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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직장인이 가장 부러워하는 학생의 특권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역시나 방학이 떠오른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두 달 가까이 통째로 쉬면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하고, 하릴없이 방 안에 뒹굴뒹굴 누워 지낼 수 있는 방학은 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가 아닐까. 그런데 경험상 방학이라고 늘 기분 좋은 순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초등학교 몇 학년 여름방학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이 나를 시골 외가댁에 한 달가량 머물게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엄마가 모처럼 손이 많이 가는 날 돌보는 일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런 계략(?)을 꾸민 게 아닌가 싶은데, 외삼촌들은 전부 대학생이라 말도 안 통하고 또 엄마가 장녀인 탓에 당시에는 이모네 아들딸들은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같이 놀 또래 하나 없는 시골에서 한 달을 버티려니 숫제 죽을 맛이었다. 당시 시골집 평상에 누워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며 눈물 짓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운 좋게도 <흑백합>의 주인공 스스무는 나 같은 고문을 당할 필요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1952년 현재, 스스무는 도쿄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열네 살 소년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버지의 옛 동료에게 초대를 받아 그 아저씨의 오사카의 롯코 산 별장에서 한 달간 머물게 된다. 아저씨에게는 스스무와 동갑내기인 카즈히코라는 아들이 있어, 둘은 금세 친해진다. 두 친구는 롯코 산 이곳저곳을 탐험하며 매일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날 표주박 연못이라는 곳을 갔다가 거기서 자신을 '연못의 요정'이라고 주장하는 아름다운 한 소녀를 만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는 스스무, 카즈히코와는 달리 카오루라는 소녀는 오사카에서도 유명한 부잣집의 고명딸. 그 나이에 신분이나 재산의 격차 따위가 무슨 의미람. 세 동갑내기 소년소녀는 매일같이 롯코 산을 누비며 점점 가까워지는데, 안타깝게도 스스무와 카즈히코가 하필 둘다 카오루에게 반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다. 둘 중의 한 명은 쓰디쓴 눈물을 흘려야 하잖아.
가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생생한 묘사 덕분에 수려한 풍광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한 롯코 산을 배경으로 소년소녀의 풋사랑이 펼쳐진다. 고전적인 애정의 삼각 관계라 뻔하다고 생각할 독자들이 있겠지만,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이 딱 그 나이 대 소년의 행동과 사고를 보여 사랑에 미숙했던 어린 날의 추억도 떠오르는가 하면, 흡사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보는 듯한 애틋함과 아련함이 있다.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오해하다가 잠 못 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되기 일쑤인 법. 예컨대 두 소년은 카오루의 집에 초대되어 그녀의 방에서 놀게 된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 카오루는 스스무에게는 자신이 평소에 쓰는 의자를 주고, 카즈히코에게는 고모의 화려한 벨벳 의자를 가져다준다. 스스무는 훨씬 좋은 고모의 의자를 카즈히코에게 준 것을 그녀가 카즈히코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열등감에 빠지지만, 카즈히코는 평소에 카오루가 쓰는 의자를 스스무에게 준 것을 두고 그녀가 스스무를 더 스스럼없이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좌절한다. 분명 카오루는 별 생각없이 의자를 나눠준 것일 테지만, 사랑을 경쟁하는 두 소년은 어디 그런가. 끊임없이 우리 중 누굴 더 좋아할까, 하고 고뇌하는 두 소년이 참을 수 없이 귀엽게 느껴진다.
이렇게 삼각 관계로만 진행되다 끝나면 어찌 이 작품이 200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7위에 올랐겠는가. 풋풋한 십대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와 맞물려 하나의 살인 사건도 있다. 살해당한 이는 카오루의 둘째 삼촌. <흑백합>은 1952년 현재의 아이들 장과 나치스가 지배하던 1935년 베를린, 전쟁이 한창인 1942-45년의 장이 병행된다. 과거의 장에서 현재 아이들이 만나는 어른들의 옛 이야기가 설명되는데, 독자들은 이 옛 이야기들을 통해 지금은 단지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들로만 보이는 그들에게도 잔혹한 사랑의 엇갈림이 있었다는 걸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이 주로 내세우는 소년소녀들의 순박한 풋사랑이 유독 명징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들과 대비되는 어른들의 은원 관계가 그만큼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백합은 원래 하얀 꽃인데, 검을 흑(黑)자를 앞에 붙인 게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스포일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소녀들은 누구 하나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저 어느 여름방학의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일 뿐.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어른들의 어두운 비밀을 알아차리기에 그들은 너무도 순수하고 맑은 존재였던 것이다. 단순히 미스터리로만 보자면 요즘은 잘 안 쓰는 평범한 서술 트릭을 사용한 것이나,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점 요소가 있지만 용의자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뭐 했나를 차분차분 따지는 그런 본격 미스터리는 아니기에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곳곳에 복선이 있어 다 읽고 바로 한 번 더 읽으면 좋을 썩 괜찮은 미스터리 소설이다.
작가 타지마 토시유키는 1948년생으로 실제 주인공들과 열 살 차이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 스스무들과 비슷하게 1950년에 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 막 전쟁의 참상을 벗어나 점차 발전 일로의 길로 나아가는 당시 오사카의 모습을 정확하게 스케치해낸다. 작가는 미스터리부터 모험소설까지 다양한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원래 10년 전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고 하는데, 점차 남은 눈의 시력도 사라져가자 실의에 찬 나머지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모양인지 맨션, 가재도구도 전부 처분하고, 전기, 인터넷 등도 모두 해약한 채 사라졌다고 하는데, 벌써 4개월째 소식이 없어 좋은 소식을 기다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두 눈이 멀쩡한 우리가 시력을 상실한 작가를 두고 무책임한 자살이라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안 될 말이고,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마지막 작품으로 <흑백합>같이 여름날의 추억이 한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작품을 남긴 것에 작가 생활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주는 감흥에 흠뻑 빠져 책장을 다 덮은 새벽 3시부터 잠이 오지 않았으며, 죽기 전에 나도 이런 걸 꼭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담배만 뻑뻑 물었을 정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