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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사람이 본래 욕심이 끝이 없고 죄가 많은 동물이라 그런지 뉴스를 보면 하루에도 수십 건의 범죄가 저질러지곤 한다. 그렇게 다양한 범죄 가운데서도 내가 항상 답답함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유괴를 저지르는 범인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잡히는 모습이 나올 때다. 아니, 하고 많은 범죄 중에 왜 하필(?) 유괴를 하느냔 말이다. 일단 납치하기도 어렵고, 납치 대상을 관리하기는 더 어렵고, 납치된 사람이 범인의 용모나 특징, 행동을 기억하기도 쉽고, 게다가 무엇보다 몸값을 받아내는 건 더 어려운데 말이다. 지상 최고의 유괴를 다룬 이 책 <대유괴>에서도 작가 역시 유괴 실행범 중 리더의 입을 통해 유괴의 난점들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있으니 앞으로 영리를 위해 유괴를 저지르려고 작심하고 있는 멍청한 자들은 필히 참조하기 바란다.
유괴란 범죄는 본질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어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1. 인질을 유괴하는 일 자체의 어려움
2. 인질 신병을 극비리에 확보하는 장소와 방법의 어려움
3. 몸값을 받는 방법(가족에 연락하는 방법 포함)의 어려움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3항인 몸값을 밥는 방법으로 1과 2는 마지막 3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또한 이 3항의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1. 인질을 풀어준 뒤의 안전 확보
2. 팀 분열의 방지
3. 몸값의 사용 방법
이 세 항목도 중요한 문제로, 이들 6개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을 때 비로소 유괴는 완전범죄가 될 수 있다.
<대유괴>는 감방 동기인 청년 3명이 유괴단 '무지개 동자'를 결성하여 어마어마한 거부 야나가와 할머니를 유괴하는 기둥 줄거리를 갖고 있다. 야나가와 할머니의 재산은 간단히 말해 오사카의 20퍼센트 면적에 해당하는 산을 소유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자산가. 무지개 동자들이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할머니의 동선을 파악하고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유괴에 성공하는 게 초반부까지의 이야기인데, 범행 준비 단계부터 계획을 실행하는 모습까지 실제 옆에서 지켜보는 듯 실감난다. 그런데 무지개 동자들의 손에 떨어진 할머니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어벙한 그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가 하면 약소한 5천만엔의 몸값에 오히려 분노하며 내가 그렇게 싸구려로 보이냐며, 100억엔은 요구해야 자존심에 걸맞는다고 큰소리를 친다. 무지개 동자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5천만엔은 가방 하나면 되는데, 100억엔이라는 돈은 아무리 거부의 집이라도 마련하기 어렵거니와 커다란 트렁크 가방 수십 개에 담아야 하니 그걸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무지개 동자들의 고민은 깊어져만 간다.
전반적으로 따스함과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도저히 납치되었다고는 믿기 힘든 야나가와 할머니의 자신만만한 행동들로 어느새 유괴범들과의 관계가 역전되고 마는 상황의 아이러니가 웃음의 주된 부분이고, 뼛속까지 악인은 아닌 무지개 동자들의 순박함에 기분 좋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 작품 <대유괴>는 1978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세상에 나온 지 이미 30여년이나 된 고전이지만 당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비롯한 상들을 휩쓸었고, '문예춘추'에서 각계 미스터리 전문가들의 투표로 뽑은 20세기 걸작 미스터리 랭킹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그야말로 전설이라 부를 수 있을 듯. 사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모 포털 사이트에서 어떤 영문인지 700원만 투자하면 이 책을 e-북 형태로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 700원 결제를 하고 반 정도를 보았다가 갑자기 취직을 하게 되면서 바빠져 끝까지 볼 수 없었는데, 다행히 이렇게 책으로 묶여져 나와 눈의 피로도 덜고 종이책으로 영구히 보관하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워낙 암암리에 유명했던 작품이라 너무 늦게 소개된 감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독자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무척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즐거움 반 아쉬움 반이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세월의 흔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작품에서 무지개 동자들은 유괴의 여러 난점들을 타파하는 데 매스컴을 이용한다거나, 특별한 운송 수단을 사용하며 위기를 넘기고 목적을 달성한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건 본문 중에 무지개 동자를 쫓는 뛰어난 경찰관인 이카리가 수사에 사용하려고 전파상에서 27인치 텔레비전을 빌려왔다는 대목인데, 일반 TV의 2배에 달하는 위용을 자랑하는 대형이란다. 이미 50인치도 우스운 요즘 세태에 비춰보면 <대유괴>가 어느 정도는 낡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독자들은 아마 매스컴의 허를 찔러 야나가와 할머니의 무고를 생방송으로 중계하며, 몸값을 전달받는데도 위에 언급한 특별한 운송 수단을 사용하여 경찰들을 농락하는 신출귀몰한 무지개 동자들의 모습에 커다란 쾌감을 느꼈을 듯하다. 하지만 이미 범죄자의 추적 과정이 TV로 생중계까지 되며, 어떤 운송 수단도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내게는 크게 기발한 느낌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물론 1970년대 작품이라 무조건 낡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1930년대 애거서 크리스티의 트릭이 인간 심리의 보편적인 면에 호소해 그 옛날에 봐도, 지금 봐도, 그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데 반해, 당대의 하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트릭은 그 하이 테크놀로지가 어느덧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 미래에는 어쩔 수 없이 그 감흥이 줄어들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즐거운 점을 말해보라면 사실 차고 넘친다. 야나가와 할머니 유괴 사건은 그 기묘함과 엉뚱함이 세상 사람들의 구미를 자극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사람들은 마치 한바탕 축제처럼 사건에 관심을 가진다. 전 세계가 떠들석한 이 소란스런 난장판은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더 유쾌하게 만들며, 유괴를 당한(혹은 당해준) 할머니의 진짜 목적이 밝혀지는 결말의 반전은 짜릿하다. 대책없이 순박한 노인만이 아닌 비장의 한 수가 있는 책사로 할머니의 캐릭터를 설정한 건 작가의 탁월함이라 하겠다. 사실 그런 두뇌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 큰 재산을 일구었겠는가. 전편에 흐르는 유머와 인간미, (지금 내 기준으로는 약간은 퇴락했다고 생각하지만) 준수한 트릭과 두뇌싸움, 무엇보다 반전이 돋보이며, 유괴의 준비부터 무사히 몸값을 전달받기까지의 전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유괴소설로서 꽤 높이 평가받을 작품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