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음의 과학 - 세계적 사상가 4인의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김명주 옮김, 장대익 해제 / 김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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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적 있을 것이다. 교회 분들이 거리에서 티슈나 사탕, 팝콘 등을 나눠 주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예수 믿으세요” 하는 것을. 그 행위의 심리를 따져 볼까. 로버트 치알디니가 『설득의 심리학』에서 소개하는 ‘상호성의 원칙’에 해당하는데, 제품 홍보인 척 공짜 샘플을 나눠주면서 자연스러운 부채의식을 심어 제품 구매를 유도하는 판촉 행위와 같다. 받을 건 받고 안 믿으면 그만이라고? 이 고도의 부채 시스템은 인류 문명의 독특한 특징이다. 종교가 이 세계에 뿌리내리는데 그런 심리 공략들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나는 호의 뒤에 숨어 전도가 목적인 그분들을 향해 “용기를 갖고 무신론을 공부해 보세요”라고 늘 말하고 싶었다. 전도는 당당할 수 있는데 무신론은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무조건적인 신념을 방패로 삼고 모순적인 순환논리 속에서 종교를 모든 것에 적용하는 이와 대화는 제대로 되지도 않는다.

 

 

「종교인과 말할 때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아도 논쟁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 그레이엄 그린은 가톨릭교도가 되는 것의 가장 멋진 점은 깊은 신앙으로 내면의 불신에 도전하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크리스토퍼 히친스)

 

「우리가 신에 대한 직관력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묘한 형태의 증거라는 거죠.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점화 현상’입니다. 즉, 증거 없이 시작해도 된다고 일단 말해놓고 나면 그대로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미묘한 형태의 증거가 되고, 그러면 추가 증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경계해야 할 지적 능력의 타락, 또는 유혹이 됩니다. 이런 논리를 작동하면 자기기만의 영구운동기관을 얻게 됩니다.」(샘 해리스)

                                       

「일전에 학식이 높은 생물학자와 논쟁을 했어요. 그는 뛰어난 진화 해설자이지만 신을 믿는 사람이죠. 제가 말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비결이 뭡니까?” 그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저는 당신의 합리적인 논증 전부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런 다음에 매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했어요.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했어요. 공격적으로 들릴 정도였죠.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상대를 쓰러뜨리는 결정적 한 방이었죠. 그런 말은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니까요. 게다가 그는 그 말을 일종의 변명투가 아니라 단호하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리처드 도킨스)

 

 

비종교인조차 무신론도 하나의 종교라고 양비론으로 치부하고 공격하는데, 종교를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성역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더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곤경에 처한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 ‘네 기사’가 도착한 걸 환영한다. 원래는 삼총사였는데 마지막에 합류했던 히친스가 2011년 사망해 무신론의 훌륭한 기사를 잃은 게 안타깝다.  

이 책의 원제 『네 기사Four Horsemen』는 《성경》의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네 기사에 빗댄 말로, 기존의 무신론과 구별되는 그들을 ‘신무신론’으로 평가한 언론의 논평에서 나왔다. 2001년 911 테러 공격 이후 2004년에서 2007년 사이 나온 그들의 저서(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2004)와 『기독교 국가에게 보내는 편지』(2006),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2006)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2006),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7))는 금기시되는 종교를 과학적 관점으로 비판 분석함으로써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열기 속에 2007년 이들이 모여 자유토론을 한 것을 담은 게 이 책이다. 이들 네 기사의 과학적 회의주의 분석들로 인해 무신론자들이 주장을 펴기 훨씬 수월해졌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소수 종교인 몰몬교보다 무신론자가 대통령이 될 확률이 낮다. 종교적 이유 때문에 진화의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이 40%나 되는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선 때마다 대선 주자가 표를 얻기 위해 각 종교계를 찾아가는 게 관행인데 내겐 늘 씁쓸한 풍경이었다.

 

종교 논쟁의 핵심인 ‘신은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신자든 무신론자든 물러설 수 없는 주제이므로, 네 기사는 연결되는 차선의 문제부터 신중히 격파해나간다. “절대적이고 도전할 수 없고 영원한 권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가 모든 종교에 내재되어 있다”(히친스)는 데에 네 사람은 모두 동의한다. 이들 네 기사는 논리와 입증할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해 주장을 검증하고 합리적·경험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을 수용하자고 권유한다. 도킨스는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이 아무리 불가능하게 들린다 해도, 신학적 대안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이성의 도약을 위해 무신론적 세계관의 지적·도덕적 용기를 갖출 것을 제안한다. “과학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모르는지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담론 형태”(해리스)이다. 자신의 어려움과 구원의 버팀목으로 갖는 종교, 은유로 가득한 종교 이야기, 명백한 난센스 속에서 비합리적이고 진실하지 않은 종교적 충성을 현실의 틀로 갖는 태도야말로 정당한 이유 없는 오만이자 자만이다. 종교 전도자들과 달리 합리적 무신론자들은 “옹호하는 입장이 타당한 증거를 대야 하는 ‘입증책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결코 《성경》이나 권위 있는 선언으로 도망치지 않는다.”(데닛) “종교도 제약 산업이나 석유 산업을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기를”(데닛) 바란다. 신의 말씀을 따랐다며 온갖 불합리한 행위를 하는 이들이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자유의지를 내세울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에 따른 악과 불행의 결과도 신의 뜻과 책임으로 떠넘기면서? “신이 없을 때 우리는 희망과 위안의 진정한 원천을 발견한다. 예술, 문학, 스포츠, 철학은ㅡ다른 형태의 창의성과 묵상과 더불어ㅡ즐기는 데 무지나 거짓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학도 있다. 과학은 내적 보상 외에도, 방금 소개한 사례에서 진정한 자비를 제공할 것이다. 지카 바이러스를 물리칠 백신 또는 치료법이 마침내 발견되어 무수한 비극과 죽음을 막을 때, 신자들은 그 일에 대해 신에게 감사할까?”(해리스) 우리는 신비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혼동하지 않는 이성의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

 

노엄 촘스키는 이 세상에는 ‘문제와 ’신비‘라는 두 종류의 질문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질문이고 신비는 그렇지 않은 질문이죠. 우선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분은 인정하는데, 과학에는 신비라고 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문제, 난해한 문제가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존재해요. 어떤 것은 결코 알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개념을 미화하는 것은 과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데닛)

 

 

믿음을 옹호하는 어떤 논증이나 반론으로 생각되는 게 있느냐는 해리스의 질문에 대한 도킨스의 답변에서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신의 설계론으로 설명하게 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저는 우주 상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상적이라는 개념이 그런 상황에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빅터 스텐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물리학자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창조적 지능을 암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창조적 지능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죠. 우리를 탄생시키기 위해 우주 상수를 미세 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지적인 지능이라면, 그 자신은 훨씬 더 미세 조정되어 있어야 하고…….」(리처드 도킨스)

 

히친스는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인간의 인지부조화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필수적인 시스템인 것에 기인하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처리하기 위한 무의식의 작용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 그래서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인식론, 철학, 생물학 등에 관한 모든 논증의 토대로 간주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몇 가지 문제에서는 종교인을 설득할 수 있지만 비판을 공평하게 사방으로 펼칠 때 무신론은 난처해진다. 비이성은 언제든 돌아서기 쉽기 때문이다. 이 네 무신론자들은 종교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걸 바라는 파괴론자가 아니다. 신전과 신상과 신자들을 무참히 없애는 행위은 오히려 신자들끼리 자행해왔다. 도킨스는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도 《성경》 은 필독서라고 말한다. 크리스마스 문화나 예술, 결혼이나 장례의례에서도 종교는 유의미한 역할을 해왔다. 물질적인 것, 하찮은 것, 늘 딴 데 정신이 팔린 채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인간의 삶을 지적하고 문제를 보게 만든 것이 종교의 큰 힘이었다는 데 네 기사는 동의한다. 도킨스는 종교의 사실 문제에 집중한다면, 히친스는 달라이라마는 세습 군주이고, 헬레니즘 유대교가 메시아닉 유대교에 패배한 순간이 패악의 순간이었으며, 종교는 밈과 감염의 문제라고 생각해 종교의 해악에 더 집중한다. 종교가 인류의 살육 사건에 가장 큰 요인이었던 건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다. 최근까지도 가톨릭교회가 파시즘과 동맹하는 등 패착이 있었지만, 교황 제도처럼 하향식 통제가 불가능한 이슬람교는 지금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비이성을 허용하는 자유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경시돼온 무신론 논쟁에서 무신론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지고 있고, 지적으로는 이기고 있다”(히친스). 그러나 네 사람 다 미래를 크게 낙관하고 있지는 않다. 도킨스와 해리스는 사상의 유의미한 변화로도 무신론자들은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긍정적 입장이라면, 히친스는 “그들은 결국 문명을 파괴하고 말 겁니다”, 데닛은 “그것은 현존하는 단 하나의 재앙”이라고 탄식하며 이 논의는 끝난다.

인간의 역사에서 신앙이 힘을 가진 이념이자 권력이 된지 꽤 오래다. 네 기사가 신무신론을 논한 때보다 지금은 더 상황이 안 좋다. 각종 미디어로 인해 더 파편화된 현실 속에서 합리적 의심과 이성적 판단은 더 힘을 모으기 어려운 상황 같다. 내가 무신론을 지지하는 것은 내 합리적 판단에서 나왔다. 누군가 종교적 믿음을 갖는다면 그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소통은 그러할 때 가능할 것이다.

 

「가장 강경한 노선을 걷는 도킨스는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는 웅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주에서 초자연적인 창조자를 믿는 것은 “좀스럽고 편협하고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비주의 노선을 취하는 해리스는 이 세상에는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신중한 노선을 취하는 데닛은 교회가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몇 가지 역할을 인정하지만 교회의 관행과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단한 입담으로 카리스마를 뽐내는 히친스는 논쟁 상대로서의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 대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옮긴이의 종합 요약) 

 

 

 

이 책의 대화는 리처드 도킨스 이성과 과학 재단에서 녹화한 영상으로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n7IHU28aR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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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1-23 0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태도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이 종교의 필요조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제 자신이 신을 믿고 있지만, 종교에 대한 여러 사람의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말이 아닌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겠지요. ^^:)

AgalmA 2019-11-24 21:31   좋아요 1 | URL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감 기타 등등 종교적인 걸 받아들이는 게 심리적 요인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인격체로서 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종교를 가지게 되는 연유와 계기가 교조적 과정이 끼어 있기 때문에 더 문제적이죠. 종교를 자유와 선택의 문제처럼 얘기하지만 어떤 종교든 복종과 억압의 교리와 시스템을 강요합니다. 그것이 현실 시스템까지 조종하려는 것도 문제적이죠. 종교끼리의 파워 게임도 웃기는 일이고요.
인간이 합리적 이성체라고 할 수 없기에 합리적인 사고로 종교와 대항하자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역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의 좋은 기능 때문에 허용하자고 하기엔 핵폭탄으로 핵폭탄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소리로밖에 안 들립니다. 종교는 신의 범주가 아니라 끝없이 사람의 문제로만 남게 되겠죠.

유발 하라리가 명상을 선택한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죠.

2019-11-23 0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4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19-11-23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자유가 비이성을 허용하는 자유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공감합니다. 솔직히 종교가 추구하는 이념(사랑,자비와 같은 선)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사람들은 그러지 않으니까요.

부채의식이 싫어서인지 사탕이나 물티슈 주면서 믿으라고 하는 거 절대 안 받아요. 모르고 받았으면 쫓아가서 돌려줍니다.

AgalmA 2019-11-24 21:12   좋아요 1 | URL
합리적 이성도 인간이 만든 허상적 관념이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성이든 종교든 허점투성이로 우리 곁에 있게 되네요.
강압적인 전도가 아닌 봉사정신으로 믿음을 실천하시는 분도 많겠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한숨나는 모습이 너무나 많습니다. 종교에 대한 불신은 다른 무엇이 아닌 종교가 만들고 있다는 걸 반성해야 할 겁니다.

21세기컴맹 2019-11-24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더 확신이 필요할 때 전쟁과 우리나라의 전광 머시기 목사를 보고 존재유무를 선택했지요.
이 책 만지작거리기 전여 더 한방이 필요했는데 ...

AgalmA 2019-11-24 21:17   좋아요 1 | URL
목사들이나 스님들 혐오스러운 일도 속세 뉴스로 좀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도킨스 <만들어진 신>보다 소프트해서 무신론 관심있는 분이 가볍게 읽으시긴 좋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이 책 읽고 크리스토퍼 히친스 책이 가장 관심이 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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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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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철학을 지금 시대에 잘 접목해서 존 버거 책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이 책이 나온지도 50년이 가까워오는데 여전히 유효하고 신선한 해석으로 가득하다.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와도 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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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1-23 0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AgalmA님께서는 존 버거의 책을 읽고 계신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존 버거와 데이빗 호크니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ㅋ ^^:) 즐거운 독서 되세요!

AgalmA 2019-11-24 21:33   좋아요 1 | URL
네, 호크니 책은 진지하게 보지 못했고 다큐로 그의 철학을 좀 엿봤는데 존 버거만큼 분석적인 시선을 갖고 있더군요^^ 아아, 읽을 책이 왜이리 많죠ㅜㅜ 가끔 책과 담쌓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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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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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의 문제를 단순하게 형식주의적인 입장에서 양식상의 변화 또는 작가와 유파 사이의 영향 관계의 문제로 축소시켜 생각한다든가, 예술 또는 미학적 영역이 다른 실제적인 영역과 아무 상관없는 특수한 영역이라는 칸트의 미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미술의 영역과 그 여타의 다른 삶의 영역과의 복잡한 관계를 보다 자세하게 검토˝(옮긴이)하는 신미술사학(新美術史, New Art History)을 보여주는 존 버거.

1.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의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2.
유럽의 유화에서 누드는 보통 유럽 휴머니즘 정신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이 정신은 개인주의와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개인주의 의식이 없었다면 이렇게 누드 전통에서 대담하게 벗어난 작품(벌거벗은 몸을 그린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은 절대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누드의 전통은 그 자체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몇몇의 예술가가 이 점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그 모순을 해결하려 했지만, 그들의 해결책이 이 전통의 일반적인 요소로 인정될 수는 없었다.
이 모순은 간단하게 말해 다음과 같다. 한쪽에는 예술가, 사상가, 후원자, 소유주라는 구체적인 개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들의 활동의 대상이 되는 사물 혹은 하나의 추상적인 존재처럼 취급되는 사람, 즉 여성이 있는 것이다.
(중략)
오늘날 이 누드가 포함하고 있는 태도나 가치들은 광고, 저널리즘, 텔레비전과 같은 좀 더 다양한 미디어 속에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면 된다. 이 책에서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도 좋고 직접 그려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

3.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만약 1500년부터 1900년 사이의 유럽 미술이 자본이라는 새로운 힘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는 지배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봉사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에 대해 나는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재산과 교환 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은, 다른 시각예술이 아니라 바로 유화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4.
유화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가시적인 세계를 재현하는 일정한 관습의 특별한 체계에 의존했다. 이렇게 한데 모인 관습들을 바탕으로 화가들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액자 안에 든 유화가 세상을 향한 상상의 창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지난 사 세기 동안 생겨났던 매너리즘, 바로크,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양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화의 전통 자체가 하나의 유산으로 남긴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장은 다르다. 유럽의 유화로 대표되는 문화를 하나의 전체로 본다면, 그리고 그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제쳐 버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의 모델은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즉 가시적인 사물들을 한데 모아 저장해 둔 금고.

5.
광고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정치적 현상이다. 그러나 광고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것들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반면, 광고가 제공하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희망이 한데 모이고, 동질화되고, 단순화된다. 그렇게 모인 희망들은 정체불명이긴 하지만 강력하고, 물건을 살 때마다 반복되면서 마력적인 약속이 된다.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그와는 다른 종류의 희망이나 만족감 또는 쾌락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기대될 수 없다.
광고는 이 문화의 생명이고 —광고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광고는 이 문화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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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벤투의 스케치북 [할인]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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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째 미루고 있던 책이어서 빨리 읽고 싶고 재독하기 편해서 e book으로 샀는데요. 존 버거의 드로잉을 음미하자면 종이책 구매를 추천합니다. 그래서 e book은 별점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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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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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2.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자주 생생해진다.
왜냐하면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것을 촉발할 수 있는 더 많은 원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윤리학』 5부, 정리 13과 그 증명

3.
안톤 체호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말했다. "작가의 역할은 상황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독자가 더 이상 그 상황을 피해 갈 수 없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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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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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프 만델스탐은, 강제수용소에서 죽기 전에 이런 정확한 말을 했다. "단테에게 시간은, 동시에 단 한 번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내용이었다. 반대로 역사의 목적은, 시간을 탐색하고 정복하는 일에서 모두가 형제 혹은 동료가 되기 위해 시간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4.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드러난 것을 노출시키고 보여 주는 이야기. 나는 그 둘을 —나만의 특별하고 물리적인 의미로— 내향적 범주와 외향적 범주라고 부른다. 둘 중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좀 더 예리하게 다룰 수 있는 범주는 어느 쪽일까? 나는 첫번째라고 믿는다.
첫번째 범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 남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나눔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몸은 개인의 몸인 것만큼 사람들의 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의문은, 풀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안고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폭력이나 상실, 혹은 분노가 등장하지만, 그 이야기는 멀리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안톤 체호프가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이야기가 비결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 이야기는, 말해지기를 요구하는 이야기들을 관찰하는 일종의 렌즈를 제시한다.
삶 속의 말은, 문학 속의 말과 달리, 끊임없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 하나로 이어진 맥락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함께 전달되는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합창을 관찰하고 거기에 귀 기울이는 일. 갈등만큼이나 미리 예견할 수 없는 공통된 행동들.
웃음은 반응이 아니라 하나의 보탬이다. 스물네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이 한 세기보다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동기를 공유할 때 그것은 말보다 더 분명하다. 침묵도 손을 뻗는 것과 같아질 수 있다.(혹은, 다른 상황에서라면, 물론 잘려 버린 손이 될 수도 있다) 말이 많은 가난한 자들은 침묵에 둘러싸이고, 그런 침묵은 종종 그들을 지켜 준다. 말이 많은 부자들은 대답 없는 질문들에 둘러싸인다.

5.
그려지는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 대상의 자아 안으로 들어가려는 공생의 욕망이 있고, 동시에, 그리는 이와 대상 사이에 내재한 거리에 대한 통찰도 있다. 그런 드로잉은 은밀한 재회이면서 동시에 이별이 되려 한다! 무한히 교차하는 재회와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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