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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는 말이 있다. 작디 작은 소년이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여행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성장해가는 소년을 그리는 소설은 미국 문학의 오랜 전통이다. 허클베리 핀이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어느 세대나 그 세대만의 허클베리 핀을 보유할 자격이 있다. 다행히 우리 세대에도 허클베리 핀이 있다. 1951년에 처음 우리에게 소개된 홀든 콜필드라는 아이가 바로 우리 세대의 허클베리 핀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유명 사립학교의 허위와 모순에 질려 비행을 일삼다 퇴학당한 홀든 콜필드라는 소년이 이틀동안 뉴욕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수구의 오딧세이아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뉴욕에서 만나는 여러 명의 밤거리 인생들(콜걸 등)이 정확하게 묘사된다. 물론 홀든이 창녀만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다. 유일하게 믿음을 주었던 선생님의 집도 찾아가게 되는데, 그 선생님은 잠든 홀든의 몸을 어루만지며 성욕을 채우려 한다.
비행소년의 외투를 입었지만 사실은 섬세하고 여린 영혼을 가진 홀든은 이틀동안 만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속이려 하며,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 하자 크게 상처를 입는다. 마침내 모든 고단한 현실을 잊고 도피하려 하지만, 어린 여동생 피비의 순수한 마음을 보고 자신에게는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같이 어리고 여린 아이들이, 자신같이 상처받는 일이 다신 없도록 막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대단히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거의 신화가 되어버린 작품으로 출간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그 광채가 조금도 바래지 않은 성장소설의 고전이다.
작품에서 1인칭으로 묘사되는 홀든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장면들이 우스운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끓는 사춘기의 그가 여자들을 어떻게 해보려다가 오히려 털리고 마는 장면들은 특히 재미나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홀든과 동생 피비의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홀든은 가족과 사회에 모두 실망해 짐을 챙겨들고 산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어린 여동생 피비는 가방까지 싸서는 오빠와 같이 가겠다며 쫓아온다. 오빠는 피비를 어떻게든 집으로 보내려고 애쓰다가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보고는 저걸 태워준다고 말한다. 피비는 자신의 숭고(?)한 목적은 망각한 채, 회전목마를 타며 너무나 신나한다. 너무도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독자인 나마저도 눈물나게 만든다. 동생의 순수한 모습을 보며 홀든은 동생 피비만큼은 내가 느꼈던 아픈 상처를 겪게 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순간, 홀든은 좀 더 좋은 어른으로써, 좀 더 멋진 사람으로써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된 것이다.
영화로 만들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장면이다. 빨간 옷을 입고 있는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고 빙글빙글 돌아가는데, 이틀동안의 피로로 점점 흐려져 가는 홀든의 눈에는 빨간 색채만 가득하다. 이윽고 서서히 감겨지는 홀든의 눈...그림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나? ^^;;
홀든이 되고 싶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사실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홀든이 스스로 성장했듯이 아이들은 누구나 고통과 상처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므로...그렇지만 홀든은 이틀 동안의 여정을 통해 비행소년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아 각성했다. 자신만의 고민과 아픔에 매몰되어 가던 소년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고 말하게 되는 변화의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이 소설이 주는 강렬한 감동은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작가인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이 작품으로 불멸의 명성을 쌓았는데, 실제 홀든의 성격과 웬지 비슷할 것 같은 추측을 해본다. 현재 그는 80세가 넘는 고령으로 여전히 생존해 계신데, <호밀밭의 파수꾼> 이후 완전히 은둔한 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한층 신비감이 더해져 거의 현대 문학계의 신화적 존재가 됐다.
그런데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대문호의 집을 가다'라는 기사에서 보니 집 앞 술집은 가끔 간다고 한다...-_-;;
존 레논을 암살한 정신병자가 범행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고 있었던 건 이미 유명한 일화이다.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이 작품을 탐내어 영화화 1순위로 꼽히고 있는데, 만들어지면 대성공이 보장된거나 다름없는 작품이지만 작가가 워낙 영화를 싫어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영화 제작자들은 작가가 사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뭔가 꺼림칙한 뒷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명문장을 소개해 본다...홀든이 동생 피비에게 하는 말이다.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