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 가후의 도쿄산책기
나가이 가후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은 길을 직접 걸어가는 도보여행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창밖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짧지 않은 길이지만 사색을 하며 걷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행이 된다. 온몸이 욱신거릴 만큼 고단한 도보여행을 통해 높은 정신의 경지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반면에 비행기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멀리 유랑하는 꿈은 생각만 해도 설렌다. 구름 위에서 바라보는 드넓은 대기의 풍경과 고도에서 바라보는 대지의 모습은 비행기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이다.

 

발터 벤야민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보여행과 비행기여행을 비유로 든다.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이라면, 텍스트를 베껴 쓰는 행위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비행기를 탄 사람은 풍경에 길이 어떻게 뻗어나 있는지 볼 뿐이다. 그 사람의 눈에는 거대한 전경이 들어올 뿐이다. 전경을 내려다보는 방식은 텍스트를 죽 눈여겨보는 것과 같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 사이에 놓인 길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고불고불 작은 길목에 사람들의 사연이 쌓인다. 길에는 마을의 역사가 녹아들고, 이 길을 찾은 낯선 이에겐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이런 풍경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벤야민은 길을 걷는 사람만이 길의 영향력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간을 빚어내는 사소한 풍경에 몰입하면 마음이 정화된다. 텍스트를 베껴 써야지만 텍스트에 몰두할 수 있다. 텍스트는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 순간, 텍스트를 눈으로 읽음으로써 파악하지 못했던 매력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가이 가후는 100년 전 도쿄의 풍경을 완벽하게 베끼는 데 성공한 유일무이한 작가다. 『히요리게다(目和下駄)』는 가후가 텍스트의 풍경들로부터 명령을 받아 작성된 책이다. ‘근대화’라는 거대한 너울을 뒤집어쓴 제국주의가 도쿄 땅을 덮치고 있을 무렵에 가후는 근대화의 그림자에 가려질 위기에 처한 에도 시절의 흔적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가후가 산책하기 전에 반드시 하는 절차가 있다. 히요리게다라는 일본식 나막신을 신어야 하며 맑은 날씨에도 박쥐우산을 들고 다녀야 한다. 가후는 한결같은 복장을 고집하면서 도쿄 구석구석을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생소한 거리를 지나가기 위해서는 지도가 있어야 하는 법. 그렇지만 가후는 현대식 축적법과 지도기호가 있는 도쿄 지도가 아닌 옛날 에도 지도를 품에 넣고 다닌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쿄 지도는 기하학이며 에도 지도는 무늬다. 도쿄 지도는 옛 지도보다 정확하지만, 기호와 축적을 표시하는 숫자는 지도 보는 맛을 떨어뜨린다. 에도 지도는 벚꽃이 피는 곳까지 알려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정확성은 떨어져도 지도를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이미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옛 도쿄의 흔적은 세상 풍진으로 인해 퇴색된 빛바랜 무늬와 비슷하다. 가후는 오늘날 도쿄 거리 모습과 옛 도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에도 지도와 직접 대조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한때 아름다웠고 흔했던 에도 도쿄의 무늬를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가후는 자신이 목격하고, 발견한 에도 도쿄의 아름다운 무늬(이미지)를 텍스트화해서 베껴 옮긴다. 사당, 나무, 골목, 공터 그리고 이름 모르는 가난한 서민들의 삶까지 텍스트로 변하는 풍경이 된다. 그렇지만, 풍경들은 가후에게 명령을 내리기 전에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버린다. 근대화의 그림자는 낡은 에도 시절을 상징하는 것들을 덮치고, 심지어 도쿄 시민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주었던 나무들마저도 위태롭다. 그 자리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여기에 어울리는 서양 나무가 심어진다. 유럽에 체류한 적이 있는 가후는 도쿄마저 이국땅처럼 변하는 과정을 무척 안타까워한다. 가후가 바라보는 에도 도쿄의 무늬는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채색되어 있다. 옛것이 사라지면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어제의 꽃도 오늘은 꿈’이 되는 덧없는 세상의 이치 앞에 가후는 비애에 잠긴다.

 

여행은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느낄 수 없는 현장의 분위기를 행을 통해서 체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적은 주위 사방의 지형과 풍경을 함께 둘러보아야 그 참모습을 명쾌하게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저장용량이 많은 컴퓨터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여행의 잔상은 하나둘씩 사라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똑똑한 스마트폰으로 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저장하여 오랫동안 기억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사진으로 여행의 참모습을 찍는 순간, 아우라는 사라져버린다. 사진은 더 이상 흉내 낼 수 없는 정서적 분위기가 사라져버린 복제된 무늬에 불과할 뿐이다.

 

만약에 가후가 박쥐우산 대신에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고 상상해보자. 『히요리게다』는 텍스트만 있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텍스트와 이미지가 혼합된 ‘감상하는 책’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100년 전의 도쿄 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보인 『히요리게다』는 ‘감상하는 책’이다. 에도 도쿄의 흔적을 전혀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책 뒷부분에 부록으로 가후가 걸어 다녔던 지명을 소개한 지도와 사진이 실려 있다. 부록 덕분에 독자는 100년 전 그가 걸었던 가후의 도쿄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독자가 느끼는 일반적 감상(感想)이다. 『히요리게다』를 읽으면서 느껴야 할 진짜 감상(感想)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가후가 거리를 산책하면서 홀로 느꼈던 감상(感傷)이다. 서양식으로 변하는 도쿄를 바라보면서 느꼈을 가후의 비애감. 텍스트로 변신하고 싶은 풍경이 내린 명령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아우라다. 시간의 바람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풍경들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텍스트로 변신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기록해줘야만 한다. 이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적임자가 바로 가후다.  

 

유려한 번역문에 이를  이미지가 있다고 한들 우리는 『히요리게다』를 지배하는 슬픈 아우라를 복원할 수도 없고, 제대로 느낄 수 없다. 『히요리게다』를 감명 깊게 읽은 도쿄 사람들도 가후처럼 도쿄를 산책한다고 해서 100년 전 가후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벤야민이 말한 대로 원본에 있는 아우라를 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도 도쿄 내부에 에도 시대를 떠올릴만한 옛것이 남아 있다고 해도 수없이 지나가 버린 세월의 변화를 무시할 수 없다. 어제의 꽃은 오늘의 꿈이 되기보다는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허무하게 사라진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5-04-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겠네요^^;;;

cyrus 2015-04-24 13:07   좋아요 1 | URL
책의 목차를 직접 훑어보신 후에 구매를 결정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저는 에도 도쿄의 풍경을 묘사하는 내용이 조금은 낯설었습니다. ^^;;

수이 2015-04-23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읽기 시작해서 리뷰는 나중에 읽겠습니다. 일단 좋아요~ 꾸욱~

cyrus 2015-04-24 13:08   좋아요 0 | URL
책은 직접 읽어본 후에 좋은지 안 좋은지 판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4-24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리뷰 좋군요. 확실히 발터 벤야민`은 소설가가 되었어도 대성공했을 겁니다. 정말 아쉬운 죽음입니다.

cyrus 2015-04-24 13:11   좋아요 0 | URL
가후가 산책예찬론자라서 벤야민이 자동적으로 떠올렸습니다. 저도 벤야민의 죽음을 아쉽게 생각해요. 미국 망명이 성공했으면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완전체로 완성되었을 겁니다.

transient-guest 2015-04-24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 리뷰네요. 저는 아직 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가이 가후의 책은 그전에 묵동기담을 읽었는데, 다른 제목으로도 나와있네요.

cyrus 2015-04-24 13:14   좋아요 0 | URL
책에 대한 guest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묵동기담>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

붉은돼지 2015-04-24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도서구입 지출이 많아 이 책은 관심은 가지만 패스할려고 했는데..
..`책성애자`(ㅎㅎㅎ) 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이것도 사야할 듯 합니다. ㅎㅎㅎ

cyrus 2015-04-24 13:19   좋아요 0 | URL
책의 목차나 뒷편에 해설을 읽어보신 후에 구매를 결정하셔도 좋습니다. 가후의 글은 꾸밈이 없어서 담백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자신이 봤던 도쿄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이렇다 보니 백년 전의 도쿄 풍경을 묘사한 내용이 낯설어서 조금은 지루했어요. ^^;;

2015-04-24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4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4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5-04-2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입니다. 제목부터 <어제의 꽃이 레테의 강으로 떨어진다>니 cyrus님의 문장력이 놀랍습니다. 책에 대한 흥미를 넘어, 제가 그 감성에 젖어드네요...

cyrus 2015-04-24 14:05   좋아요 0 | URL
겉멋만 잔뜩 낸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쓴 서평보다 책이 더 좋습니다.

해피북 2015-04-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나가이 가후`라는 이름이 언급되서 이 책이 떠올랐어요 글을 읽으니 함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했는데 낯선 지명들이 자주 등장한다니 cyrus님 말씀처럼 함 살펴보고 결정해야겠어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ㅋㅡㅋ,

cyrus 2015-04-24 21:34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지만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이질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에세이 한 편 분량이 길지 않으니까 마음에 드는 글을 골라서 천천히 읽으시고 구매를 결정하셔도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