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교실 -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1995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침묵의 교실>, 무려 654쪽이다. 보통 책 분량이 이쯤 되면 이걸 언제 다 읽나 하는 당혹감이 첫 번째고, 들고 다니면 팔이 빠지겠다 싶은 두려움이 두 번째다. 하지만 작가가 오리하리 이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래도 오리하라 이치는 결말이 이렇게 날 것이라는 독자들의 예측을 몇 번이고 엎었다가 또 뒤집는 반전의 선수이니만큼 654쪽이면 한 다섯 번쯤은 속겠군, 하면서 오히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침묵의 교실>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는 통쾌하게 속는 쾌감은 살짝 덜한 편이다.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중에서는 <원죄자>가 가장 강력한 반전을 선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침묵의 교실>에서는 그 만한 충격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추리소설’도 분명 ‘소설’일진대, 무슨 야바위 사기꾼마냥 오직 독자를 얼마나 멋들어지게 속여 넘겼는지로만 평가받아야 하는가. 작품의 주제의식이 분명하고,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몰입감이 있으며, 그럴싸한 인물과 실감나는 대사가 있으면 그게 바로 좋은 소설이 아닐까? 다행히 <침묵의 교실>은 언급한 좋은 소설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귀한 시간과 돈을 날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붙들어 매두시길.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는 작풍이 주특기인 작가답게 <침묵의 교실>의 줄거리는 다소 복잡하다. 먼저 현재.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삼십대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이며 집, 직장 등 자신에 관한 건 무엇 하나 생각나지 않는 그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물건은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동창회 살인 계획서’, 단 한 장뿐. 남자는 고뇌에 빠진다. 정말로 나는 대량살인을 꿈꾸었던 예비 살인마인가. 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분명하다. 직접 조사에 나서면 된다. 남자는 아오바가오카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며 자신의 정체에 한 발, 한 발 접근해 나간다.


한편, 기억상실의 남자와 더불어 20년 전 그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관한 과거의 이야기도 번갈아 전개된다. ‘숙청’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 따돌림과 학교 안에서 벌어진 온갖 뜬소문들을 왜곡해 학생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공포신문’으로 학교는 온통 얼굴 없는 침묵과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침묵의 교실’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그는 비록 초보 교사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사명감으로 학생들을 세심하게 신경 쓰며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숙청은 단지 학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칠판에 쓰인 자신의 숙청 메시지를 보고 교사가 느꼈을 아찔함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 2장에서는 20년 만에 학생들 전원이 다시 모이는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의 동창회를 다루고, 3장은 동창회 이후의 풍경 그리고 모든 사건의 전말이 낱낱이 밝혀지는 최종장이다.


오리하라 이치를 정의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서술트릭’과 ‘서스펜스’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이 두 개의 큰 틀을 벗어나는 법이 거의 없으며, 그것은 <침묵의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 그, 혹은 복수자 등 3인칭으로만 등장하는 범인은 만약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단번에 정체가 ‘보여졌겠지만’, 모든 정보를 작가가 제공하는 만큼밖에 받을 수 없는 소설 텍스트에서 독자는 작가가 오해하기 딱 좋게끔 이곳저곳 깔아둔 가짜 복선과 단서에 휘말려 이리저리 표류하는 난파선 신세에 불과하다. 오리하라 이치는 이렇듯 서술 트릭으로 독자의 오독을 유발케 하는 솜씨가 가히 장인 급이라 몇 번을 주의해도 결국은 속게 된다. 또 하나의 강점인 서스펜스는 아마도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는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말하는 것일 텐데, 작가는 여기서도 굉장한 재능을 발휘한다. 기억상실, 집단 따돌림, 공포신문, 연쇄살인, 집단납치, 화재 등 질릴 만하면 한 번씩 충격적인 사건이 터지니 도무지 지루할 새가 없는 것이다.


전매특허인 서술트릭과 서스펜스는 여전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범인의 정체나 반전의 순도는 조금 약한 편이다. 작위적일 정도로 심하게 줄거리를 꼬고 또 꼬았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담백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 오리하라 이치가 능력이 없어 이 정도 결말밖에 못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작품의 주제에 맞추기 위해 철저하게 인공적인 플롯을 배제한 게 아닐까. 20년 전의 치기 어린 장난과 아직 덜 성숙한 사춘기 소년의 악의가 먼 길을 돌아 현재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가를 주목한 이 작품에 몇 번이고 계속되는 뒤집기 한 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해자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피해자의 아픔은 오래 지속된다. 아주, 아주 오래…… 비록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결국 과거와 화해하는 주인공들의 훈훈한 모습 역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 물만두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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