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자본주의 시스템속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가치라는 말은 이미 퇴색되어 버린지 오래되었다. 자본,물질,금권만이 모든 것을 제단하는 사회속에서 삶의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시대 역행적인 발상이면서 패배주의자적인 자기 연민의 합리화 대상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화라는 파고를 자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에겐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의 회상 그 자체만으로도 누워서 침뱉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강요되고 수용되어야 했던 서구문명의 근대화는 이제 당연한 절차상의 방법론이었고 서구가 설계해왔던 산업자본화에 익숙해지면서 그 어떠한 담론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구조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겐 전통의 가치가 가져다 주는 무게감은 클 수 밖에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중심으로 각 개인들 생활패턴까지 깊숙히 침투한 근대적 가치판단의 근거들에 대한 재판단이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유교와 선비(사대부)에 대한 담론들이 봇물터지듯이 제기되고 있고 현대적 가치관과 전통적 가치관의 접목이라는 흐름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를 되돌아 보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비(사대부)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우리가 선비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조와 의리로 자신의 주장을 그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관철해나가면서 청빈과 안빈낙도 같은 삶으로 타의 모범이 되는 정신적인 주체로서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상례이자 거의 머리속에 도식화로 각인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비라는 그 단어자체가 발산하고 있는 아우라 그 자체만으로 별다른 부차적인 설명의 필요성 자체를 제기할 필요 없는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처럼 고고한 절개와 한일합방이라는 국치를 당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진 매천 황현같은 이들이 선비의 대명사로 우리의 뇌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와 선비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을 다룬 출간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선비는 지고지순의 선과같은 존재, 현대처럼 각박한 시대에 정신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발칙한 서술들과 더불어 기존의 상식을 무참하게 짓누르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물론 어느 정도 인지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들어내기보다는 될수록 좋은면만 보고자 했던 우리에겐 상당히 당황스럽기도 하다). 세계화라는 무정체성 시대에서 그나마 전통적인 가치관을 회복하고자 열열히 노력하는 이들에게 그야말로 찬물을 끼엿는 불편한 담론들을 담아내고 있기에 도끼눈을 뜨고 바라볼 수 밖에는 없는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 식미지를 경험하면서 소극적인 식민사관에 점철된 우리 역사사관을 그나마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사관으로 전환코져 선비와 유교 조선을 재조명하는 이들과 그들의 바램에 동승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겐 전통 가치관의 확신성에 대한 믿음마저 뒤 흔들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의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선비의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조와 의리, 청빈과 안빈낙도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선비의 또 다른 실재적인 모습을 고찰하면서 그들이 펼쳐나간 수신제가치국이라는 대의명분의 허와 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유교와 조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라도 그나마 선비라는 이들에 대해선 서두에서 말한 세한도나 시문등을 통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정형화된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선비의 이미지는 근대화에 비록 늦게 발을 담갔어도 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누구보다 남다르다는 보상심리와 자긍심이 마련한 일종의 현실왜곡장으로 역활을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 조선을 지배하고 이끌어왔던 선비들의 실재적인 모습은 그들이 신앙처럼 받들었던 성리학(주자학을 포함한 원시 유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자신들만의 이율배반적인 논리였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비라는 공동체 전체의 모습을 개인적인 삶과 공식적인(정치적) 행위 양단을 고찰함으로서 그동안 선비의 한쪽 면만 보아왔던 독자들의 편엽된 시선을 바로잡아 준다. 또한 지금 사회,경제,문화,정치적으로 일고 있는 유교의 접목화와 선비정신의 고양등이 적확한 사실판단을 근거로 진행되어야 하며 자짓 커다란 오류에 봉착할 수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선비라고 제대로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들도 많지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선비들은 선비정신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 역시 사실이고 이런 선비들이 이끌어 나간 사회가 조선이다. 그리고 그 조선은 결국 이민족에게 짓?히는 미증유의 역사를 연출했고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 역시 있는 것이다. 단지 선비들이 주창했던 도덕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시대 선비들을 동급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역시 제고해 봐야할 일이다. 물론 조선은 현대와는 사뭇 다른 시대였다. 그리고 지금의 시각으로 그들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선비들이 주창했던 담론과 그 담론들의 실천성를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벋겨지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 수양 측면과 공적인(정치사회부분) 참여부분등을 망라해서 선비의 거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고 항목별로 조목조목 비교해보는 논거들을 볼 수 있어 그동안 선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하거나 다소 왜곡된 이미지를 걷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인 논거들이 우리 전통가치관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나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흠집내기가 아니라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보다 나은 전통가치관의 확립에 기여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상을 위한 비판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고 볼때 선비들에 대한 적확한 이해만이 우리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방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선비 일개 개인의 삶이나 담론이 아니 선비라는 특수계층의 전체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는 점과 현대에 일고 있는 유교와 선비정신의 적용여부에 대한 핵심적인 사안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다만 아쉬운점은 정조의 죽음과 이이의 십만양병설등의 저자의 태도가 극히 정형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점이 본 저서 내용과는 다른 문제점이기는 하나 역사전반을 다루는 학자 입장에서 한번쯤은 집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가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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