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2.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자주 생생해진다. 왜냐하면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것을 촉발할 수 있는 더 많은 원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윤리학』 5부, 정리 13과 그 증명
3. 안톤 체호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말했다. "작가의 역할은 상황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독자가 더 이상 그 상황을 피해 갈 수 없게." . . (중략) . . 오시프 만델스탐은, 강제수용소에서 죽기 전에 이런 정확한 말을 했다. "단테에게 시간은, 동시에 단 한 번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내용이었다. 반대로 역사의 목적은, 시간을 탐색하고 정복하는 일에서 모두가 형제 혹은 동료가 되기 위해 시간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4.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드러난 것을 노출시키고 보여 주는 이야기. 나는 그 둘을 —나만의 특별하고 물리적인 의미로— 내향적 범주와 외향적 범주라고 부른다. 둘 중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좀 더 예리하게 다룰 수 있는 범주는 어느 쪽일까? 나는 첫번째라고 믿는다. 첫번째 범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 남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나눔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몸은 개인의 몸인 것만큼 사람들의 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의문은, 풀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안고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폭력이나 상실, 혹은 분노가 등장하지만, 그 이야기는 멀리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안톤 체호프가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이야기가 비결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 이야기는, 말해지기를 요구하는 이야기들을 관찰하는 일종의 렌즈를 제시한다. 삶 속의 말은, 문학 속의 말과 달리, 끊임없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 하나로 이어진 맥락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함께 전달되는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합창을 관찰하고 거기에 귀 기울이는 일. 갈등만큼이나 미리 예견할 수 없는 공통된 행동들. 웃음은 반응이 아니라 하나의 보탬이다. 스물네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이 한 세기보다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동기를 공유할 때 그것은 말보다 더 분명하다. 침묵도 손을 뻗는 것과 같아질 수 있다.(혹은, 다른 상황에서라면, 물론 잘려 버린 손이 될 수도 있다) 말이 많은 가난한 자들은 침묵에 둘러싸이고, 그런 침묵은 종종 그들을 지켜 준다. 말이 많은 부자들은 대답 없는 질문들에 둘러싸인다.
5. 그려지는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 대상의 자아 안으로 들어가려는 공생의 욕망이 있고, 동시에, 그리는 이와 대상 사이에 내재한 거리에 대한 통찰도 있다. 그런 드로잉은 은밀한 재회이면서 동시에 이별이 되려 한다! 무한히 교차하는 재회와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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