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송곳니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일본 미스터리는 여성이 대단하다는 것은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 다카무라 가오루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얼어붙은 송곳니>의 작가 노나미 아사도 일본에서 상당히 평가받는 여성 미스터리 작가인데, 같은 작품으로 1996년에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데뷔도 1988년에 했으니 이미 중견 작가, 아니면 베테랑이라 불러야 할 듯. 작품 수도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대표작은 역시 <얼어붙은 송곳니>에 등장하는 여형사 오토미치 다카코가 등장하는 몇 편의 장편과 단편집이라 한다.

 

이 작품은 마음까지 얼어붙을 듯 추운 어느 겨울날, 심야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으로 시작된다. 한 남자 손님의 몸에서 갑자기 불이 솟구친 것, 결국 불은 건물을 거의 전소시킬 정도로 크게 번지고 만다. 수사에 착수한 형사들은 새까맣게 탄 남자의 몸에서 짐승의 이빨자국을 발견하고, 긴급히 수사반이 편성된다. '도마뱀'이라 불리는 오토바이 기동수사대 멤버 중 한 사람인 오토미치 역시 수사반에 차출되는데, 그의 파트너는 형사가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가진 중년의 꽉 막힌 다키자와 형사다. 별다른 단서가 없어 수사는 난항을 거듭하는 한편 도심 한복판에서는 연이어 짐승에 물려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대표적인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인체 자연발화와 흉포한 야수의 공격이라는 이중의 수수께끼가 제시되는 도입부가 아주 흥미로웠다. 그러나 작가 노나미 아사의 장기는 추리가 아니라 심리 묘사에 있다는 듯 작품은 주인공 오토미치의 심리를 세밀하게 쫓아가는 것으로 방향을 튼다. 특히 철저하게 남성 위주 사회인 경찰세계 속에서 그녀가 겪는 소외감이나 고독, 절망 등의 심리가 너무도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파트너로 어쩔 수 없이 함께 다녀야 하는 '황제펭귄' 다키자와와의 신경전은 서로에 대한 적의와 무시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파고들어 짜증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렇듯 초반부에는 오토미치가 느끼는 좌절감과 쉽게 진전되지 않는 수사 과정의 막막함이 맞물려 독자들은 깊은 못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예전부터 노나미 아사가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기대만큼 명쾌하고 논리적인 추리소설은 아니었다. 오토미치, 다키자와 콤비가 사건의 해결에 크게 기여하거나 톱니바퀴같이 단단하고 체계적인 경찰 조직이 범인을 압박해 들어가 스스로 꼬리를 노출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우연이나, 범행이 계속 저질러지면서 피해자들의 관계에서 접점이 생기고, 혹은 범인들 내부의 분열에 의해서 단서가 발생하는 식이라 약간 섭섭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책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 경찰소설에 가깝고, 또 실제 경찰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도 누구 한 사람의 절묘한 아이디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난한 기다림 속에서 범인의 결정적인 실수나 새로운 단서 등이 발견되면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을 테니 어쩌면 더 사실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순수하게 경찰소설 측면에서 바라보면 수사진 편성과 실제적인 수사의 양상, 때로 반목하고 때로 화합하는 수사원들 사이의 관계 등이 대단히 현실적이며, 사실상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 관련된 사건에 치중하느라,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을 잃게 되는 수사원들의 애환은 무척 인상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얼어붙은 송곳니>의 백미는 마지막 100페이지의 추격전에 있다. 처음부터 작가는 오토미치가 오토바이를 능수능란하게 탄다는 걸 암시하고 기동수사대장의 입을 통해 범인을 압박할 때 그녀의 오토바이가 쓰일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슬쩍 제시함으로써 밑밥을 깔아둔다. 결국 그녀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범인을 추적하는데 수십 페이지 가량 이어지는 추격전의 쾌감은 정말 대단하다. 그토록 억눌려 있었기에 오토바이로 질주하며 도시를 마음껏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해방감마저 제공한다. 더구나 그녀가 상대하는 범인 역시 사실은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를 인정하며 한계를 초월해 함께 달리는 장면에서는 웅장한 박력과 역동적인 에너지는 물론 책장을 덮어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 깊은 감동까지 느껴질 정도다. 아마도 작가는 제일 먼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오토바이로 도시를 질풍처럼 달리는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집필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생생하게 잘 쓴 장면이다.

 

두 파트너는 남녀를 떠나 서로에게 어느 정도 탄복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순진하게 그간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다키자와는 사건이 끝나고 다시 남자 파트너와 일하게 되자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고, 오토미치 역시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쁜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또 같이 일하기는 싫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사실적인 결말인가(그런데 후속작에서 다키자와가 다시 등장한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풀릴지 몹시 궁금하다). 아주 솔직히 말해 초반부 남녀 주인공의 기나긴 대립은 읽기 불편했고, 지나친 심리 묘사는 약간 지루할 정도였다. 저절로 풀리는 사건의 진상은 슬쩍 허무하다. 하지만 마지막 100페이지가 모든 걸 보상해준다. 감정이 고조되어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최후 추격전의 임팩트만으로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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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8-05-2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등장한 개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나네요..어휴..기특한것..마지막100페이지!!!
확실히 보상해 주죠^^ 노나미 아사 담책나오면 무조건 읽을거예요^^

jedai2000 2008-05-2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풍'이죠 ^^ 노나미 아사의 오토미치 시리즈는 4편인가가 더 있는데 다른 작품들은 상업성이 떨어져 출간을 현재로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네요. 흔치 않은 노나미 아사 팬이시라니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