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들이 친밀감의 기호나 증표로 작용한다는 사실

 

토론토의 지하철에서 어느 여인이 내 건너편에 앉아 팽귄판으로 나온 보르헤스의 『미로』를 읽고 있다. 불현듯 나는 그녀를 불러 손을 흔들고 나 역시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어진다. 이미 얼굴도 잊어버렸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아슴프레하고 늙었는지 젊었는지조차 말할 수 없지만, 그녀는 바로 그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가 일상에서 접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인 내 사촌도 책들이 친밀감의 기호나 증표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사촌은 여행을 떠날 때 가져갈 책을 고를 때도 핸드백을 고를 때만큼이나 세심하게 신경을 쏟는다. 그 여사촌이 로맹 롤랑의 소설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 적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의 판단으로 볼 때 롤랑의 책이 지나치게 과시적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 역시 가져가지 않는데 그 책 또한 지나치게 통속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단거리 여행에는 카뮈의 작품이 어울리고, 긴 여행에서는 크로닌이 적당하다. 시골에서 주말을 보내는 데는 베라 캐스패리나 엘러리 퀸의 탐정 소설이 그럴듯하고, 배나 비행기로 여행할 때는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이 어울린다.(309∼310쪽)

 

누군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군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마음 속으로 그 독서가의 신분의 색깔이 그 책과 독서가 이뤄지고 있는 분위기에 크게 좌우되는 듯한 야릇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호머에 나오는 영웅들과 여러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알렉산더 대제가 늘상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지니고 다녔다는 것은 그럴듯해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에서 폴로니어스가 "각하, 무엇을 읽고 계십니까?" 라고 묻자 햄릿이 "말, 말, 말" 이라는 대답으로 일축했을 때, 그의 손에 쥐어진 책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너무도 궁금하다. 손에 잡힐 듯도 한 그 책의 제목이야말로 울적한 왕자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머리가 돌 정도로 어지러운 돈키호테의 서재를 불사르기 위해 쌓아 올린 장작더미에서 요왕 마르토렐의 소설을 구해 낸 그 사제는 미래 세대를 위해 출중한 기사도 소설을 구조해 낸 것이었다. 돈키호테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정확히 앎으로써 우리는 비탄에 빠진 기사를 그렇게 사로잡았던 세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독서를 통해 우리 또한 한순간이나마 돈키호테가 될 수 있지 않을까.(321∼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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