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민간기구인 적십자회.

사회주의 운동. 1914년 이전은 국가화했는지를 판단하는 걸 저자는 유보하고 있다. 그러나 1914년 이후에는 국제주의를 국가주의가 능가했다고 보고 있다. 사회주의의 갈래에서 나온 무정부주의는 국가주의에 밀려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여성운동의 시작. 제1차 여성운동의 물결로 참정권 획득 등 권리쟁취를 위한 투쟁이 이어진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해리엇 테일러 등. 자주 듣는 이름으로 이제는 익숙해졌다.

평화회의운동. 제일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평화회의라는 미명하에 참여국들 대부분은 식민지 정복을 위한 전쟁에 한창이었다. 평화회의에 참여하고 싶어도 개인의 이름으론 소집할 수 없었고 반드시 어느 정부의 공식발의가 있어야 했다. 대한제국도 제2차 헤이그회의에 참여하려했지만 실패했다.

몇 명의 제네바 시민의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태어난 적십자회는 ‘국제사회의 양심’이 성장해가는 중요한 단계였다. 인도주의는 강대국정치 일변도의 시대적 흐름에 균형을 잡아준 운동이었으며 민족과 국가 사이의 무정부 상태를 교정해주는 최소한의 규범이었다. - P1351

1914년 이전의 각종 사회주의 운동이 ‘국가화’했는지, 그렇다면 각자의 정치환경 속에서 어떻게 ‘국가화’했는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사학계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1914년에 사회주의운동의 국가화 추세는 국제주의를 능가했다. 출생기에 사회주의의 쌍둥이였던 무정부주의는 쌍둥이 형제와는 달리 튼튼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무정부주의는 근본적으로 망명정치와 음모 행동에 주력했다. 국경 초월은 무정부주의의 본질이었다. - P1352

50년대 중반에 여성운동은 정점을 이르렀다. 그 후 노예제 문제가 여성운동 조직 내부의 의견을 분열시켰고 19세기 50, 60년대 유럽의 각종 정치운동이 국가화하면서 유럽은 국제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
60년대 초, 국제 여성운동 조직은 희소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25년 뒤의 여성운동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운동의 조직화란 면에서 보자면 그렇다.
1888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2회 국제여성대회가 열렸고 이 회의를 통해 탄생한 국제여성평의회(ICW)는 각국의 여성연합회를 거느린 우산조직이었다. 1907년, ICW는전 세계 400-500만 여성의 대변인이라 공언했다. 그러나 이때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제외하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만 평의회 구성원이었다. ICW 조직도 갈수록 보수적으로 변해가며 충돌을 피해가고 친귀족 치노앙실 경향이 강해졌지만 몇몇 나라의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각국의 정치운동을 자극했다. - P1355

19세기의 평화운동은 ‘자연적인’ 사회적 기초와 목표 집단을 갖추지 못한 채 개인의 도덕관념에서 출발했으며,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과 비교할 때 주도하는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정도가 더 높았다. - P1357

제1차 헤이그평화회의에 이어 1907년에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가 열렸다. 두 차례 회의는 국제법의 중대한 개혁을 이루어냈으나 중재제도를 수립한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들은 국제체제를 개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평화회의의 전통을 이어가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1899년, 26개 참여국 가운데서 유럽 이외의 국가는 여섯 나라(미국, 멕시코, 일본, 중국, 태국, 이란 )뿐이었다. 이것은 국제체제 가운데서 실제적인, 또는 감지되는 국가의 역량 분포를 반영했다. - P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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