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이 친밀감의 기호나 증표로 작용한다는 사실
토론토의 지하철에서 어느 여인이 내 건너편에 앉아 팽귄판으로 나온 보르헤스의 『미로』를 읽고 있다. 불현듯 나는 그녀를 불러 손을 흔들고 나 역시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어진다. 이미 얼굴도 잊어버렸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아슴프레하고 늙었는지 젊었는지조차 말할 수 없지만, 그녀는 바로 그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가 일상에서 접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인 내 사촌도 책들이 친밀감의 기호나 증표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사촌은 여행을 떠날 때 가져갈 책을 고를 때도 핸드백을 고를 때만큼이나 세심하게 신경을 쏟는다. 그 여사촌이 로맹 롤랑의 소설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 적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녀의 판단으로 볼 때 롤랑의 책이 지나치게 과시적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 역시 가져가지 않는데 그 책 또한 지나치게 통속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단거리 여행에는 카뮈의 작품이 어울리고, 긴 여행에서는 크로닌이 적당하다. 시골에서 주말을 보내는 데는 베라 캐스패리나 엘러리 퀸의 탐정 소설이 그럴듯하고, 배나 비행기로 여행할 때는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이 어울린다.(309∼3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