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잊혀진 책 속에서 한때 그 책의 독자였던 나의 흔적을 발견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책으로 흘러 넘치는 서가를, 다소 익숙한 이름이 꽂혀 있는 그런 서가를 보기를 즐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의 목록이랄 수 있는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에게 넌지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또 거의 잊혀진 책 속에서 한때 그 책의 독자였던 나의 흔적을-갈겨쓴 글자나 끼워 놓은 버스표, 이상한 이름과 숫자가 적힌 종이 쪽지, 책의 앞뒤 여백에 적힌 날짜나 어떤 장소, 이런 것들은 아주 오랜 옛날 어느 여름날의 머나먼 호텔방이나 어느 카페로 나를 데려다 주는데-발견하기를 좋아한다. 책을 꼭 포기해야 했다면 그렇게 했을 테고 또다시 어느 책을 시작으로 책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몇 차례 필요에 의해 책을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때는 견디기 힘든 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책을 포기할 때는 무엇인가가 죽어 가고 있다는 기분을 피할 수 없었고, 나의 기억은 슬픈 향수처럼 끊임없이 그 책으로 되돌아가곤 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세월이 흘러 기억력도 쇠잔해지고 과거를 떠올리는 힘도 점점 약해지는 마당에 그 책들은 이제 약탈당한 도서관처럼 느껴진다. 많은 열람실은 굳게 닫혀 버렸고, 아직 들락거릴 수 있도록 개방된 열람실의 서가에는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려 있다. 나는 남아 있는 책 중에서 한 권을 끄집어내고는 책장 몇 장이 파괴자에 의해 찢겨 나간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희미해질수록 내가 읽었던 책들의 창고를, 텍스트와 목소리와 향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이 수집품들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 더욱 간절해진다. 이제 이 책들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나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 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과거에 대한 질투 때문이 아닌가 싶다.(342∼343쪽)
(나의 생각)
오래된 책, 더 이상은 '함께 하기에 지친' 책들과 마침내 결별하는 순간은 늘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오래된 책들과 결별할 때라도 그냥 단칼에 헤어질 수는 없다. 혹시라도 그 책 속에서 '뭔가' 나와의 인연을 끊기 어려운 '지푸라기 하나'라도 발견하게 될지, 혹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소중한 옛 추억'으로 이끌 끄나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별의 순간'에 오랜 과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그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의 황홀함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