적인’ 사회적 기초와 목표 집단을 갖추지 못한 채 개인의 도덕관념에서 출발했으며,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과 비교할 때 주도하는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정도가 더 높았다. - P1357

제1차 헤이그평화회의에 이어 1907년에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가 열렸다. 두 차례 회의는 국제법의 중대한 개혁을 이루어냈으나 중재제도를 수립한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들은 국제체제를 개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평화회의의 전통을 이어가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1899년, 26개 참여국 가운데서 유럽 이외의 국가는 여섯 나라(미국, 멕시코, 일본, 중국, 태국, 이란 )뿐이었다. 이것은 국제체제 가운데서 실제적인, 또는 감지되는 국가의 역량 분포를 반영했다. - P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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