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킨트
배수아 지음 / 이가서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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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되어버렸지만, 소설에서 역사의식 따위는 없어도 된다. 아니 없는 편이 좋다. 그런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설에 헛바람을 집어넣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면서, 기껏해야 소설에 불과하면서, 마치 자기가 역사책이나 철학책이나 심지어는 경전이라도 되는 듯이 뻐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없는 편이 좋다. 사회문제에 대한 고발의식 따위도 없는 편이 좋다. 고발이아나라 소설은 신문기사나 르포가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소설 따위에 왜 그리 많은 것을 요구하는가?

소설은 소설이다. 소설은 그저 이야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배수아의 소설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한다. 소설은 소통이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설이 될 수 없다. 소설이 역사책/철학책/경전이 아니고, 신문기사/르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기장이나 낙서장도 역시 아니다. 소설은 작가 자신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이어야 한다. 설령 그 속에 역사의식이나 사회비판의식 따위가 없더라도 말이다. 적어도, 혼자만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배수아의 소설이 가진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의 소설은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글쓰기가 근본적으로 개인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아니, 개인적인 정도가 아니라 폐쇄적이기까지 하다.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립이란 정말 멋진 것이다. 그것은 거의 쾌락의 차원이다. 그것을 찬미한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진정 고립을 모르거나 혹은 나약하게 겁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고립에 대한 찬미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고발이라거나 소통에 대한 그리움인 것으로, 정 반대로 왜곡되곤 한다. (글이 서툴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방법에 있어서 나에게는 대개의 경우 선호하는 몇 가지의 사소한 방법이 있는데, 동일시하거나 비판하거나 개입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가능한 한 이런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고립이란 그것과 비슷하다. 고립이란 반드시 혼자 지낸다거나 배타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고립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동물원에 간다']

인용된 부분처럼, 작가는 스스로 고립되어 있으며 그 고립을 즐기고 있다고 말한다.

고립이란 나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대부분의 것이 용납이 되는 요즘 세상에서 혼자 동떨어져 살겠다는 태도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더구나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고립, 혹은 폐쇄적인 삶이란 때로는 제법 매력적이기까지 한데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립을 글로 쓰게 되면, 그러면서 고립의 이유를 밝혀주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왜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야기, 더구나 독자를 위한 이야기이니까. 혼자 고립되고 혼자 속삭일 것이라면 구태여 소설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설이니까, 소설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이야기이며, 소설이란 기본적으로 소통이니까. 차라리 일기를 써라, 그도 싫으면 글쓰기 따위 하지 말고 포르노나 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던가.

요즘 들어 마치 고립을 자랑하는 듯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립이라는 것은 용인 받을 수는 있어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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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형 인간 -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사이쇼 히로시 지음, 최현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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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음이 지쳤을 때, 그와 함께 몸이 지쳤을 때,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좋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자기최면을 거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야 말로 타당하기 짝이 없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진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책을 읽는다.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내용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만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잠시 잠깐 잊고 있었던, 새삼스러운 진리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아침형 인간>역시 새삼스러운 진리를 다룬 책이다. 늦잠 자지 말고 일찍 일어나라!”이야말로 동서고금의 변함없는 진리이자, 부모님들의 단골 잔소리가 아니었던가? 이 책의 내용은 그런 잔소리에서 단 한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작자는 책의 처음부터 다소 과격한 사례를 들면서 잔소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것이 “옆집 아이들은 말이다……”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잔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문제는 이런 잔소리가 대중에게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맞다. 사실이다. 이제 좋았던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우리 세대는 이전 세대가 경험한 것 이상의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하필이면 이런 시대에 일상을 가꾸면서 살아가야하는, 우리 세대의 운명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단지 이 시대에 부합하는 내용을 다룬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 그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 책을 사고-읽고-동감하는 우리들은, 이 땅에서 직업을 가지고 혹은 가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잔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위험하고 고단한 시대가 아닌, 먼 옛날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에 부모님에게 들었던 그 잔소리를 다시 한번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의 제목은 <아침형 인간>이라고 되어 있지만, 11시 취침 5시 기상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새벽형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시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아마도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중시하고, 우리보다 덜 과격한 술자리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식 생활에 적합한 주장일 것이다. 우리야 밤 11시에 집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힘든 나라가 아니던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아침형 인간>이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적인 특성상 밤에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 그런 경우라면 규칙적인 하루를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는 최선일 것이다”(p.29.)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이 어떻게 동일한 패턴으로 살 수 있겠는가?

결국 이런 주장은 다소 힘들었던 삶의 국면에서 잠시 쉬어가는 오아시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아시스가 아무리 많아도 길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닐 터, 결국 걸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이미 아침형 인간과는 다른 저녁형 인간에 관련된 책도 나오고 있으니,<퇴근 후 3시간>(니시무라 아키라 지음, 해바라기)라는 책도 같이 읽어본 뒤에, 자신이 아침형 인간인지 저녁형 인간인지를 파악해보는 것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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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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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이 작품이 판타지소설의 효시가 되는지, 읽고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웅장한 전투 장면묘사, 각 종족의 언어까지 만들어낼 정도의 치밀한 설정,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종족들의 관계 등등, 실로 이 작품의 가치는 ‘처음’이라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이를테면 작가의 상상력이나 세계관이라고 할 만한 부분에 있었다.

하지만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주인공들에게 부여된 임무의 고차원성이다. 그들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탁월함이다. 절대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파괴하려는 의지와 그 힘을 이용하여 눈앞의 난관을 회피하려는 욕망의 대립, 이것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갈등요소이며, 이 작품을 단순한 英雄騎士談에 그치지 않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파악하자면, 절대반지를 파괴하려는 행위는 고결함에 대한 욕망이고, 그것을 활용하여 난세를 평정하려는 행위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권력에 대한 욕망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자칫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세상과 가치관을 무시하기 쉬운, 매우 위험한 욕망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작품은 이타성(利他)과 이기성(利己)의 대립을 근간에 깔고 있다. 거기에 이기적인 욕망에 대한 경고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작품의 주인공이 현명한 마법사인 간달프나 용맹한 요정인 레골라스가 아니라, 현명하지도 못하고 전투능력도 뛰어나지 못한 호빗족의 네 인물 ― 샘, 메리, 프로도, 피핀이라는 점도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은 지극히 약한 자들로 쉽게 이기성, 고난을 회피하려는 욕망에 빠져버릴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이타성을 잃지 않고서 눈앞의 고난과 대적한다. 이들의 행동이야 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직접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잠깐, 나는 샘, 메리, 프로도, 피핀이라고 했다. 맞다. 이것이야 말로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순서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프로도가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이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비록 반지를 차지하려는 유혹에 흔들리고,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 보다 강한 인물로 단련되지만, 그는 별로 성장하지 않았다. 그의 심성은 태초부터 고결했고, 마지막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다. 그와 함께 했던 다른 친구들의 성장과 비교해본다면, 오히려 그는 종국에 허무적인 방랑벽에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프로도야 말로 네 명의 친구들 중에서 가장 자라지 못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샘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이다. 그는 아주 비천하고 능글맞은 하인에서, 주인을 보호하는 조력자로, 나아가 주인의 임무를 대신하는 대리자로, 끝내는 자신의 고향을 되살려내는 당당한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 그는 절대반지의 유혹을 받고, 각종 고난에 직면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이겨낸다(단순히 이겨냈다면 대단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주인까지 함께 이겨내도록 이끈다).
샘이라는 인물이야 말로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메리의 성장 역시 눈부시다. 그의 성장은 다소 단순한 단계를 밟고 있기 때문에 샘보다 앞서지 못했으나, 그 성장의 진실성으로 파악하자면, 다른 어떤 인물을 능가한다.
그는 겁쟁이이면서 무능력한 인물이다. 그런데 탁월한 점은 자신이 그런 인물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려하고,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끝내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고난에 당당하게 맞선다. 비록 그에게 있어서 전투다운 전투는 단 한번에 불과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칼을 들어 힘껏 내리찍은 것은 적장(敵將)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이었기 때문이다.

성장, 이처럼 성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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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전2권 세트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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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저 고백하자. 나는 연애에 대해서는 젬병이고, 연애소설에 대해서는 더더욱 젬병이다.
솔직히 나는 '연애'를 전면에 내세우는 소설, 그리고 그런 소설이 주는 낯간지러운 느낌을 잘 견디지 못한다. 남자 작가와 여자 작가가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시점에서 썼다는, 매혹적인 기획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을 이제야 읽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러한 기획이야 말로 참신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독창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시도이기에 더욱 공감이 가는 것이 아닌가? 또한 이런 시도를 통해서 독자들이 문학에 조금 더 편안하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작품의 내용이었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인물 때문이다. 물론 사물이란, 그중에서도 인물이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상이한 평가가 가능한 것이지만, 소설 속의 인물성격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심각한 심리적 변화를 거치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적인 상처에 의해서 굴절되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변화는 일관된 흐름을 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래의 인용을 보자.

쥰세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웃는다. 떠든다. 걷는다. 생각한다. 먹는다. 그린다. 찾는다. 쳐다본다. 달린다. 노래한다. 그린다. 배운다. / 쥰세이는 동사의 보고였다. 만진다. 사랑한다. 가르친다. 외출한다. 본다. 사랑한다. 느낀다. 슬퍼한다. 사랑한다. 화를 낸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더욱 사랑한다. 운다. 상처 입는다. 상처 입힌다. - 에쿠니 가오리,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pp.108-109.

위의 인용에서 여자주인공 아오이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남자를 활동적인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남자의 시각으로 되어 있는 [Blu]편에 등장하는 쥰세이는 그리 활동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복원사이고 과거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를 회복시키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아오이의 회상처럼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감각은 과거를 향해서만 열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인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경, 혹은 일본에 대한 혐오감/두려움은 아오이보다 쥰세이의 감정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과거를 지향하는 인물인 그가, 미래를 향해서 쉼없이 내달리기만 하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타당하다.)

이러한 인물 성격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무엇보다 두 작가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일런지도 모른다. 두 작가는 각각 아오이와 쥰세이라는 인물의 입장을 고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사랑했던 또 다른 쥰세이와 아오이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출판기획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두 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이렇게 나누어 출판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권으로 붙어있어야 했을 책이다. 아오이의 이야기와 쥰세이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것이 아니라, 아오이와 쥰세이의 이야기가 되었어야 했을,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만일 지금의 형태처럼, 두 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려면, 이 두 사람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설령 만났다고 해도 스쳐지나갔어야 했다. 스쳐지나갔더라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어야 했다. 그들의 시각은 과거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움직였어야 했다.

이번 독서를 통해서 다시 한번 여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생활이 없는 사랑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히, 생활이라는 것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만큼 우리의 인생을 압도하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사랑에만 빠져있는 이들의 애정행각은 차라리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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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지음 / 동방미디어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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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아니 모든 이야기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매력적인 인물들의 매력적인 삶을 엿보기 위해서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듣는다.

특히 그 이야기가 추리소설일 경우에는 캐릭터 창조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추리소설이야 말로 매력적인 인물들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 경우의 매력은 악당으로의 매력일 수도 있고,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매력일 수도 있다).

마치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런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추리소설 속의 인물들도 같은 변화를 거쳐 왔다. 즉,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은, 슈퍼맨적인 영웅호걸의 모습에서, 음울하고 냉정하고 이기적인 탐정으로, 샐러리맨과 별다를 것 없는 형사로, 그리고 탐정도 형사도 아닌 평범한 인물로 변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몇몇 사람들의 영웅적인 활약에 의해 좌우되었던 시스템에서, 철저히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사회구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즉, 현실 속의 수사현장이 과학화되고 분업화되고 전문화되는 것에 맞추어, 추리소설의 주인공들도 변화되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소설이라는 것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추리소설은 그 중에서도 범죄와 미스테리를 전문적으로 비추는 거울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추리소설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추적자 역할을 하는 주인공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상대자 역할을 하는 범죄자도 역시 매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괴도신사 루팡를 기억하고, 엽기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를 기억하며, 급진적인 테러리스트 인민군 장교 박무영을 기억한다. 그들은 분명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심지어는 매력을 느끼기까지 한다.

정의를 지키려는 자에 대한 동경과 파괴하려는 자에 대한 동경. 그것은 분명히 상반되어 있지만, 동일한 감정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다. 추리소설이야 말로 우리 안의 천사와 악마가 사투를 벌이는 아마겟돈의 현장이다.

이처럼 좋은 추리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선과 악, 두 편의 인물들이 모두 매력적이어야 한다. (물론 아서 코난 도일의 허락을 받았던 것은 아니고, 모리스 르브랑의 의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루팡과 홈즈의 대결이 추리소설 독자들에게 인기를 모으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선과 악의 두 편이 모두 매력적으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추적자에 해당하는 가쿠치의 매력은 충분하지만, 그의 반대편에 해당하는 구와노는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진다. 즉, 인물들 사이의 균형감각이 유지되지 못했던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바텐더인 가쿠치,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폭탄테러에 연루되어 도피생활을 하는 인물이고, 테러의 목격자이면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탐정 역할을 한다. 그의 과거와 현재는 천천히 드러나며, 그렇게 때문에 충분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었고,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와노의 경우는, 과격파 학생운동가면서 테러리스트이고 대기업의 전무이기까지 한,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체가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노출되고, 자신의 독백을 통해서만 일방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공감도 얻지 못하고, 매력도 얻을 수 없었다.

역시 중요한 것은 구상뿐만이 아니다. 그러한 구상을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상상하는 것은, 떠올리는 것은, 말로 토해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 사람이 바로 작가이고, 그 표현능력이야 말로 작가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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