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 없음의 과학 - 세계적 사상가 4인의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김명주 옮김, 장대익 해제 / 김영사 / 2019년 11월
평점 :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적 있을 것이다. 교회 분들이 거리에서 티슈나 사탕,
팝콘 등을 나눠 주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예수 믿으세요” 하는 것을. 그 행위의 심리를 따져 볼까. 로버트 치알디니가 『설득의 심리학』에서
소개하는 ‘상호성의 원칙’에 해당하는데, 제품 홍보인 척 공짜 샘플을 나눠주면서 자연스러운 부채의식을 심어 제품 구매를 유도하는 판촉 행위와
같다. 받을 건 받고 안 믿으면 그만이라고? 이 고도의 부채 시스템은 인류 문명의 독특한 특징이다. 종교가 이 세계에 뿌리내리는데 그런 심리
공략들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나는 호의 뒤에 숨어 전도가 목적인 그분들을 향해 “용기를 갖고 무신론을 공부해 보세요”라고 늘 말하고 싶었다.
전도는 당당할 수 있는데 무신론은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무조건적인 신념을 방패로 삼고 모순적인 순환논리 속에서 종교를 모든 것에
적용하는 이와 대화는 제대로 되지도 않는다.
「종교인과 말할 때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아도 논쟁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여, 저의
불신을 도와주소서.” 그레이엄 그린은 가톨릭교도가 되는 것의 가장 멋진 점은 깊은 신앙으로 내면의 불신에 도전하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크리스토퍼 히친스)
「우리가 신에 대한 직관력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묘한 형태의 증거라는 거죠.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점화 현상’입니다. 즉, 증거 없이 시작해도 된다고 일단 말해놓고 나면 그대로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미묘한 형태의 증거가
되고, 그러면 추가 증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경계해야 할 지적 능력의 타락, 또는 유혹이 됩니다. 이런 논리를 작동하면 자기기만의
영구운동기관을 얻게 됩니다.」(샘 해리스)
「일전에 학식이 높은 생물학자와 논쟁을 했어요. 그는 뛰어난 진화 해설자이지만 신을
믿는 사람이죠. 제가 말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비결이 뭡니까?” 그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저는 당신의 합리적인 논증 전부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런 다음에 매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했어요.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했어요. 공격적으로 들릴 정도였죠.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상대를 쓰러뜨리는 결정적 한
방이었죠. 그런 말은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니까요. 게다가 그는 그 말을 일종의 변명투가 아니라 단호하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리처드
도킨스)
비종교인조차 무신론도 하나의 종교라고 양비론으로 치부하고 공격하는데, 종교를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성역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더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곤경에 처한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 ‘네 기사’가 도착한 걸 환영한다. 원래는 삼총사였는데 마지막에 합류했던 히친스가 2011년 사망해 무신론의 훌륭한 기사를 잃은 게 안타깝다.
이 책의 원제 『네 기사Four Horsemen』는 《성경》의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네 기사에 빗댄 말로, 기존의 무신론과 구별되는 그들을 ‘신무신론’으로 평가한 언론의 논평에서 나왔다. 2001년 911 테러 공격 이후 2004년에서 2007년 사이 나온 그들의 저서(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2004)와 『기독교 국가에게 보내는 편지』(2006),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2006)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2006),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7))는 금기시되는 종교를 과학적 관점으로 비판 분석함으로써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열기 속에 2007년 이들이 모여 자유토론을 한 것을 담은 게 이 책이다. 이들 네 기사의 과학적 회의주의 분석들로 인해 무신론자들이 주장을 펴기 훨씬 수월해졌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소수 종교인 몰몬교보다 무신론자가 대통령이 될 확률이 낮다. 종교적 이유 때문에 진화의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이 40%나 되는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선 때마다 대선 주자가 표를 얻기 위해 각 종교계를 찾아가는 게 관행인데 내겐 늘 씁쓸한 풍경이었다.
종교 논쟁의 핵심인 ‘신은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신자든 무신론자든 물러설 수 없는
주제이므로, 네 기사는 연결되는 차선의 문제부터 신중히 격파해나간다. “절대적이고 도전할 수 없고 영원한 권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가
모든 종교에 내재되어 있다”(히친스)는 데에 네 사람은 모두 동의한다. 이들 네 기사는 논리와 입증할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해 주장을 검증하고
합리적·경험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을 수용하자고 권유한다. 도킨스는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이 아무리 불가능하게 들린다 해도,
신학적 대안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이성의 도약을 위해 무신론적 세계관의 지적·도덕적 용기를 갖출 것을 제안한다. “과학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모르는지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담론 형태”(해리스)이다. 자신의 어려움과 구원의 버팀목으로 갖는 종교, 은유로 가득한 종교 이야기, 명백한
난센스 속에서 비합리적이고 진실하지 않은 종교적 충성을 현실의 틀로 갖는 태도야말로 정당한 이유 없는 오만이자 자만이다. 종교 전도자들과 달리
합리적 무신론자들은 “옹호하는 입장이 타당한 증거를 대야 하는 ‘입증책임’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결코 《성경》이나 권위 있는 선언으로 도망치지
않는다.”(데닛) “종교도 제약 산업이나 석유 산업을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기를”(데닛) 바란다. 신의 말씀을 따랐다며 온갖 불합리한
행위를 하는 이들이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자유의지를 내세울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에 따른 악과 불행의 결과도 신의 뜻과 책임으로 떠넘기면서? “신이 없을 때
우리는 희망과 위안의 진정한 원천을 발견한다. 예술, 문학, 스포츠, 철학은ㅡ다른 형태의 창의성과 묵상과 더불어ㅡ즐기는 데 무지나 거짓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학도 있다. 과학은 내적 보상 외에도, 방금 소개한 사례에서 진정한 자비를 제공할 것이다. 지카 바이러스를 물리칠
백신 또는 치료법이 마침내 발견되어 무수한 비극과 죽음을 막을 때, 신자들은 그 일에 대해 신에게 감사할까?”(해리스) 우리는 신비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혼동하지 않는 이성의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
「노엄 촘스키는 이 세상에는 ‘문제와 ’신비‘라는 두 종류의 질문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질문이고 신비는 그렇지 않은 질문이죠. 우선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분은
인정하는데, 과학에는 신비라고 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문제, 난해한 문제가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존재해요. 어떤
것은 결코 알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개념을 미화하는
것은 과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데닛)
믿음을 옹호하는 어떤 논증이나 반론으로 생각되는 게 있느냐는 해리스의 질문에 대한
도킨스의 답변에서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신의 설계론으로 설명하게 되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저는 우주 상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상적이라는 개념이 그런 상황에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빅터 스텐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물리학자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창조적 지능을 암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창조적 지능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이죠. 우리를 탄생시키기 위해 우주 상수를 미세 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지적인 지능이라면, 그 자신은 훨씬 더 미세
조정되어 있어야 하고…….」(리처드 도킨스)
히친스는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인간의 인지부조화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필수적인
시스템인 것에 기인하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처리하기 위한 무의식의 작용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 그래서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인식론,
철학, 생물학 등에 관한 모든 논증의 토대로 간주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몇 가지 문제에서는 종교인을 설득할 수 있지만 비판을 공평하게 사방으로 펼칠 때
무신론은 난처해진다. 비이성은 언제든 돌아서기 쉽기 때문이다. 이 네 무신론자들은 종교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걸 바라는 파괴론자가 아니다.
신전과 신상과 신자들을 무참히 없애는 행위은 오히려 신자들끼리 자행해왔다. 도킨스는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도 《성경》 은 필독서라고
말한다. 크리스마스 문화나 예술, 결혼이나 장례의례에서도 종교는 유의미한 역할을 해왔다. 물질적인 것, 하찮은 것, 늘 딴 데 정신이 팔린 채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인간의 삶을 지적하고 문제를 보게 만든 것이 종교의 큰 힘이었다는 데 네 기사는 동의한다. 도킨스는 종교의 사실
문제에 집중한다면, 히친스는 달라이라마는 세습 군주이고, 헬레니즘 유대교가 메시아닉 유대교에 패배한 순간이 패악의 순간이었으며, 종교는 밈과
감염의 문제라고 생각해 종교의 해악에 더 집중한다. 종교가 인류의 살육 사건에 가장 큰 요인이었던 건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다. 최근까지도
가톨릭교회가 파시즘과 동맹하는 등 패착이 있었지만, 교황 제도처럼 하향식 통제가 불가능한 이슬람교는 지금 현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비이성을 허용하는 자유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경시돼온 무신론 논쟁에서 무신론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지고 있고, 지적으로는 이기고 있다”(히친스). 그러나 네 사람 다 미래를 크게 낙관하고 있지는 않다. 도킨스와 해리스는 사상의
유의미한 변화로도 무신론자들은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긍정적 입장이라면, 히친스는 “그들은 결국 문명을 파괴하고 말 겁니다”, 데닛은
“그것은 현존하는 단 하나의 재앙”이라고 탄식하며 이 논의는 끝난다.
인간의 역사에서 신앙이 힘을 가진 이념이자 권력이 된지 꽤 오래다. 네 기사가
신무신론을 논한 때보다 지금은 더 상황이 안 좋다. 각종 미디어로 인해 더 파편화된 현실 속에서 합리적 의심과 이성적 판단은 더 힘을 모으기
어려운 상황 같다. 내가 무신론을 지지하는 것은 내 합리적 판단에서 나왔다. 누군가 종교적 믿음을 갖는다면 그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소통은 그러할 때 가능할 것이다.
「가장 강경한 노선을 걷는 도킨스는 교회가 텅 비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는 웅대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우주에서 초자연적인 창조자를 믿는 것은 “좀스럽고 편협하고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비주의 노선을 취하는 해리스는 이 세상에는 영성과 신비를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신중한 노선을 취하는 데닛은 교회가 사회에서 맡을 수 있는 몇 가지 역할을 인정하지만 교회의 관행과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단한 입담으로 카리스마를 뽐내는 히친스는 논쟁 상대로서의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 대화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옮긴이의 종합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