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털어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이원열 옮김 / 시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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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뉴욕을 털어라>는 미국 추리소설계가 자랑하는 거장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도트문더 시리즈' 제1작입니다. 그는 지난 2008년 12월 31일 75세의 연세에 멕시코에서 휴가 중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2009년에 처음 떠오르는 해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1960년부터 작가 생활을 시작해 무려 95편의 작품을 남긴 웨스트레이크는 손 꼽히는 다작가였죠. 한 작품, 한 작품에 몇 년간 공을 들인다기 보다 타고난 아이디어의 샘과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슥슥 가볍게 써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비할 데 없이 많은 작품량과 후배 작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거성의 위치에 오른 행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4권이나 되는 이야기가 이어진 범죄소설의 고전 '파커 시리즈'가 그의 대표작으로 1999년에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페이백>은 파커 시리즈의 첫 작품(1962년 출간)을 스크린으로 옮긴 거예요. 국내에도 <인간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는데, 걸인의 돈까지 양심의 가책없이 슈킹(?)치는 진짜 악당 파커가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애인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내용이랍니다. 갱스터가 등장하는 미국 소설을 보면 실제 범죄자에 불과한 그들이 어느 정도 미화되고, 그들의 범죄 행위도 이런저런 이유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지만, 파커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과 복수만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 늑대니 출간 당시에 꽤 화제가 되었을 것 같네요.            


파커 시리즈로 새로운 유형의 장르와 캐릭터를 만든 웨스트레이크가 새로이 도전한 시리즈가 바로 도트문더 시리즈입니다. 1970년 이 작품 <뉴욕을 털어라>에 첫 등장한 전문 도둑 도트문더가 매 작품마다 불가능한 도둑질에 도전하며 대소동을 벌이는 이 시리즈도 전부 14권이나 되니, 파커와 더불어 작가가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에는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2004년부터는 파커와 도트문더를 매년 한 권씩 번갈아 가면서 썼는데, 2009년에 출간된 유작이 도트문더니 작가와 함께 50년을 살아 숨 쉰, 아마도 문학을 넘어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친 캐릭터들이 아닐까 싶네요. <뉴욕을 털어라>의 원제는 <Hot Rock>. 이 작품에서 도트문더는 가상의 아프리카 작은 왕국을 상징하는 에메랄드를 털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그래서 제목에 Rock(돌)이 들어갔나 봅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도트문더는 원래 파커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구상하다가 뜻밖에 분위기가 너무 코믹해지자 이건 무자비한 파커에는 어울리지 않아!, 하고 접어둔 걸 나중에 아예 새로운 인물(도트문더)을 등장시켜서 만들어보자!, 하며 쓴 것이라고 하네요.


영화 <토머스 크라운 어페어>나 <오션스11> 같이 몇 명의 전문 도둑들이 모여 계획을 짜고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도적질에 성공하는 장르를 케이퍼(Caper)라고 부른답니다. 이 장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도트문더 시리즈를 특히 웃음이 넘실대는 코믹 케이퍼로 만들었어요. 천재적인 작전가 도트문더만 비교적 정상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절친한 친구 켈프는 나사가 조금 빠진 인물이죠. 운전담당 스탠 머시는 마마보이 기질이 있는 속도광, 자물쇠 담당 체프윅은 기차 오타쿠, 장비 담당 그린우드는 경찰이 몰려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여자를 꼬득이는 구제불능의 바람둥이입니다. 각자 맡은 일에서는 걸출한 능력을 자랑하지만 뭔가 사랑스럽게 맛이 간 이들이 벌이는 에메랄드 강탈 계획은 성공했다 싶으면 어긋나고, 이번에야말로 하면 역시나, 하면서 무려 여섯 번이나 계속됩니다. 똑같은 보석을 여섯 번이나 털어야 하는 이들의 기구한 사연은 정말 웃음 없이는 볼 수 없죠. 인간의 행동이라는 게 비록 도둑질 같은 범죄라도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모양입니다. 냉혈한 파커와 헐렁한 도트문더는 어쩌면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바라본 범죄의 양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욕을 털어라>는 320페이지의 짧은 분량에 반 이상이 유머 넘치는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혹시 보석을 빼돌린 게 아닌가 하고 도트문더가 체프윅을 의심하자, 그는 자기가 비록 이런 일을 해도 신용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라며 큰 상처를 받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도둑질이죠^^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명대사. 켈프가 밉살맞은 변호사(도트문더 일당을 배신한 전력이 있죠) 프로스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프로스커의 약속과 10센트가 있으면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죠. 하지만 그냥 10센트만으로 사 먹는 커피 맛이 더 좋아요." 여기서 한밤에 떼굴떼굴 굴렀습니다. 아주 사실적인 케이퍼물은 아니고, 요즘 작품들 같이 특수한 장비가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타고난 이야기꾼만이 펼칠 수 있는 탁월한 '구라'와 '썰'이 있죠. 이런저런 배경지식을 한 무더기 펼쳐놓으면 소설이 되는 줄 아는 요즘 대중작가들에게 꼭 권하고 싶네요. 제 생각에 소설의 본질은 거짓말이고, 또 이야기라는 것을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 대중소설 작가들의 죄악 중 하나인 한없이 늘어지는 분량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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