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존 르 카레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올 가을을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 <본 얼티메이텀>의 영향 때문일까. 최근 여자들이 선호하는 남자 순위에서 스파이가 뜨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스파이들의 광대한 세계가 최근 한 편의 영화 때문에 갑자기 조명받고 있다는 건 그냥 농담이고, 사실 스파이는 인간들 사이에 전쟁이 발생한 이래 늘 존재한 거니까 그 역사가 무궁무진하다. 왜 동양 최고의 병법서라는 손자병법에도 '용간(첩자)편'이라는 항목이 있어 필승의 핵심 요소로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적진 한복판에서 온갖 위험과 맞닥뜨리는 와중에 기지와 결단력을 발휘해 핵심 정보를 가져와 자국을 승리로 이끄는 스파이들의 이 유서 깊은 활약에는 누구나 다 관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들의 행동 방식이 워낙 은밀하다 보니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물론 실체가 알려져서도 안 되겠다). 그래서 <본 얼티메이텀>의 제이슨 본 같은 무지막지한 암살자 스타일의 과장된 스파이도 대중문화 속에서 그려지는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제이슨 본같이 활동하는 스파이가 있다면 3일 안에 몬테카를로 앞바다에서 시체로 떠오를 듯(영화처럼 기억만 상실된다면 다행이고).

 

베일에 쌓여 있지만, 오늘도 세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그들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정답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는 것이다. 1931년생 존 르 카레는 20편 남짓한 작품들 모두에 스파이를 등장시켜 스파이 소설 분야에서는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표작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1963년 미국과 영국의 양대 추리문학상인 에드거앨런포상과 골드대거상을 휩쓸었으며, 2005년에는 영국추리작가협회 창설 50주년을 맞아 그간의 골드대거상 수상작 중에서 베스트를 뽑는 자리에서도 당당히 1위에 올랐다.

 

그 자신은 미국,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공로상 격으로 각각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 그랜드 마스터와 다이아몬드 대거를 모두 획득했고 영국 왕실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았으니 스파이로 가장 덕본 사나이라고 해도 부족함은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존 르 카레는 어떻게 이렇듯 거대한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을까? 그는 1961년에 이 작품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통해 등단했다. 하지만 그가 이 방면의 선구자는 아니었다. 이미 1950년대부터 이언 플레밍의 007시리즈가 충분히 스파이라는 매력적인 존재를 대중들에게 충분히 각인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존 르 카레는 뭔가가 달랐다. 문장에는 품격이 넘쳤고, 무엇보다 007시리즈가 현실 어디에도 존재할 법하지 않은 영웅의 대활약을 그리는 오락 소설이었다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에는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내는 '인간'이 있다. 배신과 암투, 간계 속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쓸쓸해하는, 국가라는 거대 조직 속의 부산물에 다름 아닌 스파이의 뒷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존 르 카레는 스파이를 등장시킨 무수한 작가들 속에서 그 혼자만이 찬란히 빛날 수 있는 차별성과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본다.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는 처녀작이지만 존 르 카레 작품의 특징이 대부분 담겨 있는데,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한다는 스파이계의 노병 조지 스마일리가 처음 등장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공작을 펼쳤던 노련한 스마일리는 중년이 지나 현장에서 뛰기 곤란해지자 정보부의 한직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외교부의 고관이 대학 시절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는 투서가 날아들자 스마일리는 그와 면담을 한다. 그에게서 그럴 듯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한 스마일리는 면담을 종료하지만, 다음 날 고관은 권총 자살을 한다. 유서에는 스마일리에게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며, 모멸감에 자살한다고 밝혔다. 분명히 면담 분위기는 좋았는데 왜 그가 그런 말을 남겼을까. 스마일리는 조사를 위해 이른 아침 죽은 남자의 아내를 만나는데 정확히 8시 30분에 남자가 신청한 모닝콜이 울린다. 죽기로 결심한 남자가 왜 다음 날 아침 일찍 깨워달라는 전화를 부탁했을까?

 

제목 그대로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의 미스터리를 푸는 이 작품은 역자후기에도 적혀 있듯이 전통적인 미스터리 소설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당시만 해도 애거서 크리스티풍의 본격 미스터리가 마지막 불꽃을 태웠을 시점이라 존 르 카레도 그 영향을 받아 초기작 2편에서는 플롯에 본격 미스터리 성향이 엿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나 장기는 숨기지 못하는 듯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에서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처럼 이념이나 헛된 이상을 좇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나이를 먹어 사랑도 떠나고 공허감만 가득해진 중년 스파이들의 애상이 그려진다. 결말도 무척 좋고,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 등장한 몇몇 반가운 인물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그 무시무시한 독일 스파이 문트까지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요즘처럼 첩보위성이나 인터넷 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스파이와 접선자가 극장에서 라커룸 번호표를 바꿔 비밀 정보가 든 가방을 교환한다는 식의 고전적인 스파이 기법을 보여준다. 로테크(lowtech) 시절의 스파이들에 동경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존 르 카레가 그렇게 스파이들의 세계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건 그가 실제 영국 정보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란다. 본명이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인데, 존 르 카레라는 필명을 쓴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그래서 그가 그리는 스파이들과 그들의 세계가 그렇게 정교하고 실제적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미스터리 작가 중에서 스파이나 정보부 일을 했던 사람이 꽤 있다. G.K. 체스터튼, 존 버칸, 이든 필포츠 등은 1차대전 때 활약했고, 007시리즈의 이언 플레밍 역시 정보부 출신인데, 사람을 죽이라는 지령을 받고 문 앞까지 갔다가 차마 못하고 돌아온 일화가 있단다. 아마도 자기가 못해서 007을 시켰나 보다.  

 

 

p.s/ 번역, 윤문 상태 아주 안 좋다. 다음에 나오는 작품에는 신경 좀 더 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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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10-24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래서 스파이를 잘 알았던거군요^^

jedai2000 2007-10-24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가장 궁금한 작품인 '카를라를 찾아서' 3부작도 꼭 완간됐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