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20
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이영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경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맡기고, 구름과 바위와 합일되어야 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 고독하면서도 우아한 인물, 프리드리히

 

한 사내가 절벽 위에 올라 안개 자욱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시선이 떨어지는 화면 중간에는 물 위로 삐쭉삐쭉 솟아오른 바위들이 도열해 있고 바위 위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웅크린 듯한 모양새가 마치 인간 군상을 연상시킨다. 그 너머로는 멀찍이 거대한 산봉우리가 물안개 뒤로 희미하게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치 신성이 깃든 듯 신비로운 모습이다.

 

사내는 관조자로서의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자연은 온통 격정으로 충만하다. 산과 바위는 마치 격렬하게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그 주변을 둘러싼 수파와 물안개는 좌우로 요동치며 화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절벽 위에 두 다리로 단단히 무게중심을 잡은 사내의 머리카락도 거센 바람에 휘날리며 이런 격렬한 움직임에 호응하고 있다.

 

자욱하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초겨울의 이른 아침. 사내는 왜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한 채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발걸음은 대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보는 이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이 작품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안개 속의 방랑자'로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시각적 기념비다.

 

독일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낭만주의는 지나치게 합리성에 얽매인 계몽주의와 고전적 규범을 맹신한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운동으로 그 첫 포문을 연 것은 괴테와 실러가 중심이 된 '질풍노도' 운동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전통과 규범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자연스레 화가들로 하여금 내적인 성찰과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몇몇 진지한 화가들은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종교적 명상으로 나아갔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종교적 명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에 정신적인 깊이를 쌓아갔다. 당시 독일 화가들이 이탈리아로 달려가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적 규율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때 그는 모국인 독일의 풍경을 진지하게 탐색,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북구 특유의 자연을 신비롭게 묘사했다.

 

 

 

 ♣ 낭만의 성채를 지키는 고독한 파수꾼

 

프리드리히는 자연에 깃든 정신성을 다름 아닌 신이라고 보고 풍경화를 신을 향한 구도와 명상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안개 위의 방랑자’처럼 자연의 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독하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인 동시에 관람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점은 등장인물을 뒷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자가 그림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우주 자연을 관조하도록 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월출」  1821년경

 

 

프리드리히는 "화가는 눈앞에 보이는 외형만 그려서는 안 되며,자기 내면에 보이는 것도 그려내야 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화가가 자기 내면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고 극언할 정도였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낭만주의라는 시대정신과 어우러져 그를 확고부동한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프로이센 왕의 후원을 받고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등 그의 성공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대는 언제나 제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화가의 만년에 이르러 낭만주의자들은 점점 현실감각이 없는 기인으로 손가락질 받게 되고 후원자들의 손길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세상을 뜨는 날까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낭만의 성채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남는다. 자신이 평생 걷게 될 고독한 여정을 예상하고 있는 ‘안개 속의 방랑자’처럼 말이다.

 

 

 

 ♣ 바다 저편 무한성을 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1818~1820년

 

 

산이나 바다에서 우리는 제약되지 않은 느낌은 모든 것이 트여오는 듯한 체험을 한다. 심신이 트이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무한성의 체험이다. 내가 사는 공간이 내게 속하면서도 나를 넘어 저 먼 곳까지 이른다는 느낌은 광활함의 감각이다. 낭만주의는 가장 간단히 말해 이 무한성의 경험이고 그 그리움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하늘(공기)과 바다(물)와 땅(모래)을 본다. 이것은 자연의 기본요소다. 지구가 생명의 요람이 된 것은 물과 대기 덕분이다. 땅이 인간의 토대라면 바다는 그가 유래한 곳이다. 인간은 하늘의 대기를 매순간 들이켜고 내쉰다. 그림 속 인물은 한 점처럼 서 있다. 그는 이쪽-관찰자가 아닌 저쪽을 향해 있다. 낭만주의 회화의 인물에는 이처럼 등을 돌린 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관찰자는 인물과 같은 시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 내면으로부터 외부의 현실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 속 수도사는 땅의 끝에 서 있다. 이 모래언덕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대기와 땅과 바다뿐. 이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하나의 얼룩처럼 자리한다. 그래서 외롭다. 황량함과 고독은 자연의 전체, 즉 우주 앞에 선 인간의 필연적 조건이다. 이것은 화면의 5분의 4를 채운 하늘에서 잘 암시된다. 물과 땅과 대기는 그가 오기 전처럼 그가 떠나간 후에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이다.

 

근원적인 것은 이렇듯 단조롭고 무한하다. 그러면서 순환한다.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이 구름이 농축되어 비로 된다. 그 사이에 어떤 것은 굳어져 물질이 되고, 이 물질은 바람에 날려 모래가 되며, 모래는 먼지로 떠돌다가 물에 씻겨 내려간다. 이것은 자신을 쉼 없이 비워내는 탈세속화의 과정이다. 인간의 생애는, 그 육체는 먼지와 바람과 물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뭉쳐있는 고체가 모래언덕이라면, 모여 있는 이 물질도 바람으로 물로 언젠가 소진될 것이다.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다 물결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자연의 근본요소는 인간의 성취를 무시한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뤼겐의 백악 절벽」  1818년

 

 

자연의 무한한 모습은 우리의 정서를 압도한다. 이것은 두 가지 모순된 정서적 효과, 절망과 활력을 동시에 일으킨다. 절망은 자연의 파괴적 힘에서 온다. 가늠할 길 없는 자연 앞에서 우리는 자기 몸이 보잘것없으며 그 삶도 하찮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무시간적 우주에서 우리가 그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로 하여, 활력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그림이 단순한 풍경 모사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길, 그래서 이지러진 시대의 영혼을 정화하길 바랐다.

 

 

 

 ♣ 고독과 명상이 필요한 시간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 (지는 태양 앞의 여인)」  1818~1820년경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무엇보다 무한성의 경험이다. 이 무한성은 진실하고 영원하며 신적이다. 그러므로 좋은 풍경화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명상이면서 꿈꾸기이며, 기도이고, 비전이다. 참된 자연의 체험은 성스럽고도 장엄한 종교의식과 같다. 그래서 믿음은 회의와 만나고, 우울은 희망과 짝한다. 세계의 전체를 어루만지게 된다고나 할까. 삶의 이곳은 그 둘레와 너머까지 가늠할 때 온전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여분을 허용하고 그 나머지를 돌볼 때 본래성에 다가선다.

 

그의 풍경화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홀로 있어야 한다. 그림 속 방랑자나 수도사처럼 혼자 서서 느끼고 생각하며 돌아보아야 한다. 정신의 내면적 눈은 이때 생긴다. 생명은 지워지고 있는 하나의 점이면서 무한의 우주로 이어진 고리다. 이 무한성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왔던 세계가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이 일부의 세계 너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또 다른 광활함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여기 이곳이 저편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부분은 어떻게 전체로 이어지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삶에서 이런 생각은 하기 어렵다.

 

고독한 낭만주의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덧없이 스러지며 순환하는 영원하고 무한한 자연 현상을 고독하게 바라보는 작지만 커다란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그것에서 ‘나’란 주체, 개체는 무의미해 보인다. 영원과 무한 속에서 유한한 인간 존재는 그만큼 슬프고 남루하다. 그러나 우리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보면서 저 신비스러운 자연 앞에서 세계에 대한 성찰과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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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에 수록된 ‘황혼의 반란’이라는 단편이 있다. 한 사회학자가 TV저녁 뉴스에 나와서 사회보장 재정적자의 대부분은 노인들 때문임을 증명해 보인다. 그러자 노인 배척운동에 정치인들이 가세해 의사들이 공익은 뒷전이고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해 노인의 생명을 마구잡이로 연장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태가 갈수록 나빠지자 정부는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인공심장의 생산을 중단시켰다.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노인을 불사의 로봇을 만들 수 없다’며 ‘생명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존중되어야한다고 선언’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회학자의 주장은 젊은 사람들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을 배척하는 무시무시한 집단 심리로 형성하게 된다. 노인들은 노인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가 그 곳에서 안락사의 운명을 맞는다. 그러자 할아버지 주인공 프레드는 노인수용소에 잡혀가기 직전 탈출해 반란을 주도한다. 체포된 프레드는 젊은 대원에게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면서 마지막 말을 던진다. “너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게다!”라고. 소설 같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노인’은 우리가 기억하는 ‘웃어른으로 존경받던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지난날 노인은 권위의 상징이며, 경험 지식의 제공자로써 필수적인 조언자였다. 경제적으로도 노인은 많지 않아, 우리에게 할당된 부양 몫은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 나이는 더 이상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며, 경험 지식은 인터넷에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인이 많아진 탓에, ‘그들의 부양이 국가적 부담’이 되어간다는데 문제가 있다. 책에서 언급한대로 “65세는 괜찮아요, 70세요? 손해의 시작이죠”처럼...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그들 속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

 

 

 

 

 ♣ 그늘의 경계선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노인을 배척하는 집단 심리의 행위는 단순히 픽션만은 아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원시사회에서는 노인들을 잔학하게 대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머리가 백발이 되면 죽였다. 남태평양제도의 어떤 부족은 노인이 되면 야자나무 위로 올려 보낸 뒤 밑에서 흔들어 떨어지지 않으면 더 살도록 하고 떨어지면 처형했다. 육체적인 힘이 세대사이의 관계를 규정했다. 그러나 문명이 조금 발전하면 노인들은 죽음을 당하지 않아도 혹독한 대우를 받는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섬뜩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들이 늙은 아버지의 머리채를 잡고 문밖으로 끌어내는 순간, 노인이 이렇게 외쳐댄다. “그만 둬 이놈아, 나는 내 아버지를 여기까지 끌어내지는 않았어.”

 

서구문명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중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노인들이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정중하고 예의바른 대접을 받았다. 오랜 세월 변화가 없는 세계에서는 경험처럼 가치 있는 자산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세대 간의 관계도 급속도로 변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이나 배려는 시들어 가고 있다. 노인의 특권인 안정과 전통은 도외시되고 승리는 빠른 변화에 대처해가는 젊은이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노인의 경계선이 한창 일할 나이인 50대로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50에 이르면 자기 앞에 ‘그늘의 경계선'이 보이고 오싹하는 기분으로 그 경계선을 지나고 나면 젊음의 매혹적인 영역이 끝난 것으로 믿게 된다”는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인생추분론'이 딱 들어맞는 말이 돼가고 있다.

 

 

 

 

 ♣ 지금의 20대가 노인이 된다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복지에 대한 수요와 노인층은 늘어나고 요구도 갈수록 커지는 형편이다. 반면에 세계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기업 투자가 위축돼 일자리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은 민심을 위한 공약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 정년연장 등의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노인연금은 재정 및 복지부 내부 갈등 문제 등으로 인해 보류된 상태다. 이는 기업과 재정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법제화를 통하여 정치의 논리로 정치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안 될 일이다. 지금의 비정규직을 생산한 것도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정치논리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사람도 2년이면 재계약 없이 해임하는 폐단이 생겼다. 그리고 연금 지급을 통한 복지 문제는 재정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돈만 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지금 시행되는 노인 정책들이 포퓰리즘 일색으로 민심을 얻기 위한 단기정책이란 느낌이 앞선다. 물론 노인에게 필요한 것들이겠지만.

 

이미 고령사회에 접어든 국가들은 대부분 막대한 복지예산을 지출한다. 미래에 우리도 엄청난 복지예산이 필요로 할 것이며 결국 국민 세금으로 충당할 것이다. 노인문제도 소득에 따라 차별화해야 한다고 본다. 누구나 받을 수 있다면 ‘혜택’으로 여겨질 수 없다. 한정된 재원의 국민 세금인 까닭에,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노인들에게만 돌아가야 한다.

 

 

 

 

 

『맹자』(孟子)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존경할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달존(達尊)'이란 말이 나온다. 맹자는 그런 인물의 세 가지 조건으로 사회적 ‘명예'와 ‘나이', 그리고 ‘덕'을 꼽았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덕을 가장 중요시하여 나이에 알맞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존경을 받으며 ‘멋있게 늙어가는' 길은 현재 이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아득한 과거와 미래에 비추어 보면 현재란 하나의 점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에서 나와 공존하는 주위의 모든 사람처럼 소중한 것도 없다.

 

미래에 노인이 되는 우리는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린 결코 지금 노인만큼 대접받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제도를 고쳐, 한평생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발상은 너무 유치하다. 지금의 20대가 백발의 노인이 되는 미래를 상상한다면 암울하다.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열중하고, 경제적 자립이 없는 베이비부머를 봉양하느라 젊은 시절부터 고생했다고 우리는 청춘의 과거를 후손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후손들이 겪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위로와 용기의 말도 전한다. 그러면서 경제적인 혜택을 통한 예우와 대접을 받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황혼의 반란’은 일종의 유전병처럼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먼 훗날 젊은 세대가 ‘당신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말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노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연장자로써 모범을 보이고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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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10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새 '오십 고개'를 넘었는데 이래저래 '우리의 미래'가 참 여러모로 걱정이 되긴 합니다. 저같은 50대에 대해서나 cyrus 님 같은 20대에 대해서나 똑같이 말입니다. cyrus님의 이 글에 마침 등장하는《몽테뉴 수상록》이 너무 반가워서 그 책 속에서 읽었던 '오십 고개'에 대한 재미있는(?) 구절을 덧붙여 봅니다.

* * *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호라티우스)

자연은 이 나이를 꼴사납게 만들 것 없이, 가련하게 만든 것만으로 만족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이것이 일주일에 세 번쯤 허약한 힘으로 일어나며, 뱃속에 당연히 해낼 어떤 위대한 힘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칠게 부스럭거리는 꼴이 보기도 싫다. 솜털에 불이 붙은 꼴이다. 그리고 지금 둔중하게 얼어붙어서 볼이 꺼진 이 나이에 이렇게도 생기 있게 팔딱거리는 자극이 놀랍다. 이런 욕망은 청춘의 꽃다운 시절에나 가질 일이다. 이런 충동을 믿고, 그대에게 있는, 이 피로할 줄 모르게 꾸준하고 충만하고 장엄한 열기를 한번 거들어 보라. 좋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cyrus 2013-10-10 21:26   좋아요 0 | URL
저는 동서문화사에 나온 수상록을 소장하고 있어요. 분량은 두껍고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가끔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 꽂혀있는 수상록을 읽곤 합니다. 흥미롭고 인상깊은 이야기나 멋진 명언을 만나면 밑줄이나 표시를 해둡니다. 그래서 밑줄 친 부분만 반복해서 읽곤 합니다. 옛날 시대의 글이지만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감정이 지금과 별반 다를게 없는거 같습니다.

oren 2013-10-10 22:21   좋아요 0 | URL
"한 양서를 요약해서 만든 축소판은 모두 어리석은 축소판이다"라는 몽테뉴의 말이 아니더라도, '참다운 작품'은 가급적 완역본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 듯해요.

저는 이번에 '두 번째'로 완독하면서 예전에 20대 초반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내용들을 몽테뉴의 글 속에서 길어올릴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그래서 독서노트에 옮겨 적거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메모한 분량이 (지금 세어보니) 무려 112쪽이랍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내용들을 자판을 두드려가며 필사하다시피 기록해 뒀답니다. 노트에는 '한 줄' 정도로 메모한 내용들까지도 가급적 여러 줄씩 풍성하게 옮겼으니 아마 두꺼운 노트 한 권으로는 다 담지 못하는 분량쯤을 옮겨 놓지 않았을까 싶네요. ㅎㅎ

cyrus님께서도 나중에 저처럼 '오십 고개'를 넘어서 다시 한번 몽테뉴 수상록을 읽으신다면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cyrus 2013-10-11 21:38   좋아요 0 | URL
정말 대단하시네요. 한 권의 책에 대한 애정과 성찰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기록물이네요. 저도 oren님의 길을 따라고 싶어요 ^^
 

 

 ♣ 집안일을 하는 딸, 집안일을 시키는 부모

 

KBS 2TV ‘대국민 토크쇼-안녕하세요’에 온 집의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딸의 사연이 공개됐다. 사연의 주인공인 딸은 중학교 2학년생인데 온 집안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날도 전혀 예외 없이 엄마의 심부름에 숨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털어놨다. 여섯시에 일어나 씻고 밥하고 동생 깨우고 엄마 식사를 준비한다.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저녁하고 청소하고 숙제한다. 주말에 부모님이 쉴 때도 끊임없이 혼자서 심부름과 집안일을 맡을 정도다.

 

딸의 부모님은 딸의 고민에 대해 반박했다. "우리는 자식을 상전처럼 모시지 않는다가 교육관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의 의무는 다 나눠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남다른(?) 교육관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을 딸이 거의 맡다시피 하게 되고, 그 일을 어머니가 딸에게 시키는 횟수가 잦아지자 자신 또한 습관적으로 딸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딸의 고민에 대해 정찬우는 집안일을 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칭찬해 주지 않는 태도의 부모님이 문제라고 정확히 진단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딸이 고민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에 직접 나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본인의 일상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딸은 가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안일에 임했다. 자신이 청소를 안 하면 집은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하게 되고, 밥을 안 하면 동생이 밥을 안 먹는다고 한단다. 가족을 항상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중학교 2학년생은 집안일을 하면서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마음이 성숙하고 기특했지만, 부모는 딸의 진심어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집안일을 시켰던 것이다.

 

 

 

 ♣ 칭찬 능력이 부족한 우리나라 부모

 

식물도 자살을 한다. 일명 ‘스트레스 생리’라고 부른다. 식물도 크고 작은 환경적인 요소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생장한다. 데어 죽을 수도 있고, 동사, 건조사 등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는 환경이 회복되더라도 식물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게 마련이다. 요즘 사람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늘어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만약에 집안일을 하는 딸이 자신의 불만과 고민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살았더라면 사춘기 특유의 우울증에 의한 스트레스가 더 심각했을 수도 있었다. 식물이 햇빛을 받고 자란다면, 사람, 특히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성장한다. 그러니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행복해진다. 특히 가족과 동료들에게 하는 칭찬은 어떤 형태로든 되돌아온다. ‘칭찬의 보약’은 누구나 먹고 싶어한다. 만약 사람이 칭찬과 격려를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감성은 위축되고 시들어 버릴 것이다.

 

학생들은 왜 열심히 공부할까? 한창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왜 집안일을 열중하는 걸까?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장점을 발견해서 인정해 줄 때 엔도르핀이 솟게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때 삶의 의욕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칭찬은 가장 빠르게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행복감을 갖게 하고 자석처럼 서로 끌어 당겨 하나가 되는 마력이 있다.

 

 

 

 

 

 

 

 

 

 

 

 

 

“우리는 자녀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왔을 때 칭찬을 게을리 하며, 아이가 과자를 굽거나 처음으로 새 집을 만드는데 성공했을 때도 격려해 주기에 인색하다. 아이들이 부모의 관심이나 칭찬보다 더 기쁜 것은 없는데도 말이다” (데일 카네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교육열이 강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국내외 일류대학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학원 수강이나 과외공부를 파김치가 되도록 시키는 부모들도 많다. 하지만 아이들의 능력이나 적성을 감안하지 않고 시키기 때문에 탈선하는 아이들도 가끔씩 발생한다. 무조건 시키는 것은 무관심만큼이나 문제가 된다.

 

가장 안 좋은 것은 열심히 아이가 공부를 했는데도 성적이 나쁘면 “누구는 잘 하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 하면서 비교를 담은 충고를 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런 충고를 귀가 아프도록 자주 들은 아이는 어떻게 될까? 아이는 자신에 대해 ‘나는 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 이미지나 열등의식을 갖게 되어 소심한 아이가 되는 등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데 조그만 실수했다고 부모가 딸에게 핀잔을 준다면 딸 입장에서는 얼마나 섭섭할까? 딸은 당연히 옳은 일(집안일)을 하고 있었고, 간혹 실수 한 두 번쯤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칭찬보다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거나 꾸중만 한다면, 딸은 가사 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칭찬을 하는 경우에도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하는 경우가 많다. 사고능력이 성인보다 미숙한 아이들에게 격려나 칭찬을 할 때는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 켄 블랜차드의 ‘칭찬 10계명’

 

 

 

 

 

 

 

 

사람은 장점과 단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누구도 온전히 장점만, 혹은 단점만 가진 사람은 없다. 단점이 그 사람에게 없어져야 할 불순물이라면 이것을 걸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칭찬이라는 약이다.

 

 

그렇다면, 칭찬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칭찬 10계명’이 있다. 켄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책에서 추린 내용이다.

 

첫째, 소유가 아닌 재능을 칭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능력이다. 능력을 인정받는 순간 둔재(鈍才)도 천재가 되는 것이다.

 

둘째, 결과 보다는 과정을 칭찬한다. 올라온 높이보다 헤쳐 나온 깊이를 바라보고 그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다.

 

셋째, 타고난 재능보다는 의지를 칭찬하는 것이다. “머리 하나는 타고 태어났네요”보다 “그 성실성을 누가 따라가겠어요”가 훨씬 낫다. 원석도 다듬어야 보석이 된다. 영혼을 자극하는 것이다.

 

넷째, 나중보다는 즉시 칭찬하는 것이다. 100번 하기보다 오늘 칭찬 한번이 더 낫다. 머리를 붙잡지 꼬리를 붙잡아선 안 된다. 칭찬도 늦으면 철 지난 옷처럼 어색할 뿐이다.

 

다섯째,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칭찬하면 좋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음’, ‘와우’가 훨씬 위력을 발휘한다.

 

여섯째, 애매모호한 것보다 구체적으로 칭찬해야 한다.

 

일곱째, 사적으로보다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게 낫다. 혼자보다는 적어도 셋 이상의 자리에서 칭찬하는 것이 낫다. 칭찬의 옥탄가를 높이는 것이다. 특히 장본인이 없을 때 남긴 칭찬은 그 효용가치가 배가된다.

 

여덟째, 말로만 그치지 말고 보상으로 칭찬하는 것이다. “한 턱 내세요”보다 “내가 쏠게요”가 훨씬 낫다. 때로는 선물도 필요하다. 언어적 수사에만 머물지 않고 물질적 보상이 따르는 순간 명품칭찬이 되는 것이다.

 

아홉째, 객관적인 것보다 주관적으로 칭찬하는 게 낫다. “참 좋으시겠어요”보다 “제가 다 신바람이 나더라니까요”가 낫다. 관계의 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열째, 남을 칭찬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다. “훌륭했어! 정말 멋졌어! 난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내 자신에게 자주해주는 것이다. 자신을 칭찬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을 칭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가족에게도 칭찬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가 순종하지 않을 경우 먼저 아이들을 협박하거나 소리를 지른다. 이는 어린아이나 성장한 아이들 모두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아이들의 실수에 대해 비판하고 잘못된 행동을 고쳐주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옳은 일에 대해서는 칭찬과 격려의 말이 무색하다.

 

가족에게서 받은 무관심과 마음의 상처는 골이 깊고 오래간다. 사회적인 관계와는 기본적인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고 서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서로 타협하고 이해할 수 없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칭찬의 기술을 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안하던 칭찬할 때 쑥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 창피할 일은 아니다. 자녀는 부모가 모범을 보인 데로 성장한다. 부모가 먼저 칭찬하고, 감사하고, 사랑할 때 가정에 행복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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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올재 클래식스' 8번째 시리즈가 출간된다. 올재 클래식스는 비영리 사단법인 올재가 2011년 설립 이후 '지혜 나눔'을 표방하며 부담 없는 가격에 펴내는 인문 고전 시리즈로 유명하다. 한 권당 2900원을 구입할 수 있고 한정 판매다. 내일 오전 11시부터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온라인 주문할 수 있으며, 한글날인 수요일에는 전국 교보문고 매장에 구매할 수 있다.

 

올해 한글날은 23년 만에 공휴일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67돌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에 맞춰 이번에 나오는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 중 한 권은 한글과 관련된 아주 뜻 깊은 책이다.

 

국어학자 방종현(1905~1952) 선생이 쓴 『훈민정음통사』(1948년 작)다. 이 책은 훈민정음 창제 이전부터 20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국어사와 국어학사를 집대성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원문과 해석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를 이제 막 벗어난 광복 시절까지만 해도 국어학에 대한 연구가 아직 체계화되지 않았기에 방종현 선생의 책은 『훈민정음』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 기념비적 연구서인 것이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기원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독창적이다.

 

최근 한글날을 맞아 한글과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재조명하는 도서가 출간되고 있다. 567돌 한글날의 긴 역사를 생각한다면 너무 늦은 감은 있으나, 지식의 상아탑에 벗어나 우리말의 참된 의미를 대중에게 소개하려는 이번 출판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올재 클래식스도 한글날에 맞춰 정말 의미 있는, 그것도 오랜 변고의 세월 속에서 묻힐 수 있는 귀중한 문헌 한 권을 출간하는데, 이를 비중 있게 다루는 기사가 단 한 건도 없다. 달랑 ‘올재 클래식스 8번째 시리즈 출간을 알리는 짤막한 기사 하나만 있을 뿐이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헌의 출간 소식이 외면받는 점이 무척 아쉽기만 하다.

 

 

P.S) 『훈민정음통사』와 함께 올재 클래식스 8번째 시리즈로 출간되는 나머지 도서는 다음과 같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앙드레 지드의 『땅의 양식』(‘지상의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된 적이 있다) / 이이의 『격몽요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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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의 정의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으로서의 미술 교육은 다양한 미술 활동을 통하여 심미적 태도와 상상력,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 주고, 미술 문화를 이해하며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육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대입 논술 시험에 종종 예술, 특히 미술과 관련된 문제들이 출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예·체능 과목이 수능 필수 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실기평가나 수행평가 점수에만 신경 쓸 뿐, 미술 이론에 관심도 없고, 접할 기회도 거의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미술, 음악, 체육 등의 과목을 내신 성적에서 제외하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라고 한다. 서열을 위한 점수 매기기가 아닌 서술형 평가를 도입하겠다는 시도는 일견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내신에서 제외되는 과목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예술’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간단히 정의해 둘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예술은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형식들을 창조하려는 모든 시도들’로 정의된다. 이는 허버트 리드의 예술에 관한 정의를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그는 예술을 ‘(마음을) 기쁘게 하는 형식을 창조하려는 어떤 시도’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의에서 ‘기쁘게’라는 부분이 영 탐탁지 않다. 모든 예술이 마음을 기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우리를 슬프게도 하고, 흥분시키기도 하며,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짜증나게도 한다. 예술을 이처럼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예술을 예술가 집단이나 평론가 집단의 전유물로 바라보는 매우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기 위해서다.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공책이나 책상 위에 그리는 낙서들도 모두 예술이 될 수 있다. 아니, 미술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도 미술이 될 수 있다.

 

 

 

 ♣ 예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예술이 창조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텅 비어 있는 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창조는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일종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보라. 「샘」은 비평가들에게 지난 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샘은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에 불과해 보이기 때문이다.

 

 

 

 

 

 

 

 

 

 

 

 

 

 

1917년 뒤샹은 평범한 가게에서 구입한 소변기에 ‘R. 머트(R. mutt)'라는 이름을 서명해 뉴욕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출품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기성품(레디메이드)을 예술작품이라며 전시회에 출품한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명화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비교해보자. 「모나리자」는 작가의 창작물로서 유일하며 깊은 예술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샘」의 원형인 변기는 유일하지도 않고 작가의 창작물도 아니며 예술적 감성을 발견하기란 더욱 어렵다. 기성품에 변기 제조회사 이름을 대신해 자신의 사인을 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예술품이 될 수 있을까? 동시대 사람들은 비웃었다. 기존 미술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듣도 보도 못한 예술품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비평가들에게 「샘」은 20세기 최고의 예술품이다.

 

이렇듯 예술가에게는 ‘역발상’과 ‘생각의 무한성’을 요구한다. 「샘」은 예술품의 의미를 재정의한 작품이다. 「샘」을 계기로 과거에는 예술품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던 많은 작품이 예술품으로 불리게 됐다. 결국 뒤샹은 「샘」을 통해 예술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확장한 셈이다. 미술사에 이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예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술'로 아는 경험의 범주는 매체나 생산수단이 아니라, 집단적 감각에 의해 정의된다.

 

 

 

그렇다면 뒤샹에게 예술품이란 무엇일까. 그는 예술품의 구성 요건을 예술품 밖에서 찾았으며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요건을 제시했다. 첫째 작가가 예술품으로 선택ㆍ인정한 것으로, 둘째 올바른 장소와 맥락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샘」처럼 작가가 예술품으로 제시하고, 미술관 같은 전시 공간에 놓이면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뒤샹이 남성용 변기 같은 레디메이드를 통해서 진정 주장하려는 것은 사물의 성격과 내용이 가변적이며 환경과 맥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보이며 아무렇게나 다루는 남성용 변기조차도 환경과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가치 있는 예술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뒤샹은 샘을 통해 예술품이든 작가든 모두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일깨운다. 이 같은 철학을 가진 뒤샹이 스스로 제시한 ‘예술품의 두 가지 요건’을 절대조건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뒤샹은 절대조건을 제시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예술품을 둘러싼 관념적인 여러 시각이 의심받지 않고 있는 당시 현실을 문제 삼은 것이다.

 

 

 

 ♣ 창조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잘못된 편견

 

만약 우리가, 창조는 좁은 골방에 틀어박힌 초췌한 예술가들이 머리를 쥐어 뜯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위의 작품들은 작품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저런 것쯤은 누구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당장 주변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두 가지를 결합하여,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보자. 그 과정에 예술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그저 어떤 질료를 선택하여, 나름의 방식대로 배치하였다. 즉, 형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예전에는 그저 '물건'에 불과했던 대상을 '작품'으로 창조해낸 것이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물건의 실용성은 사라지고 그저 ‘사물’로 돌아가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행위 즉, 아이디어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의 재현행위가 아닌 선택한다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가의 본질이라는 그의 이론은 기존미술에 도전하는 개념미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버려진 폐품, 기계로 대량생산된 물체들을 그대로 작품에 사용하는 현대 개념미술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대신 선택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시장의 작품들을 보며 이것도 작품인가 의아해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일상용품을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의자, 병, 바퀴 등등일 뿐이지만 소변기조차도 일상적 사물로서의 인식을 단절하고 순수한 형태적 의미만으로 바라본다면 대칭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고, 우아한 기하학적 오브제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이 뒤샹이 우리에게 보여준 역발상의 미학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이란 예술가라고 '규정된'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이 뭔가 대단한 것이라는 믿음이나 예술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일 것이라는 믿음은 예술에 대한 편견이 낳은 일종의 신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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