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둠의 불 ㅣ 블랙 캣(Black Cat) 22
C. J. 샌섬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부터 추리소설의 폭넓은 출간 열기로 인해 수많은 추리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영미, 일본, 프랑스나 독일처럼 나라도 다양하고, 퍼즐, 스파이, 하드보일드, 스릴러 등 장르도 천차만별이죠. 이중에서 역사 추리소설은 멀게는 <장미의 이름>부터 최근의 <다빈치 코드>(팩션이지만 팩션도 넓게 보면 역사 추리소설의 범주에 들어가겠죠?)까지 간간이 슈퍼 베스트셀러가 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소설을 보면서 단순한 재미를 넘어 뭔가 얻어가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군요. 심심풀이로 소설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몇 가지 지식을 얻는 걸로, 그냥 하릴없이 소설 보면서 시간 때운 게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소설에서 재미만 얻어도 충분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 독자들은 지나치게 깐깐한 거 같네요^^
그런데 역사 추리소설을 통해 실제로 얼마나 많은 걸 얻을 수 있나를 생각해보면 약간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아시다시피 역사라는 건 어느 특정한 시대의 의복이나 음식 같은 미시적인 부분이든, 정치, 경제 같은 복잡한 것들이든 제대로 다루자면 책 한 권 분량은 훨씬 넘게 필요할 테니까요. 그러니 기둥 줄거리가 따로 있는 소설에서 제아무리 깊이 있게 역사를 그리려고 발버둥쳐봐야 결국은 단순한 배경 노릇밖에 못하게 되지요. 일종의 주마간산이라고 할까요. 물론 '역사 추리소설'에서의 '역사'가 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읽어봐야 소용없다, 앞으로 읽지 마라, 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주장은 그래도 안 읽는 것보단 읽는 게 낫다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제가 <수도원의 죽음>이나 <어둠의 불>을 읽지 않았더라면 중세 영국에서 있었던 수도원 해산이나 비서장관 토머스 크롬웰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을 텐데, 이 책들을 읽음으로써 그래도 단편적으로나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 약간의 수확은 되는 셈이지요. 결론적으로 잘쓴 역사 추리소설은 재미와 더불어 미약하나마 소득도 얻을 수 있으니 평이 좋은 놈으로다가 골라서 많이들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C. J. 샌섬의 '매튜 샤들레이크 시리즈'는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헨리 8세 치하를 배경으로 합니다. 헨리 8세는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을 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고 싶어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죠. 헨리 8세는 왕이 되서 이혼도 못하고 살 바에는 차라리 교황으로부터 독립하고 내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겠다, 고 결심하고 영국국교회를 성립합니다. 이 선언이 바로 유명한 '수장령'입니다. 그동안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는 영국 내 가톨릭 성직자들의 탐욕과 전횡에 불만이 많던 개혁 세력은 이러한 왕의 독립 결심을 이용하여 위세가 당당한 가톨릭 성직자들의 직위를 해제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일에 나서게 되죠. 이것을 역사적으로는 '수도원 해산(Dissolution)'이라고 부른답니다. 수도원 해산을 주도한 개혁파의 우두머리가 비서장관 토머스 크롬웰입니다. 크롬웰은 거대한 영국의 수도원들을 하나씩 해체하고 재산을 국고로 환수시키는 일에 여념이 없는데, 그 과정 중에 스칸시 수도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자신의 심복인 곱추 변호사 매튜 샤들레이크를 파견해 사건을 해결하라고 명합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시리즈 1권 <수도원의 죽음>의 줄거리로, 토머스 크롬웰과 수도원 해산은 실제고, 매튜 샤들레이크와 스칸시 수도원의 살인사건은 가상입니다.
이 정도만 알아두면 시리즈 제2작 <어둠의 불>을 읽기에 충분합니다. 전작에서 토머스 크롬웰과 사이가 벌어진 샤들레이크는 런던에서 평범한 변호사로 살아가는데, 사촌 남동생을 살해한 죄로 체포된 엘리자베스라는 소녀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소녀가 법정에서 결코 입을 열지 않고 증언을 거부하자, 판사는 무거운 돌을 배에 얹어 척추를 부러뜨려 죽이는 압살형을 선고합니다. 과연 중세는 사람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않던 시대에 틀림이 없군요. 그때 안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토머스 크롬웰의 명령에 따라 압살형은 2주간 연기되는데, 그는 샤들레이크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소녀의 죽음을 2주간 연기해줬으니, 그 기간 동안 소녀의 무죄를 증명할 증거를 찾아보게나. 그 대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게.' 크롬웰의 부탁이란 과거 비잔틴 제국에서 이슬람의 전함을 불태웠던 '그리스의 불'이라는 화염 무기를 찾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그리스의 불 이야기를 듣고는, 2주 안에 그것을 찾아 대령하라고 크롬웰에게 명을 내린 상태입니다. 만약 그리스의 불을 찾지 못하면 크롬웰은 몰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샤들레이크는 단 2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영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크롬웰을 무너뜨리려는 정치 세력들의 방해 공작을 피해 그리스의 불을 찾아야 하는 난해한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의 죽음>은 616페이지, <어둠의 불>은 670페이지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압박에 읽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하겠습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남은 분량을 확인하기 일쑤였으니까요. 원래 샌섬은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이라는데, 학자 출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필력이 좋은 작가입니다. 어려운 표현이나 상징은 최대한 배제하고, 가급적 쉬운 묘사나 표현, 비유를 써서 크게 막히는 부분없이 술술 잘 읽힙니다. 다만 이 작가는 주인공의 행적을 거의 시간대 별로 상세하게 그리는 버릇이 있어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지죠. 누굴 만나러 갔다가 허탕치고 그냥 돌아온 얘기라면, 다른 작가는 "나는 A를 만나러 갔지만 자리에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한 줄로 끝낼 겁니다. 그러나 샌섬은 A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본 런던의 풍경이나 저잣거리의 물건 등을 세세하게 짚어주기에 필연적으로 페이지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켜 나가는 효율성의 관점에서는 빵점이라고 하겠지만, 중세 런던의 시대 분위기나 정취를 느끼고 싶은 독자에게는 매력적인 장면들일 테니, 아무래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 듯하네요.
또한 순수하게 추리소설만의 기준을 적용했을 때, 미스터리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약점도 눈에 띕니다. 두 개의 사건은 비교적 처음부터 범인이 뻔하게 드러나고, 아예 용의자들 자체도 몇 명 없어요. 사건 해결에 필요한 단서들을 모으는 과정도 우연에 의지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샤들레이크야 중세인이니 이 책의 핵심 미스터리인 그리스의 불의 정체를 당연히 모르겠지만,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뻔하고요. 칠흑같이 시꺼만 색에 자그마한 불씨라도 닿으면 큰불로 번지는 액체. 더구나 로마에서는 만들 수 없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만들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독자 누구나 아는 건데, 정작 주인공들은 몰라서 계속 헤매니 답답함만 가중될 따름입니다(샤들레이크는 중세 유럽인이기에 지식의 한계가 있지만 독자들은 아니니까요).
솔직히 길기만 하고 지루한데다 추리소설적인 재미까지 별로니 별 세 개, 평작 정도로 평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막상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는 평가가 확 달라지더군요. 실제 일어났던 역사의 빈 공간 속에 흥미로운 가상의 이야기를 위화감없이 맛깔나게 버무린 필력이 일단 감탄스럽고요. 한때 개혁 세력의 일원이었던 주인공 샤들레이크가 자신들의 개혁이라는 것도 사실은 끝없는 정치투쟁의 악순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 또 자신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고통받는 서민 한 명 한 명을 성심성의껏 돕는 역할을 하면서 이 사악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로잡겠다는 결심을 하는 결말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역사 '추리소설'보다는 비교적 상류층이라도 곱추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마음 한구석에 열등감을 안고 사는 샤들레이크 변호사의 영혼의 성장기로 읽으면 더 흥미로울 소설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횡행하는 암울한 시대에 주인공 샤들레이크의 정직함과 인간미가 빛난다'라고 평한 추리소설 거장 콜린 덱스터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함께 개혁의 꿈을 꾸고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청춘을 바쳤지만 여러 한계로 결국 몰락해버린 옛 동지를 향해 피를 토하듯 하는 샤들레이크의 절규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느낌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