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하버드 중국사
윌리엄 T. 로 지음, 기세찬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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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제국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중국이 고립된 채 다른 세계와 교류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청 제국 시대에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 끝 사이의 관계와 상호 영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질적으로 활발해졌고, 또한 더 대립적이 되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P12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의 역사를 다루는 책으로 사실상 하버드 중국사를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앞서 캠브리지 중국사를 읽으면서 청의 초중반 역사는 가볍게 다루고 후반부를 집중한다고 여겼는데 이는 페어뱅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충격에 의한 청 제국의 근대화 담론에 의한 것이었다(유럽을 비롯한 서구 중심주의). 


청대 역사학 방법론은 시기에 따라 새로운 담론이 등장하였다. 그렇다면 청대 역사학 관련하여 어떤 방법론이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1970~1980년대에는 프랑스 아날학파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사적 시각에 입각하여 명청을 왕조로 구분하지 않고 단일한 역사적 시대였다는 의미로 ’제국 후기’로 부르자고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근대’를 가기 위한 과도기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서양의 역사적 관점을 중국의 역사에 적용하려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신청사적 관점으로 그 전 왕조까지와는 달리 청은 다민족 정치체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채 이질적인 민족성을 대체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한족 중심의 민족 국가를 완성하기 위해 신장, 티베트, 만주, 대만 등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는 것에서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세 번째는 ‘유라시아적 전환’에 관점에 따른 것으로 17세기의 위기에 따라 금은의 유통과 기후 위기에 따른 재난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유럽의 도전과 아시아의 대응이라는 이분법에 의한 시각을 따르는 문제점이 있다.


청을 일으켜 세운 만주족을 어떻게 정의하고 분류할 수 있을까. 기존에는 종족과 같은 생물학적 범주의 개념에 따른 것이라 했지만 1980년대 들어오면서 맥락에 따른 역사, 사회, 정치적 협상의 산물로 생겨난 것으로 비중이 옮겨갔다. 개인적으로도 후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중국사에서 제국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관점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즉 명과 청이 완전한 ‘동양적 전제 국가‘였다는 관점과, 그들의 신민들을 전적으로 자활하도록 내버려두고 ‘세금 징수, 치안유지를 맡는 대리인‘이라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았다는 관점이다.
이 두가지 관점은 모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명과 청은 백성들을 전제적으로 위압하여 통제했지만, 반면에 일상생활에서는 국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기능들을 사적 영역의 개인 및 집단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한 실질적인 중간 영역, 즉 청이 왕조의 존속과 백성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특정 정책 분야가 있었다. 이 분야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식량공급, 통화의 규제, 민사소송의 확대와 관리였다. - P100~101


청은 아이신 기오로 씨족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에서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명 조정 하에 있던 부족장 중 한 명이었으나 다른 부족과 여러 관계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여진어를 만들고 팔기군 체제를 만들면서 통치력을 확대해나갔고 결국 독립된 국가를 만들었다. 

청은 대운하로 화중과 화남의 곡물을 북쪽 지역으로 공급하면서 둔전 체제로 변경의 둔전병과 가족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하면서 유사시 군을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상인이 가진 곡물량에 따라 소금 독점권을 부여해줌으로써 북쪽 군영 지대에 저렴한 비용에 곡물 조달이 가능하게 했다. 또한 과거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버리지 않고 국가 통치 체제로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종족 조직, 향촌 사회, 상인 조합이나 장인 조합 등의 자치 단체들은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청 시기는 서양의 근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구조적 변화를 경험한 시기였다. 인구가 급증하고 토지의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의 이주가 장려되었다. 이로 인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 간의 충돌 문제가 생겨났다. 과거를 통한 관료 선출 수는 극히 적어 급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위층에 올라가는 것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토지는 늘어났지만 수요가 많았고 특정층에 토지가 집중되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화되었다. 그래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부유층도 상업을 통해 이득을 노렸다. 이는 대운하의 발달, 개인적인 이동이 가능해지고 상업적인 계약과 재산권 보호가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멕시코, 포토시 광산 등에서 생산된 대량의 은이 중국에 유입되고 지세 납부를 은으로 하게 되면서 실물 경제는 확대되었다. 이는 서양이 들어오기 전 청의 내부 동력이 충분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방에는 신사층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관혼상제를 고수하는 등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전당업, 고리대금업, 상업, 기부금, 의연금, 건설업 등에 종사하면서 부를 얻고 현직 관료와 친분 관계를 쌓으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국 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항상 압도적으로 높았고,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 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경작과 독서‘라는 이상적인 신사-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던 중국의 엘리트 가문은 상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와 중국인들에게 교역의 미덕을 전파했다고 자부한 서양의 자칭 ‘상업 개척자들‘의 생각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물론 청 제국의 총 무역량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외국 무역의 증가와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본토로 침투한 서양 상인들로 인해 조금 더 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은 청제국의 광대하고 번창했던 국내 무역의 규모에는 전혀 근접할 수 없었다. - P219


그러나 은이 전세계적으로 귀해지면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외국과의 무역 수지에서 불균형 현상이 일어나면서 국내 제조업의 생산은 위축되었다. 이에 실업률은 증가하고 세금 부담률이 증가하면서 저항과 민란의 씨앗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가 1680년 중국 남부에 처음 들어온 후 양국 간 무역이 시작된 뒤로 영국은 차를 늘어나는 차 수입에 대한 수지를 맞추기 위해 면화에서 아편으로 중국 경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청은 세수의 감소와 무역 수지의 불균형으로 해마다 토지세 수입의 25퍼센트에 상응하는 은이 유출되면서 고통을 겪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공동체를 위한 구제의 노력도 뜸해졌다. 실질적인 소득과 관료들의 사기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고, 부패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방위 예산이 증발해버리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국내외적 위협에 대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군사력이 취약해졌다. 이러한 불황은 태평천국 운동이 터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불황은 매우 폭넓게 감지되었고, 1840년대 즈음에는 경기 침체가청을 붕괴 직전의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 P280


광동무역 체제는 옹정제의 계승자인 건륭제가 시행한 세 차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1757년에 청 조정은 이후로 서양이 청제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구는 오로지 광주뿐이라고 공표했다. 두 번째로 조정은 1745년경에 광주의 지방관료들이 발의하여 시행하고 있던 담보제도를 승인했다. 담보 제도를 통해 입항하는 모든 서양 선박들은 중국상행으로부터 보증과 감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760년에 청조정은 1년 중 외국 ‘오랑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간, 거주장소, 그리고 무역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정한 일련의 상세한 규정들을발표했다. 외국 상인은 아내와 가족들을 동반해 중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며, 상인들의 사적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 P251


태평 천국 운동은 1840년대부터 반외세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한족 우월주의와 결탁하여 신도를 확보해나갔다. 공자와 만주족 청 관리를 악귀로 지목하고 기독교가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 중국 고유의 전통 종교라는 등의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남경에서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지도층의 내분이 발생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태평천국에 관한 역사서술은 냉전으로 알려진 팽팽한 이념분쟁의 선두에 있었다. 태평천국 반란군이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개별 학자들의 태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이 반란은 거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의 ‘혁명적인 운동‘이 청에 대한 한족의 해방전쟁일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층과 그들이 지지한 봉건적 정권에 대항한 ‘농민 기의 의병을 일으킴)‘의 원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토지의 집단화 정책을 공포했다는 사실은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운동 특유의 기독교적 믿음을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탁월한 혁명 이론에 앞서 모든 운동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미신‘이었다고설명했다. 냉전 시기에 태평천국을 연구한 서양과 중국 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태평천국운동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집단화 계획을 위선적인 것으로 일축했으며, 심지어 태평천국의 환상은 전체주의적인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은 진정한혁명이 아니라 그저 거의 성공할 뻔했던 반왕조적 반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P326


태평 천국 운동을 왜 후대에 소환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동치제 시기 청은 기계 산업 이전의 단계를 실현해나갈 정도로 중흥의 시기였다. 그러나 내부 개혁에 실패하면서 동력을 잃었고 청일 전쟁 이후 삼국 간섭까지 이어지면서 대외적으로도 힘을 상실했다. 


청 제국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다른 의미에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 일본, 서양을 통틀어서 정치적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레닌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가장높은 단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인 자본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생산, 개발, 잉여 축적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했던 영국과 같은 대도시 국가들에게서 중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1920~1930년대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혁명에서 제국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중국 내에서 실현되었던 제국주의의 정도는 굉장한 논란의 대상이자혁명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제국주의는 또한 매우 광범위한 시간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시각의 제국주의는 서양 자본주의와 접촉한 직후의 중국 역사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몇몇 학자들은 이를 현재까지도 적용하고 있다."
반면 비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제국주의를 이와 완전히 다르게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는 경제적 개념이기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서구 열강(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확장을위한 세계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 학자들은 강대국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세력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 인식된 외교적 의사소통의 체제를 제국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 P407~408


제국주의에 대해 청은 혁명, 근대적 개혁주의, 대중적 반항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학생 운동, 손문을 비롯한 혁명가들의 운동은 1908년 무렵이 되면 영향력이 떨어지고 개혁주의 엘리트들이 부상한다. 이들은 철도 부설권 회수 운동, 자의국을 중심으로 하는 책임 내각 창설을 요구하는 등 개혁을 이끌었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고 나서 반란이 확대되고 드디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선포된다. 


19세기 후반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진화론적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민족국가의 올바른 기초는 종족적 또는 민족적 조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 탄생한 중화민국은 한족만이 독점하는 영역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청의 신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다양한 비한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즉각적으로 일부 몽골족들은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13년에는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만주족‘들의 고향에 주권 국가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1932년에 일본에 의한 대리국으로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 기오로 부의를 수반으로 하여 설립된 거대한 괴뢰국을포함하는 다양한 ‘만주국들‘이 간헐적으로 선포되었다." 21세기 초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티베트, 이슬람교도및 다른 분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청의 멸망 이후 20세기 내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청 역사의 유산이다. - P504~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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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관점이 본래부터 분별 가능한 만주족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멸된 것으로 보았다면, 신청사 담론은 왕조가 흘러가면서 만주족이 실질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건륭제를 비롯한황제들의 노력들은 소멸 위기에 처한 그 민족의 문화를 방어했다기보다는 기원 신화, 민족의 언어와 문학, 일련의 뚜렷한 문화적 특색을규정하여 만주족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들은이러한 계획을 통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역설적이게도 1644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족이 1911년에는 분명히 존재하게 되는 셈이었다. - P34

중국은 오랫동안 본질적으로 어쩌면 생물학적으로 다른민족들과 다르다는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청의정복은 그런 내부적인 인종 차별적 사고가 표면화된 계기였다. - P44

계속 확대되던 천자의 제국이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당·송과 명말청초에 제국의 생산성을 크게 확대시켰던 두 가지 경제적 개혁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서 청 제국은 백성들을 궁핍하게 하지 않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청 중기에 기하급수로 증가한 인구가이 전략을 더 이상 실현할 수 없게 만들었을 때까지 이러한 상승세는지속되었다. 성장하는 경제적 생산성과 더불어 조직적 병참도 성공을거두어, 청 제국의 예산은 사회 전체의 경제 생산에서 낮은 비율을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잘 작동했을 때 청의 행정은 저비용으로 유지되었다. - P66

중국사에서 제국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관점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즉 명과 청이 완전한 ‘동양적 전제 국가‘였다는 관점과,
그들의 신민들을 전적으로 자활하도록 내버려두고 ‘세금 징수, 치안유지를 맡는 대리인‘이라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았다는 관점이다.
이 두가지 관점은 모두 어느 정도 오류가 있다. 명과 청은 백성들을 전제적으로 위압하여 통제했지만, 반면에 일상생활에서는 국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기능들을 사적 영역의 개인 및 집단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한 실질적인 중간 영역, 즉 청이 왕조 - P100

의 존속과 백성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특정 정책 분야가 있었다. 이 분야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식량공급, 통화의 규제, 민사소송의 확대와 관리였다. - P101

청의 관료집단은 종족 조직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종족은 제국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유교적 정통론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종족에게 갈채를 보내야 했다. 실질적으로 지방의 관료들은 관할 구역 주민들의 복지와 생계를 위해 종종 종족의 자선 활동과 심지어 상업적 활동들에 의지했다. 옹정기와 건륭제 초기동안에 일어난 몇몇 경우에서 성급 관료들은 과도한 소송 절차로 인한지현의 부담을 줄여주는 방법으로 심지어 사법 권한까지 종족 수장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종족의 힘은 국가에 득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있었다. - P210

중국 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항상 압도적으로 높았고, 서양에서는 중국을 오랫동안 전형적인 농업 사회라고 생각했지만, 중기의 청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화된 나라였다. ‘경작과 독서‘라는 이상적인 신사-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던 중국의 엘리트 가문은 상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19세기에 중국에 들어와 중국인들에게 교역의 미덕을 전파했다고 자부한 서양의 자칭 ‘상업 개척자들‘의 생각은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물론 청 제국의 총무역량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외국 무역의 증가와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본토로 침투한 서양 상인들로 인해 조금 더 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은 청제국의 광대하고 번창했던 국내 무역의 규모에는 전혀 근접할 수 없었다. - P219

광동무역 체제는 옹정제의 계승자인 건륭제가 시행한 세 차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1757년에 청 조정은 이후로 서양이 청제국과 무역할 수 있는 항구는 오로지 광주뿐이라고 공표했다. 두 번째로 조정은 1745년경에 광주의 지방관료들이 발의하여 시행하고 있던 담보제도를 승인했다. 담보 제도를 통해 입항하는 모든 서양 선박들은 중국상행으로부터 보증과 감독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1760년에청조정은 1년 중 외국 ‘오랑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간, 거주장소, 그리고 무역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정한 일련의 상세한 규정들을발표했다. 외국 상인은 아내와 가족들을 동반해 중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며, 상인들의 사적 이동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 P251

청은 세수의 감소와 무역 수지의 불균형으로 해마다 토지세 수입의25퍼센트에 상응하는 은이 유출되면서 고통을 겪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고, 심각한 타격을 입은 공동체를 위한 구제의 노력도 뜸해졌다. 실질적인 소득과관료들의 사기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고, 부패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방위 예산이 증발해버리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국내외적 위협에 대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군사력이 취약해졌다. 이러한 불황은 태•평천국 운동이 터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적 불황은 매우 폭넓게 감지되었고, 1840년대 즈음에는 경기 침체가청을 붕괴 직전의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 P280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태평천국에 관한 역사서술은 냉전으로 알려진 팽팽한 이념분쟁의 선두에 있었다. 태평천국 반란군이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개별 학자들의 태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이 반란은 거대한 역사 서술의 초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의 ‘혁명적인 운동‘이 청에 대한 한족의 해방전쟁일 뿐만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지주 계층과 그들이 지지한 봉건적 정권에 대항한 ‘농민 기의 의병을 일으킴)‘의 원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토지의 집단화 정책을 공포했다는 사실은중국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운동 특유의 기독교적 믿음을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탁월한 혁명 이론에 앞서 모든 운동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미신‘이었다고설명했다. 냉전 시기에 태평천국을 연구한 서양과 중국 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태평천국운동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집단화 계획을 위선적인 것으로 일축했으며, 심지어 태평천국의 환상은 전체주의적인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은 진정한혁명이 아니라 그저 거의 성공할 뻔했던 반왕조적 반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P326

협조 정책은 두 사건, 즉 1870년에 있었던 영국의 올콕 조약 AlcockConvetion 조인 거부와 천진에서 일어난 대학살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공식적인 정책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억눌려 있었던 불만과 백성의 고통에 따른 산물로 볼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청과 여러 서구 열강은 1860년의 북경 조약에 뒤이은 협정들을 지속적으로 맺어나가는 데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그들의 태도는 많은 지지자들의 요구에 미치지 못했다. - P385

통상적으로 19세기 말의 조선에서 청의 외교는 ‘근대화한 일본의팽창주의적 위협과는 대조적으로 구시대적인 ‘중국적 세계 질서 속에서 불안정한 속국에 대해 자신들의 종주권을 유지하려는 지연 작전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 사대부 계층 내의 청 지지 세력을유가 보수주의자로, 이에 대항한 친일세력을 진보주의자로 묘사하는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상당 정도 사실의 묘사라기보다일본팽창주의자들의 선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청이 조선에서 완전히 근대화된 서구식 제국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청이 한 행동들은 오랜 한중관 - P398

계의 역사 속에서도 선례가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동아시아 지역에서 팽창주의적 서구 열강들이 행했던 수법과 더욱 공통점이 많았다.
또한 이는 청 제국 중흥의 일부로서 1880년대에 시작한 신강, 대만, 만주에서의 변방 지방화정책과 유사했다. - P399

청 제국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다른 의미에서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국, 일본, 서양을 통틀어서 정치적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를 레닌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가장높은 단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인자본주의 시대에 발전했던 생산, 개발, 잉여 축적의 가장 효율적인 방식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했던 영국과 같은 대도시국가들에게서 중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즉 대도시 국가들은 그들의잉여 자본을 투자하기 위한 출구를 찾고 있었으며, 국내 경제의 침체와 붕괴에 직면해 있었다. 중국 같은 나라들은 잉여자본 투자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에서 산출된 이익들은 대도시 경제로 다시 보내졌다.
이로 인해 투자 대상이 된 국가들의 자본이 유출되었고, 격차 해소를위한 산업화에 자금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다. 1920~1930년대의 국 - P407

민당과 공산당의 혁명에서 제국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중국 내에서 실현되었던 제국주의의 정도는 굉장한 논란의 대상이자혁명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제국주의는 또한 매우 광범위한 시간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시각의 제국주의는 서양 자본주의와 접촉한 직후의 중국 역사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몇몇 학자들은 이를 현재까지도 적용하고 있다."
반면 비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제국주의를 이와 완전히 다르게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는 경제적 개념이기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서구 열강(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확장을위한 세계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하는 학자들은 강대국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세력 균형을 모색하는 가운데 인식된 외교적 의사소통의 체제를 제국주의로 간주하고 있다. - P408

대청 제국이 종말을 맞았다고 해서 대부분의 보통 중국인의 삶이 단기간에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산동성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혁명을 경험했던 어느 여성은 훗날 자신에게 실제로 변화된 것은 단지화폐 단위뿐이었다고 회고했다. 혁명 이후 청의 동전보다 은화가 통용되었지만, 그 여성의 임금 가치는 영향을 받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엘리트 남성들에게 혁명은 강력하고 충격적인 의미를 지닌 문화적 사건이었다. 몇몇 학자들은 멸망한 왕조에 대한충절을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행위로서 자살을 감행했고, 1920년대까지도 새로운 중국의 일부 남성들은 변발을 자르고 근대적 머리 모양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행동은 청에 대한 복종과 자랑스럽게 변발을 유지했던 선조들에 대한 효심이 결부되어 나타난 것이 - P503

었다. 더욱 광범위하게 청의 멸망은 여성의 전족과 같은 세속적이면서 성적으로 뒤틀려 있는, 이제는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낡은 관습의자취에 대한 독특한 향수를 가진 남성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 P504

19세기후반에 새로운 종류의 사회 진화론적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민족국가의 올바른 기초는 종족적 또는 민족적 조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탄생한 중화민국은 한족만이 독점하는 영역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청의 신민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다양한 비한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즉각적으로 일부 몽골족들은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13년에는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만주족‘들의 고향에 주권 국가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1932년에 일본에 의한 대리국으로서 중국의 ‘마지막 황 - P504

제‘인 아이신기오로 부의를 수반으로 하여 설립된 거대한 괴뢰국을포함하는 다양한 ‘만주국들‘이 간헐적으로 선포되었다." 21세기 초반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티베트, 이슬람교도및 다른 분리주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청의 멸망 이후 20세기 내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청 역사의 유산이다. -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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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근황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기진맥진한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팀장이 나간 뒤로 팀에 큰 공백이 생겼다. 이 때문에 결정을 내가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무래도 그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데다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전하는 말이 오해가 되지 않는지 확인하는 과정도 어려움을 갖게 한다.

몇 번이나 그만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할 정도로 최근에는 어려움이 컸다.

최근 들어 두통이 잦았고 도무지 안 되겠어서 오늘 휴가를 내고 쉬고 있다.

하루 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밀린 리뷰도 쓰고 가벼운 책을 읽고 그랬다. 참! 달리기도 했다.


걷기와 달리기는 차원이 다른 운동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1분 뛰는 것과 1분 30초를 뛰는 것이 왜 이리 간격이 큰 것인지... 이제 4번째 진행했는데 하다가 막판에 좌절할 뻔했다. 내 체력이 얼마나 저질인지 새삼 느꼈다. 

어쨌든 체력이 되어야 머리도 굴리고 책도 읽고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생각하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어제 북플에 접속했다가 친구분들의 '인생네권'을 확인하고 나도 부랴부랴 했다.

좀 고민하기는 했지만 더 고민한다고 크게 달라질 목록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곧장 생각나는 책으로 꼽았다. 



<하워드 진, 역사의 힘>은 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머리 두들겨 맞은 듯 강한 인상을 받았던 책이다. 아무래도 내 성정과 잘 맞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얼마 후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실제로 만나지 못했음이 그리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나는 언젠가 그 분의 강연을 꼭 한 번 경험하고 싶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의 책은 그래도 남아 있으니 계속 읽어봐야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은 한국 전쟁사를 제대로 읽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다. 그의 저작 이전과 이후가 나뉘어진다고 할 정도로 국내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내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특히 인민위원회의 역할과 한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사실 박명림 선생님의 책이나 정병준 선생님 등의 책도 인상 깊게 읽었지만 이 책의 비중을 더 높게 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해방 일기> 시리즈는 김기협 선생님의 저작을 본격적으로 파게 된 계기였다. 민족주의적 시각에 경도되어 있던 나는 이 책을 계기로 균형 잡힌 역사 서술과 좌우파를 넘어선 시각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재밌고 흡입력이 좋다. 1권을 읽다 보면 2권을 읽고, 이후 10권까지 쭉 달리게 된다. 또 이 책 덕분에 내가 해방 후 3년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에 인생책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어른이 아이에게 이야기 식으로 한국사를 재밌게 들려주는 방식이라 잘 읽히고 친근하다. 이 책을 꼽은 것은 그가 역사학자로서 걸어온 발자취에 대한 존경이 어느 정도 작용했기도 하다. 1980년대 이후 시기 앞선 세대와는 달리 주류적 시각이 아니라 역사에서 숨은 민중의 목소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셨고 그랬기 때문인지 민중사가 강세를 이룬 때도 있었다. 지금은 다변화되었지만. 그 중 18권을 고른 것은 그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철쭉이 피고 알록달록해진 세상을 보는 것이 그나마 즐거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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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4-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역덕력 인정합니다!
팀장님의 공백에 찾아오는 두통이라니….ㅠㅠㅠㅠㅠㅠㅠ 회사야, 그 팀장 다시 잡아와라!!!
달릴 때는 바닥을 조심조심! 파인곳이나 느닷없이 등장하는 계단을 특히 조심하시구요 🏃🏽‍♀️🏃🏽‍♀️🏃🏽‍♀️달리세요!!

거리의화가 2024-04-25 06:22   좋아요 1 | URL
팀장 빨리 뽑아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새로 뽑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ㅠㅠ
안 그래도 달릴 때 계단 있는 곳은 피하고 트랙 있는 운동장이나 평평한 산책로에서 하고 있어요. 원래 발목이 안 좋았어서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달립니다. 쟝님 감사해요^^

새파랑 2024-04-2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화가님은 역사!
역시 역사!!
네권선택을 고민하는 시간도 재미있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4-25 06:23   좋아요 1 | URL
ㅋㅋ 네. 역시 어쩔 수 없는 역사 덕후인가봅니다^^; 저도 선택을 고민할 때만큼 설레고 즐거울 때가 없었어요. 알라딘 덕분에 다양한 분들의 선택지를 볼 수 있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잠자냥 2024-04-2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면서 꽃 사진 찍은 거면 인정!! ㅋㅋㅋㅋ (뭘?! ㅋㅋㅋㅋ)
아 진짜 역적 아니고 역덕!!

거리의화가 2024-04-25 06: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체력이 늘어 달리면서 꽃 사진을 찍을 정도가 되면 좋겠네요. 역적 아니고 역덕이라서 다행입니다!ㅎㅎ

다락방 2024-04-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거리의화가 님 진짜 넘나 멋집니다!! 특히 역사책이 인생 네권 이라니! 😍
달리기 시작하셨다니 정말 좋고요 우리 함께 열심히 달려봅시다. 저는 오늘 열한번째 달리기 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4-04-25 06:27   좋아요 0 | URL
선택할 때 다른 분야의 책은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났어요. 떠오른 책을 바로 고른지라!ㅋㅋ 늘 마음 속에 자리한 책을 고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다락방 님 11번까지 어떻게 가셨나요ㅠㅠ 저 4번인데 이미 힘듭니다!ㅋㅋ 언어도, 달리기도 화이팅이에요!

은하수 2024-04-24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역덕으로 인정합니다.
하워드 진 저도 꼭 만나고 싶은 분이었는데.. 나중에 천국에서라도요~~^^
꽃 천지 구경하며 달리기라니 멋집니다. 두통이 날아갔을 듯 해요~~

거리의화가 2024-04-25 06:29   좋아요 1 | URL
하워드 진 강연을 실제로 듣고 얼굴을 본 독자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운일까 생각 많이 했었어요. 천국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뵐 수 있다면 좋겠죠!ㅎㅎ
꽃 천지 구경하며 달리기 정말 할 만합니다. 달릴 때는 숨차서 고통이지만ㅋㅋ 그래도 달리는 순간은 잡 생각 달아나서 좋더라구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4-2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리기도 하시다니, 가끔 달리기도 해야 한다지만 저는 늘 걷기만 할까 합니다 빨리 걸으면 되죠 잘 쉬셨네요 하루라 할지라도 그런 날 있으면 좀 더 낫겠지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25 06:30   좋아요 0 | URL
저도 늘 걷기만 하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요새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달리면서 생각이 그 순간은 달아나서 좋더군요. 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맛이 꽤나 좋습니다. 하루 쉬니 좀 낫네요. 오늘은 어떤 일이 기다릴지^^; 희선님 건강 잘 챙기시고 즐거운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자목련 2024-04-2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역사서는 화가 님으로 통한다!
그나저나 업무로 힘드셔서 걱정이네요.
달리기, 산책, 그리고 책과 꽃들이 화가 님께 평안을 찾아주기를 바라요.
꽃 사진과 하늘 넘 예쁩니다!

거리의화가 2024-04-28 18:22   좋아요 0 | URL
요 근래 들어서는 일요일 오전만 되면 이미 한숨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시간이 약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날이 포근해져서 철쭉이 절정을 지난 것 같더군요. 오늘은 덥기는 했는데 미세먼지도 없고 날 좋아서 걷기 참 좋았습니다. 자목련님 남은 4월 행복하게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04-2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쪽 두권은 저도 읽었습니다 ㅎㅎ
그래도 인생책 4권에 포함시키는 화가님 포스는 못따라가겠네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4-04-28 18:23   좋아요 1 | URL
역시 그레이스님 2권 읽으셨군요. 멋지십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독서력이 짧아서일 것 같아요. 편중된 독서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캠브리지 중국사 11 - 하 - 청 제국 말 1800~1911, 2부 캠브리지 중국사 11
존 킹 페어뱅크.류광징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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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1권은 청나라 제국 말 1900년부터 1911년까지 그 파도 같았던 시기를 드라마틱하게 다룬다. 이 시기 가장 큰 사건은 역시나 ‘신해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그 이전 중국의 개혁의 모습을 살펴보자. 


1860년대 중국을 여행한 일본인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에도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며 대응책을 찾기 시작한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으로 변화하였고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국가의 맹주 자리를 꿰차게 된다. 1901년 이후가 되면 중국인의 일본 유학이 유행 수준으로 급증하는데 이 유학세대들이 훗날 중화민국의 1세대 지도자가 된다. 더군다나 1905년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관료 선발을 해외 유학 경험자를 원하면서 청년들에게 유학을 더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인들은 일본 유학으로 자국의 개혁에 대한 열망에 눈을 떴지만 그 지식이란 근본적으로 일본인들이 번역한 서양 지식이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일본과 중국의 혁명가들은 같은 문화와 같은 인종에 대한 동질성으로 뭉쳐야 한다는 사고를 가졌는데 이는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통하는 측면이 많았다. 


1900년부터 신해혁명 이전까지 중국은 다양한 정치,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앞서 말한바대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신식 학당이 건립되었으며 유학이 장려되었다. 하지만 교육의 외양만 바뀌었을 뿐 실 내용은 여전히 과거 유학을 고수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군사 제도의 개혁도 있었다. 36진의 신군이 만들어졌고 상비군 이외의 예비군인인 속비군과 후비군이 조직되었다. 이후 육군 통합 체계가 만들어지고 금위군과 해군처가 만들어진다. 북양군도 육군부에 통합되면서 군대 편제가 일률화되었다. 

19세기 말 중국은 국력 신장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근대 기업을 장려하였다. 근대 기업은 관료들을 그에 맞게 배치하면서 공업화에 힘썼다. 19세기 하반기가 되면 새로운 상인인 매판, 교역업자, 금융업자, 신상이 등장한다. 


1911년 청 제정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선다. 그러나 신해혁명에 대한 혁명의 의미 자체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등 최근 그 의미 자체를 의문시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 혁명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들은 신해혁명이 지금까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현상이었지만 이 혁명에 대한 실제적 성과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었다는 역설로 기울고 있다(P770). 


1898년 유신 운동이 실패한 후 공화제를 주장하는 혁명파와 급진 개혁파들은 각자의 세력을 얻기 위해 집중했다. 1900년대 초 늘어난 유학생들은 이 혁명 세력의 강력한 지지자들이 되었는데 대체적으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중화민족을 지키며 중국이 부강해져야 한다 생각했다. 

쑨원은 하와이에서 홍중회라는 혁명 조직 결성을 주도했는데 그것은 중국 최초의 근대 혁명 단체였다. 그는 캉유웨이, 량치차오, 다른 유신파들과 합작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캉유웨이는 1899년 보황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광서제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만들고자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이 때 쑨원도 이를 반청 세력을 결집할 기회로 보았기에 캉유웨이에게 의사를 타진했으나 거부당했고 보황회의 반란도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쑨원은 이후에도 비밀 결사, 화교 세력들, 일본인과 서양인 등에게 호소하는 전략으로 운동의 기반을 삼았다. 

청일전쟁을 겪은 이후 학생들은 일본 유학으로 깨어난 의식을 바탕으로 청의 제정에 강력히 반대하고 공화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1903년 무렵 량치차오는 미국을 여행하며 혁명과 공화주의만으로는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국민들 개인의 계몽이 이루어져야 자치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쑨원의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반제국주의 구호는 약해지고 서구식 개혁이 강조되었으며 배만주의는 강화되었다. 중국의 병폐는 대부분 이민족 왕조 때문인 것으로 치부되는 등 반만 선전이 먹혀들었다. 

흩어져 있던 혁명 운동이 1905년 중국동맹회라는 조직을 기반으로 묶이게 된다. 중국동맹회는 처음에는 학생 조직을 연합하고 이후에는 쑨원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고 나중에는 전국 규모로 반청 연합 단계로 나아가고자 했지만 통일성이 약하여 1908년 무렵 사실상 활동은 중단되었다.

1911년 5월 청 조정은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고 철도 국유화를 위한 외국 차관 도입을 내놓는다. 차관은 청조가 처음 들여오는 외국 차관이 아니었지만 반청파들은 정부의 무책임을 들며 폭정의 근거가 되었다. 이는 종족 문제와 애국심, 민주적 의식, 경제적 이익을 모두 건드리는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분열은 본질적으로는 도시화와 서구화를 따르고 있던 중국을 대부분 농촌에 기반하고 있는 전통적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구식의 혈연, 계급, 지연 관계를 뛰어넘기 시작한 - 예를 들어 상회와 정당 같은 - 새로운 결합과 새로운 동맹 관계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혁명 운동에서 생겨난 각종 분열, 각종 결합 방식들, 이해관계, 각종 감정이 이후 중국인들의 삶을 수십 년 동안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1900~1913년 사이의 시기는 중국 혁명의 첫번째 단계를 대변하게 된다. - P772


1911년의 중국은 해체된 사회가 가진 이중적 전망을 보여주었다. 사회는 동시에 신군, 근대적 엘리트, 혁명파 등 1911년에 왕조에 반대하기 위해 협력한 일군의 새로운 사회 세력의 온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생명을 서서히 영혼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던 사회의 흐릿한 틀 안에 감추어 둘 수는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소위 소년 중국Young China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도 못한 채 극히 다양한 지역적 상황에 불확실하게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면 위의 거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민중의 압력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왕조의 권력이 소진되지 않았다면 벼락부자(폭발호戶), 청년 장교, 활력에 찬 대도시의 지식인들이 정말 왕조를 종식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결국 황제를 퇴위시킨 것이 과연 이 소년 중국의 공격이긴한 것일까? 최고위층의 정치적 의지력의 약화와 상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시 폭동인 신해혁명은 아편전쟁 이후의 전례 없는 사회적 변화의 결과이자, 농업 제국인 낡은 세계에서 등을 돌리고 정치 조직과 경제적 발전에 관한 새로운 기술을 서구에서 찾으려고 한 도시 엘리트들의창작품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공화국은 당시 새로운 엘리트들의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탄생시킨 청조의 붕괴는 농촌 전체 내부에 깊숙한 근원을 가진 운동이 서서히 진척되면서 나온 성과였다. - P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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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 : 재일 디아스포라의 목소리
김용규 외 엮음, 김석범 외 인터뷰이 / 소명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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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위치는 이산, 이주, 망명으로 인한 상실감과 상처를 경험하면서도 자신들을 억압한 문화의 차별과 폭력에 맞서 비판적이고 급진적이며 소수적인 문화, 특히 타자의 환대에 열린 문화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인터뷰한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의 이런 곤경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20세기 들어 국권의 상실과 민족 분단으로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이주하여 식민주의와 분단체제에 의한 억압과 차별을 감내하면서 이를 극복할 비판과 저항의 형식을 창조해온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민족적 현실 때문에 '자기 민족이 사는 공간'을 떠나야 했던 박탈과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자기 민족이 아닌 민족이 사는 공간'에서도 차별과 억압을 겪어야 했던, 민족과 민족의 사이-경계in-betweenness를 살아온 존재들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소중한 것은 이런 사이-경계의 사유를 토대로 민족 내의 다수자의 체제와 이념의차별적 폭력성을 집요하게 문제 삼으면서 그것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P6~7


구한 말, 일제 강점기 시기 한반도에 살던 이들 중 자의든 타의든 고향을 떠나 해외로 나가서 정착한 이들이 많다. 그들은 미국, 일본, 멕시코, 남아메리카 지역 등 어렵게 그 곳에서 살면서 정착을 위해 애를 썼고 그 중 상당수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기도 하고 실제로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이들도 존재한다. 1900년 무렵 넘어갔다고 한다면 어느덧 1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몇 세대가 흘러간 것이다. 근래 들어 이민 세대들이 딕테, 마이너 필링스, 파친코 등과 같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놓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이민자들에 대한 생각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재일조선인도 어느덧 3세대가 훌쩍 지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세대 별 재일조선인들을 만난 인터뷰을 기록화하여 담고 있다. 세대가 지나면서 변화하는 재일조선인의 위치와 그에 따른 생각을 확인해볼 수 있다. 다만 인터뷰 시기는 2014년 무렵 10년 전인 경우가 많아 대담자들의 최근 생각이 아닌 것이 좀 아쉬웠다. 그래도 古 서경식 선생님의 경우는 2014년, 몇 년 후로 2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실어서 시간이 흐른 만큼 변화한 생각도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1세대가 식민주의와 냉전과분단의 역사적·집단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인식했고 주로 조국에 대한 집단적 의식을 갖는 경향이 있다면, 2, 3세대들은 그런 경험을 물려받으면서도 일본사회의 일상을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1세대보다는 일본사회 내부에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차별과 마주쳤을 것이다. 따라서 2세대 이후에는 모국과의 관계 못지않게 일본사회 내부의 문제와의 깊은 연관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1세대에서는 주로 디아스포라의 집단적 생성이 두드러진다면, 2, 3세대에서는 디아스포라의 개인적 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P8~9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존재쯤 될까. 나의 정체성이 흩어져 있다면 고달픈 생각이 들 것 같다. 원치 않아도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태어나보니 우연히 대한민국에 자리잡은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다면 지금의 정체성과는 다른 색채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 자리하든 정체성은 혼란스럽기 마련일 것 같다.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것이 정체성이 아닐런지. 어쨌든 이들은 몸은 타지에 남아 생활해야 했는데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분투한 흔적을 인터뷰를 통해 엿보게 된다.


첫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1세대 김석범이다. 그는 1925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겪고 일본공산당에 입당 및 탈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화산도’라는 대표작을 써낸 문필가로 지금까지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글을 보면 민족 의식이 뚜렷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도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온전히 그 시절 역사를 살아낸 분 아니던가. 그는 재일조선인으로서 강한 정신을 갖고 버티며 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뉴라이트 등의 극우 인사들에 대한 역사 인식에도 비판적 잣대를 들이댄다. 현재의 정치상의 분열과 대립이 과거에서부터 흘러온 것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뉴라이트 사람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고 말이야. 역사는 그저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역사의 진리를 가지고 맞서 싸워야 하는거죠. 그러니까 디아스포라 문제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겁니다. 다 관계되어 있는 것이죠.

요는 분열의 원인이 외세와 역사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외세와 결탁한 세력, 특히 이승만 같은 친미주의자에 있다는 겁니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을 바라면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서 공작을 하러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영·중·소와 조선의 임시 정부가 신탁을 했더라면 꿈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6.25도 터지지 않았고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을 수도 있었겠죠. 앞으로 통일논쟁할 적에는 왜 분열되었느냐, 외세 때문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왜 단독선거가 이루어졌느냐하는 것을 꼭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50


두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2세대 서경식이다. 그는 최근까지도 일본, 한국을 넘나들며 가장 많은 활동을 벌였지 않았나 한다. 조금 더 활동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이제는 뵐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든다. 특히 소수자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일조선인 2세대로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들과의 사이에 위치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과 일본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했고 디아스포라라는 개념 자체를 많이 설파했다.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사고한다는 것이 디아스포라적 사고임을 그는 특히나 강조한다. 국가주의적, 국민주의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이는 차별이 아닌 차이를 보아야 하는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디아스포라적인 사고라는게 한 마디로 하면 국가에 거리를 두고 국가에 대항해서 하는 사고죠. 그러니까 디아스포라적인 사고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국민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국가에 속하고 일본의 다수자, 미국의 다수자가 디아스포라적인 사고를 가져야지 대화도 이루어지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간단치 않아요. 그런데 적어도 지식인, 글 쓰는 사람, 예술 하는 사람은 잘 견디고 그 방향으로 다수자를 교육해야 합니다. 소수자가 "소수자, 싸워라"라고 하면 아까 말한 악몽이 이뤄지기 쉬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에요. … 조국이 분단되어 있고, 이렇게 계속 70여 년 동안 차별을 당하면서도 40만 넘는 사람들이 그래도 조선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 그 사람들 중에 제가 볼 때에도 민족적인 지식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조선인으로 살겠다는 사람이 있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에요. - P105~106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재일조선인 2세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어떻게 민족의식을 만들어 내었는가'를 볼 때는 이 사람이 일본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해요. 나라는 사람이 일본사회를 묘사할 때, 소위 재일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든 미국인이든 그런 사람들이 일본사회를 묘사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보고 있는지, 그걸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재일조선인의 의식을 분석한다, 연구한다고 할 때, 재일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시선으로 세계나 사회를 다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 P143


세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3세대 최덕효다. 그는 영국 셰필드 대학 교수이자 역사학자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문제를 박사 논문으로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 인터뷰에서 특히 역사학자로서의 보편적 고민, 그리고 일본의 주장과의 충돌에서 오는 불편함과 갈등 등을 논한 부분이 정말 좋았다. 그는 존 다우어의 책 ‘패배를 껴안고’라는 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다우어는 미국의 점령에서 일본인의 목소리와 행위에 주목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제국의 유산과 재일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적 유산에 대한 문제나 비판은 누락되어 있다고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해서도 일본과 미국의 입장은 있지만 한국의 입장은 빠져 있다는 비슷한 비판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야말로 일제의 식민주의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어떻게 통합하여 얘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가 본류고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주변에 있는 다른 역사가 아니라 이 둘을 역사적으로 동시에 볼 수는 없을까? 이런 문제 의식 하에서 이 두 역사를 재일조선인의 시각 속에 통합합으로써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 혹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 제 관심은 국경을 넘어선 체제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있었습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하듯이 일국사 내지 민족사가 아니라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연결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 P184


마지막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3세대 정영환이다. 그는 조선근대사와 재일조선인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로 개인적으로 몇 차례를 통해서 글을 만난 적이 있어서인지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 국내에서 논란이 된 후 그 책이 일본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라는 책으로 펴내며 한국 사회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박유하의 책이 소비가 된다는 것은 그 담론을 받아들이면서 전쟁과 식민 지배 책임에 대한 일본의 호응이 있다(국내 일부 극우 인사들도 마찬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1994년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고 1998년에는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북한이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켜보며 자란 세대다. 그가 조국을 복잡한 심경으로 느낀다는 부분은 솔직함으로 다가왔다. 그는 최근 지역사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역사 속에서 조선인들의 모습에 대한 연구를 넘어 제3세계에 대한 연구라니, 앞으로 그의 글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조국의 문제는 학교에서 항상 제기되는 문제, 어떻게 조국에 보답할까?, '당신은 일본에 있지만, 어떻게 조국을 위해서 살 것인지? 하는 문제들, 그러니까 조국을 위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직접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죠. 학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조국이 고등학교 시기까지 내가 아는 조국이었고, 학교 다닐 때 공책, 학습장이나 그런 것을 사도, 모두 총련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금강산이나 묘향산, 평양에 있는 여러 시설들이 그려져 있었죠. 조국은 저에게 그런 것이었어요.

저에게 ‘조국’은 동질성을 느낄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차이를 느낄 경우가 많은 대상입니다. 다른 세계인데 한편에서는 친밀감도 있는 복잡한 심정입니다. - P257~258


재일조선인 각 세대별 언어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1세대 만해도 조선의 말과 글을 쓰고 지켜야 한다는 구속이 강했겠지만 2세대, 3세대에 가면 그 구속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언어적 행위를 이행했는가. 

아래는 차례대로 김석범, 서경식, 최덕효인데 1세대와 2, 3세대가 구별됨을 확연하게 느끼게 된다. 일본어가 편해진 2, 3세대는 오히려 조선어를 말해야 하는 것이 더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한국어를 잘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놓지 않는 자세가 놀라웠다.


내가 말하고 싶은 언어의 두 측면은 개별성과 보편성입니다. 개별성이란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 일반적으로는 민족이죠. 그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어도 한국어도 다 민족과 연관되어 있죠. 발음도 그렇고 글자의 모양도 그렇고요. 또 하나의 측면은 보편성, 말하자면 그것을 다른 언어로 대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근대 일본말이라는 건 거의 서양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과 한국에도 퍼져 나간 것이죠. 이런 점은 일본이 동아시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죠. 이런 번역을 통해 근대 문명을 동양으로 보편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죠. 내가 작가로서 언어의 주박을 느낀 것은 일본어의 민족적인 측면입니다. 모양만이 아니라 일본어 발음이나 글자 등이 일본적인 것이지 조선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데서 주박을 느끼기 시작한것이죠. 일본 사상뿐만 아니라 글 자체로서 말이죠. 그것과 더불어이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 등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본적인 의식의 잔재, 일본어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구속성, 그런 주박, 더 나아가 우리를 지배한 지배자의 글로 써야 한다는 굴욕감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었던 겁니다. - P60


저는 한국어를 완벽하게 사용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은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동시에 느끼고 있어요. 디아포스라적인 것인지 제 개인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 본심입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 생각을 그래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일본어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한때는 오랫동안 좌절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나는 마지막까지 해방될 수 없는 식민지 시민이다'라고 진짜로 진지하게 느꼈었어요. 고등학생 때 제 시가 시집에 실렸는데, 후기에 앞으로 다시는 시를 안 쓸 거라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일본어로 표현하는 것에 반해, 나는 한국어로 표현할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벌써 그렇게 느꼈어요. - P98


제 신체 감각으로서는 일본어가 제일 편하고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이 조선사람으로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어가 편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본어가 편한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어를 민족의 자격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를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구축하려고 하면 언어를 고민해야 하고 항상 일본어를 상대화하려는 노력, 즉 일본어가 모어라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 그런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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