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주 > 팔자에도 없는 일에 바쁜 사람과 실비꽃
1.
요즘 누가 나더러 왜 바쁘냐고 물으면 나는 팔자에도 없는 일이 갑자기 생겨서 그렇다고 얼버무리며 좀 황당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계면쩍게 눙쳐 웃는 웃음을 흘린다. 설사, 전화통 건너편에 있는상대방이 내 몸짓을 보지 못 할게 뻔할지라도 이상하게 그 말만 내 입에서 나오면 나도 모르게 그런 제스츄어가 저절로 따라나온다. 그렇다. 팔자에도 없는 일이라 나 스스로도 아직 적응이 안 되었다.
2.
...그리고 느닷없이 휴대폰이 외마디를 질렀다. 누가 이렇게 이른 시각(아침 6시가 좀 넘은 시각)에? '...처음으로 문자보내는 것 같네요 잘 지내셨나요?' 나는 그때 메타쉐콰이어의 황홀경에서 벗어나는 오솔길 모퉁이를 상쾌하게 내리질러 달리고 있던 참이었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가빠지는 맥박이 뜀박질 때문인지 문자 때문인지 분간이 안 갔고 심장이 마구 뛰는 것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아침에 빨리 걷는다든지 달리다든지 할 동안 한 번도 콧마루가 시큰거리며 눈물샘이 아무 예고없이 갑자기 열리려는 바람에 눈시울이 달달거리며 떨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잊고 지내던 곳에서, 그녀는 안 믿겠지만 나는 그녀를 자주 떠올렸다. 꽃을 볼 때마다, 과다한 햇빛에 뽀얗게 나온 사진이라던 사진 속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진이 실수한게 아니고 햇살처럼 화사한 그 모습이 진짜 그녀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 내 눈 앞에 보랏빛 꽃 무더기가 펼쳐져 있었다. 그날 아침에 처음 봉우리를 터뜨린 이슬같이 맑은 얼굴로 보랏빛 꽃은 내게 말을 걸었다. 내 가슴에 플래쉬 불빛이 소리없이-요란하게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꽃 이름을 새롭게 지어주었다. 그동안 이 꽃을 뭐라고 불렀건, 또 남들이 뭐라고 부르건 간에 나는 이제 이 꽃을 실비꽃이라고 부를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실비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