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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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5월은 가정의 달이요, 부모에 대한 효를 되짚어 보는 그런 달이지만 매년 5월이 되면 어버이 날에 과거 

내가 나의 모친에게 고리오 영감의 딸보다 나은 행동을 했었던가를 돌아보고는 한다


내가 작품을 읽는 이유는 혹시라도 나의 자식이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되어 나의 노년 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보인 행동일 것이다.

굳이 핑계를 대어 본다면 모친의 병은 당시 의학의 한계로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오로지 를 가장한 립 서비스 수준으로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친은 자식들의 곁을 홀연히 떠나셨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자식들 곁을 떠나시는 모습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어느 불효자가

스스로 저질렀던 불효에 대한 반성의 탈을 쓰고 작품을 접하는 것이지 진정한 반성의 의미와 후회의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모친을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반성으로 

나는 최선을 다 했고,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 아닌 변명과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면책성 근거 

타인들의 비난이 두려워 - 를 마련하기 위해 보여 주기식 이중적인 행동을 보인 치졸한 행동이라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작품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내리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작품이 만들어진 그 시대와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는 작품이었음에도 현재를 사는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 

작품으로 우리 문학과 비교를 해 본다면 아마도 유럽판 '김 약국의 딸들'(박경리)같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년 가장들의 슬픈 이야기인 '아버지'(김정현)같은 작품이었다고 생각되었으며 또 다른 측면으로는 애절한

아버지의 정을 이야기한 '시고기'(조창현)와 같은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주인공 '장 조아솅 고리오(제면 직공)'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두 딸

(‘레스토 부인뉘싱겐 부인’)이 있다.

그는 여느 아버지들처럼 딸들의 요구가 있을 때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든 말든 그것이 무엇이건 상관 

없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다 해 주는 그런 평범한 아버지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노년에 홀로 사시는 아버지의 건강과 생활비에 대한 

걱정과 근심보다는 자기 자신과 관련된 사소한 문제 - 애정 및 금전 - 로 아버지를 끊임 없이 흔들어 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오 영감의 딸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경제적 무능력 상태에 빠져 어려워할 때는 

물론이고 외로움에 고통 받을 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남 대하듯 하다 쓸쓸히 돌아가시게 한다.

 

자식이 뭐길래,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부모, 자식간의 연을 맺어 부모는 항시 자식에 대해 '채무자'가 

되어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 대해 언제까지나 영원한 '채권자'로 군림하며 살아야 하는지..... 책을 덮으며 

살아 생전 모친께서 내게 항시 들려 주시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부모는 열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열 자식은 한 부모를 잘 모실 수 없다]

 

라는 이야기였다.

모친께서 이런 소리를 하실 때마다 '에이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하고 외쳐 보았지만 세월이 흘러 

나도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는 나이가 된 지금, 나의 어머님이 지청구 비슷하게 외치던 그 말씀이 

구구절절 옳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현재의 나의 자식들이 고리오 영감네 딸들처럼 내게 못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고 있지만 

나는 그 변화의 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존의 효 방식에 미련이 남아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며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

연일 언론에 나오는 기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노인은 스스로 벌어서 살아야지 자식에게 의존해 노년을 의탁해서는 안 된다라는 요지의 기사가

그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남들 자식은 몰라도 절대 내 자식은 안 그럴걸요?”

글쎄세상일 누가 알 수 있겠나. 어린 자식이 태어나 자라면서 나는 커서 부모에게 불효할 것을 다짐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작품 속 고리오의 딸들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이, 환경과 처한 여건이 그리고 그녀들에게 직면한 경제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작품을 통해 배은망덕의 표본처럼 그려지고 있는 고리오의 딸들만 비난할 것이 아니라 고리오 영감도

그 딸들도 동일한 선상에서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자식을 고리오 영감의 딸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또 스스로가 경제적 무능력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주인공 고리오 영감은 무엇을 준비했고, 자식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나의 자식들은 한 때 둥지 속의 새끼들처럼 입만 벌린 채 나의 손길과 눈길에 의존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런 자식들은 어느새 자신의 길을 찾고자 둥지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한 녀석은 벌써 나의 둥지를 떠났으며 또 한 녀석을 채비를 마쳤고, 나머지 한 녀석 역시 조만간 자신의 

생활을 위해,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들은 내가 그러했듯이 삶의 지친 어깨를 스스로 다독이며 또 내가 그랬듯이 자신의 새끼를 위해 힘찬 

날개짓을 하며 그렇게 부모가 되어갈 것이고, 나는 또 이 자리를 어느 순간 조용히 비우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활 양식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더라도 모두가 고리오 영감이 걸었던 길을, 삶을 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고리오 영감,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며 따랐던 자식같은 하숙생이 그의 곁을 지키는 

가운데 자식들의 외면 속에 임종을 맞는다.

나는 고리오 영감이 죽던 날의 집안 분위기와 딸들이 남에게 하듯 내뱉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읽고 또

읽었다. 정말 이들이 고리오 영감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사랑으로 키워 온 딸년들이었을까 하는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마구 일어났지만 요양원 침상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던 나의 모친 생각과 오버랩되면서 나도 

그런 자식의 한 부류였다는 점에 더 이상의 비난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부모들은 자신만은 효녀와 효자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고리오 영감의 자식들과 같은 인간 말종들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고리오 영감도 젊은 시절, 아이들의 심성을 위해 끊임없는 가정 교육을 시켰을 것이며 착하게, 인간답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던져 가르치고 또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작품을 덮으며 자식과의 사랑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고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 가정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시켜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오 영감 입장에서는 자신의 그 모든 행동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아마도 또다시

그녀들의 부모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도 부모라면 의당 동일한 길을 갈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성과 단어가 존재하는 한 이 땅에 고리오 영감은 영원히 지속적으로 

나올 것이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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