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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평점 :
모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작가가 나왔다. 무려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신이라고 불리는 아유카와 데쓰야. 줄여서 본신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국내 최초로 그의 대표작 중 한 편인 1958년작 <리라장 사건>이 출간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아유카와 데쓰야는 1919년생이라는 연배도 그렇지만, 발표한 작품들의 높은 수준으로도 일본 추리소설계의 전설적인 이름들, 즉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못지않은 명성을 얻은 대가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마쓰모토 세이초풍 사회파 추리소설에 맞서 줄기차게 본격 추리소설만을 추구한 그의 업적을 높이 산 후배 신본격 추리소설 작가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런 작가가 왜 이제야 겨우 소개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의 작풍에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아유카와 데쓰야의 전매특허는 사실 기차 및 각종 운송수단의 시간차를 통한 알리바이 트릭에 집중되는 걸로 알려져 있어, 국내 추리소설 기획자들이나 편집자들이 복잡한 시간표를 꼼꼼이 따져자며 읽어나갈 독자들이 많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리라장 사건>은 외딴 별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살해되고, 미궁에 빠진 사건을 명탐정이 등장해 멋지게 해결해내는 전형적인 애거서 크리스티식 플롯을 가지고 있어 열차 시간표 등으로 골머리를 썩일 이유가 전혀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일본 예술대학의 미술학도와 음악학도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몰락한 대부호의 별장이었던 라일락장으로 휴가를 온다. 젊은이들답게 라일락을 줄임말로 리라라고 부르니, 이제부터는 리라장이다. 7명의 예술가 지망생 남녀는 아직 정식 예술가도 아니면서 예술가 특유의 아집과 괴팍한 성품만 미리 배웠는지 성격들이 장난이 아니다.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신경질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며 공격적이어서 한마디로 비호감들. 작가조차 노골적으로 그들을 야유하고 조롱할 정도니 알만 하잖은가. 웃기는 건 분명히 친구들인데, 대부분 서로 싫어한다는 거. 그런데 왜 같이 놀러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함께 있으면 여지없이 재앙이 일어나는 인종들 사이에서도 로맨스는 싹트기 마련이니 그 안에서 몇 겹의 복잡한 삼각, 사각관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류의 소설에서는 보통 한 사나흘은 지나야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반해 <리라장 사건>은 놀랍도록 페이스가 빠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마자 그날 오전에 한 명, 그 다음 날에 두 명이다. 시체들의 옆에는 그들이 들고 왔다가 잃어버린 트럼프의 스페이드 카드가 놓여 있는데, 처음에는 에이스, 그 다음에는 2, 이런 식으로 시체가 늘어날 때마다 카드의 숫자도 올라간다. 트럼프의 스페이드 카드는 전부 13장. 정신이상자같이 카드에 집착하는 범인은 13명을 죽여야 살인 행각을 멈출 것인가. 한편 노련한 경찰들의 눈앞에서도 살인은 계속되고, 이제는 완전히 벽에 막혀버렸다 생각될 때 도쿄에서 명탐정 호시카게 류조가 찾아온다.
이불에 배를 깔고 뒹굴뒹굴 누워 읽으니 극락이 따로 없는 기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작품이라 어쩔 수 없이 낡은 부분이 있지만 그만큼 고전을 읽는 기쁨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사실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고', '그래가지고 설라무네', '다른 곳에서는 뭐하고 있냐며는' 하는 식의 장면 전환 같은 건 확실히 요즘 소설에서 쓰는 기법은 아니다. 그러나 덕분에 외려 진짜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나서 한층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본격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트릭을 보면 여기에도 역시 지금 보기엔 약간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대에는 대단했던 트릭이라도 세월이 갈수록 후배 작가들이 그 트릭을 모방하고 차용하면서 점차 평범하게 돼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아유카와 데쓰야는 유독 신본격 작가들이 많이 사숙했던 작가라 더 그렇지 않았을까. 일부 독자들이 절대 알 수 없는 독약이나 음악, 미술 등의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해답을 이끌어내는 경우도 있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이 죽어나가 나중에는 범인이 거의 2지선다, 3지선다 정도밖에 안 되는 것도 걸리는 부분이다.
다만 무수하게 깔린 복선들과 단서들을 탐정 호시카게 류조가 하나로 꿰어 단숨에 진상에 이르는 결말은 분명 압권이다. 예컨대 범인이 범죄 현장에서 사용하는 스페이드 카드들 말고, 클로버 잭과 하트3은 왜 가져갔을까 같이 몇 가지 사소한 의문들도 나중에 전부 설명되는데 죄다 범인찾기에 도움되는 힌트들이니 머리를 잘 굴려볼지어다. 여담이지만 원래 <리라장 사건>은 아유카와 데쓰야가 추리소설 동호회의 '범인맞추기 퀴즈용'으로 쓴 중편을 개작한 것이라 한다. 책 말미에 그 당시의 일들이 작가 자신의 입으로 술회되는데, 다 읽고 참으로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만으로 청춘을 불살랐던 친구들이 점차 생업에 바빠져 하나씩 연락이 끊기고, 겨우 30년 만에 연락이 되어 보기로 한 친구는 만남 며칠전에 세상을 떠나고...아아, 이런 게 추리소설광의 인생이런가. 나이도 국적도 다르지만 그 모든 선배 추리소설광들에게 경배를 바친다. 그때 당신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