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엄 - 월리스 스티븐스 시집
월리스 스티븐스 지음, 정하연 옮김 / 미행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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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월리스 스티븐스 시 전집』 을 오래전에 원서로 사놓고 시를 제대로 번역하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절감하고 좌절해서 완독을 못했죠.
제본 불량 같은 디자인, 금방 구겨지는 재질(좀 읽다 보면 표지가 휘어짐ㅜㅜ), 내가 예상한 시의 느낌을 잘 살리지 못한 듯한 번역 등 조금씩 다 아쉽지만, 월리스의 시로 유명한 작품이 많이 담긴 그의 첫 시집을 국내 첫 번역해줘서 고마워요.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동명의 장시가 담긴 『가을의 오로라』도 포함된 멋진 장정의 시 전집으로 한국에 자리가 마련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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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8-27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어요! 곧 읽을 거예요~ 저 불화하는 말들 완전 좋아요!!! 이성복의 계절입니다. 감사해요 ㅋㅋㅋㅋㅋㅋ

AgalmA 2020-08-27 13:40   좋아요 1 | URL
😃 새벽의 태풍 광휘 지나 이제 비가 내리네요. 책 읽기 좋은 날씨입니다. 책 속에서 함께 행복하니 좋네요

겨울호랑이 2020-08-27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까 받은 ‘존경‘을 2배로 돌려드립니다. ㅋㅋ 정말 시집은 어려워요 ㅠㅠ

AgalmA 2020-08-31 00:02   좋아요 1 | URL
각자 어려운 게 있으니 쌤쌤이네요ㅎㅎ
 

고대 철학은 재밌었는데, 카톨릭, 스콜라 철학 부분 나오자 지루하고 따분해서 잠시 손놨다가 근현대 철학 접어들어 주요 인물 특히 프랜시스 베이컨부터 다시 재밌어지기 시작.
홉스 설명 너무 웃겼다ㅋㅋ



현대에 이르러 제정신을 잃어버린 극단적 형태의 주관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반동이 일어났다.
첫째, 중도적 타협 철학인 자유주의 학설은 정부와 개인에게 각각 영역을 정해 주려 했다. 현대적 형태의 자유주의는 로크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로크는 절대적 권위와 전통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광신’, 다시 말해 재침례교의 개인주의도 거부한 인물이다. 더욱 철저한 저항은 국가 숭배 학설을 탄생시켜 가톨릭교가 교회에, 혹은 때에 따라 신에게 부여한 지위를 국가에 돌렸다. 홉스와 루소, 헤겔은 국가 숭배 이론의 상이한 국면을 각각 보여 주며, 그들의 학설은 실제로 크롬웰과 나폴레옹, 현대 독일의 상황 속에 구현되었다. 공산주의는 이론상 국가 숭배 이론과 거리가 멀지만, 실제로는 국가 숭배에서 비롯된 유사한 공동 사회로 빠져버린다.
기원전 600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거듭하면서, 철학자들은 사회 결속을 강화하려는 자와 풀려는 자로 나뉘었다. 다른 이들은 이러한 차이와 연루되었다. 규율주의자는 구식이든 신식이든 상관없이 특정한 교의 체계를 지지하고, 따라서 정도가 크든 작든 과학에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규율주의자들이 받아들인 교의가 어쨌든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변함없이 행복은 선이 아니며 ‘고결함’과 ‘영웅적 행동’을 선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에 공감하면서 이성이 오히려 사회 결속을 해친다고도 생각했다.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극단적 무정부주의자를 제외하면 과학적, 공리주의적, 합리적 성향을 나타냈으며 격렬한 정념에 냉담하고 심오한 종교라면 전부 반대했다. 이러한 갈등은 우리가 인정한 철학이 출현하기 전 그리스에서 생겨났으며, 그리스의 초기 사상 속에 벌써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규율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은 모습을 달리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졌고, 수세대에 걸쳐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원자론자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목적purpose이나 목적인final cause 같은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발생한 어떤 일occurrence의 ‘목적인’은 그 일이 발생시킬 미래에 일어날 사건event이다. 이러한 개념은 인간의 일상사에 적용할 수도 있다. 제빵사는 왜 빵을 굽는가? 사람들이 배가 고플 테니까. 철로를 왜 놓을까?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니까. 이러한 경우에 일어나는 사건은 그러한 사건이 이바지하는 목적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관해 ‘왜?’라고 질문할 때 둘 가운데 하나를 의미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어떤 목적에 이바지했는가?"를 뜻하거나 "이전에 주어진 어떤 조건이 이 사건을 야기했는가?"를 뜻한다. 앞 질문에 대한 답은 목적론적 설명, 혹은 목적인에 의한 설명이고, 나중 질문에 대한 답은 기계론적 설명이다. 나는 두 가지 질문 가운데 어느 쪽이 과학이 물어야 할 진일보한 질문인지, 혹은 과학이 두 가지 질문을 다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기계론적 설명이 과학적 지식의 진보를 주도한 반면에 목적론적 설명은 그렇지 못했다. 원자론자들은 기계론적 질문을 했고, 기계론적 설명을 시도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철학자들은 르네상스기가 도래할 때까지 목적론적 설명에 더욱 관심을 갖고 활동했기 때문에 과학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두 가지 질문에서 종종 무시되지만, 대중적 사고방식과 철학적 사유 둘 다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현실 전체(신을 포함하여)에 관해서 어느 쪽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질문할 수 없으며, 현실의 일부에 대해서만 질문할 수 있다. 목적론적 설명을 하다 보면 흔히 얼마 지나지 않아 조물주Creator 혹은 적어도 세계의 제작자Artificer에 이르게 되는데, 조물주의 목적이 자연의 과정 속에 실현된다고 말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집요하게 목적론적 설명을 이어가면서 조물주가 어떤 목적에 이바지하는지를 따져 묻게 되면, 그의 질문은 경건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러한 질문은 아무 의미도 없다. 질문이 이해되도록 하려면 조물주는 이전의 목적에 따라 창조에 이바지했던 초조물주가 창조했다고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적론적 설명은 현실 전체에 적용할 수 없고, 그저 현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적용될 따름이다.
기계론적 설명에도 위와 다르지 않은 논증을 펼칠 수 있다. 한 사건은 다른 사건이 야기하고, 다른 사건은 제3의 사건이 야기하는 방식으로 계속 진행된다. 그런데 우리가 인과 연쇄 전체를 야기한 원인이 무엇인지 묻게 되면, 다시금 조물주 개념에 빠져들게 되지만, 조물주 자신은 어떤 원인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과적 설명은 마음대로 정한 독단적 시초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원자들의 최초 운동을 설명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다는 점이 원자론만의 결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자론자들이 원자론을 지지하기 위해 제시한 이유들이전적으로wholly 경험에 근거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원자론은 근대에 화학과 관련된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 부활했지만, 그리스인은 화학적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고대에는 경험으로 관찰한 성과와 논리적 논증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사실 파르메니데스는 관찰된 사실을 무시하고 경멸했던 반면,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는 형이상학의 많은 부분을 물시계나 회전하는 양동이를 관찰한 결과와 연결시켰다. 소피스트들이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형이상학과 우주론은 많은 추리와 얼마 되지 않는 관찰을 결합해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 철학자는 없었던 듯하다. 원자론자들은 행운으로 2000년 이상 지나서야 증거가 발견될 가설을 적중시켜 생각해 냈지만, 당시에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순전히 철학적으로 플라톤에게 영향을 준 철학자들도 플라톤이 스파르타를 지지하기 쉽게 만들었다. 대체로 말하면 피타고라스와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크라테스를 거쳤든 거치지 않았든,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에 스며든 오르페우스교의 요소를 피타고라스로부터 이끌어 냈다. 종교적 경향과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 내세관, 사제 같은 어조, 동굴의 비유에 포함된 모든 가르침뿐만 아니라 수학을 중시하는 성향, 지성과 신비주의가 뒤섞인 특징이 피타고라스에서 유래했다.
파르메니데스로부터 현실reality이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하며, 논리적 근거에 입각해 모든 변화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이끌어 냈다.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감각 세계에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부정적 학설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부정적 학설은 파르메니데스의 학설과 결합되어, 지식은 감각에서 도출되지 않으며 오로지 지성을 통해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이것은 결국 피타고라스주의와 잘 어울린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윤리적 문제에 몰두하는 성향과 세계를 기계론이 아니라 목적론으로 설명하는 경향을 배웠을 것이다. ‘선’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보다 플라톤의 사유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어렵지 않게 소크라테스의 영향으로 귀착된다.
앞서 언급한 모든 사고방식은 어떻게 정치적 권위주의와 연결되는가?
첫째, 시간을 초월한 선성Goodness과 현실성Reality을 지닌 최선의 국가는 천상의 원형을 가장 가깝게 모사한 국가이며, 변화는 최소로 일어나고 정적인 완벽한 특징은 최대로 지녀야 하므로 영원한 선을 최대로 이해한 사람들이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신비주의자들이 모두 그렇듯 플라톤의 신념 체계 안에도 삶의 방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본질적으로 소통하기 어려운 확신이 중심에 놓여 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입회자가 지켜야 할 규칙을 세우려 노력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플라톤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유능한 정치가가 되려면, 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는 지적 훈련과 도덕적 훈련을 겸비할 경우에만 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중으로 훈련을 받지 않은 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도록 허락한다면 국가는 반드시 부패한다.
셋째, 플라톤의 원리에 따라 유능한 통치자를 길러 내려면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를 훌륭한 왕으로 만들기 위해 기하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지혜롭지 않아 보이지만,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본질적 요소였다. 그는 수학을 알지 못하면 참된 지혜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피타고라스 사상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과두정치를 암시한다.
넷째, 플라톤은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지혜를 얻으려면 여유가 필수 요소라는 견해를 지지했다. 그런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지혜를 얻기 어려우니, 남에게 의존하지 않을 만큼 재산을 소유하거나 국가의 구제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만 지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본질적으로 귀족정치의 특징이다.

플라톤과 현대 사상을 비교해 보면 두 가지 일반적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지혜’ 같은 덕이 있는가? 둘째, 지혜가 있다면 정치권력이 지혜를 실현할 정치 체제를 고안해 낼 수 있는가?
플라톤이 가정한 ‘지혜’의 의미는 구두장이나 의사나 군사 전략가가 소유하는 특수한 기술이 아닐 것이다. 지혜가 특수한 기술이 아니라 일반적인 기술이어야 하는 까닭은, 지혜를 소유함으로써 지혜롭게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플라톤이 지혜란 선에 대한 지식에서 성립한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정의를, 어느 누구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으므로 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옳은 일을 행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소크라테스의 학설로 보충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플라톤의 견해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우리는 당연히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가는 유효한 최선의 타협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 계급에 속한 구성원이나 한 나라의 국민은 공통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지만, 흔히 다른 계급이나 다른 나라의 이익과 갈등을 빚기 마련이다. 인류 전체를 위한 몇 가지 이해관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치적 행동을 유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마 인류를 위한 이해관계의 조정은 미래의 어느 날에 실현될 수도 있겠지만, 여러 주권 국가가 존재하는 한 확실히 실현될 수 없다.

수학적 증명 방법의 기원은 거의 다 그리스인에게서 시작한다.
여러 가지 유쾌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아마 역사적 근거는 없겠지만 실생활 속에서 제기된 문제가 어떻게 수학적 탐구를 자극했는지 보여 준다. 최초로 제기된 간단한 문제는 탈레스와 관계가 있는데, 그가 이집트에 머물 때 왕이 피라미드의 높이를 알아내라고 명령했다. 그는 낮 동안 자신의 그림자 길이가 키와 같아지는 때를 기다렸다. 그때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를 쟀고, 그림자의 길이는 물론 피라미드의 높이와 같았다. 원근법은 아가타르코스Agatharcos라는 기하학자가 아이스킬로스의 연극 상연에 필요한 무대 도면을 그리기 위해 처음 연구했다고 한다. 바다에 떠 있는 배까지 거리를 알아내는 문제도 탈레스가 연구했다고 전해지며, 초기 단계에 정확히 해결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톨릭 철학자들에게 최고 권위자로서 건재를 과시한다. 나는 플라톤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체한 조치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실수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홉스는 대륙 철학의 결점도, 영국 경험론의 결점도 지니지 않았다. 홉스를 빼면 경험론자이면서 수학을 강조한 철학자는 우리 세대에서나 발견된다. 이러한 면에서 홉스 철학의 장점은 실로 대단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일급 철학자의 지위에 오르기 힘든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그는 난해하거나 미묘한 문제를 다루게 되면 참을성이 부족해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 방식으로 과격하게 해결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문제 해결 방식은 논리적이었지만, 다루기 곤란한 사실을 여럿 생략해서 불완전했다. 그는 원기 왕성하지만 세련된 기교가 부족한 학자로서 예리한 쌍날칼이 아니라 무딘 전투용 도끼를 휘두른다. 그렇더라도 홉스의 국가론은 주의 깊게 고찰해 볼 만한데, 이전의 어떤 이론보다 심지어 마키아벨리의 이론보다 훨씬 근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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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8-27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의 프랜시스 베이컨 사랑은 여전하시네요^^:)

AgalmA 2020-08-31 00:01   좋아요 1 | URL
사랑하지 않습니다(_0_)! 많은 철학자 놔두고 하필 베이컨이라뇨ㅋㅋ;;
 
영웅의 여정 - 조지프 캠벨이 말하는 신화와 삶
조지프 캠벨 지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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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따지면, 지은이가 조지프 캠벨로 통칭되는 건 부적절합니다.  캠벨이 쓴 건 아니니까요. 말년까지 변변한 영상조차 없던 캠벨의 강연을 수년 간 녹화하고 편집해 1987년 영화화한《영웅의 여정》의 감독 스튜어트 L. 브라운(영화 상영 후 7개월 뒤 캠벨 사망)은 차치하더라도 그 영화 내용을 기조로 1990년부터 2004년 캠벨 100주년 기념 재간행까지 이 책에 나오는 대화와 인터뷰와 녹취록과 강연과 캠벨의 저서 인용을 취합한 필 커즈노까지 공저자로 표기되어야 합니다. 책 뒤에 보니 공저자 표기는 15명;; 캠벨의 연구를 이해하는 개론서이자 그의 전기를 읽는다 생각하면 내용은 나쁘지 않습니다.
조지프 캠벨은 비평가와 학자가 아니라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신화를 인생이라는 숭고한 모험의 반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리고 신화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는 것˝이 바람이었다고 했는데, 성공적이었다는 걸 알고 행복하게 눈 감았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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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8-27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조셉 캠벨 다시 읽고 있어요 :) 좋네요.

AgalmA 2020-08-27 13:58   좋아요 1 | URL
캠벨이나 칼 세이건 같은 저자는 글에서 인류애, 인간미가 물씬 느껴져서 좋아요. 저도 캠벨을 새삼 다시 느끼는 요즘입니다.
 

하루키 때문에 참 먼 길 간다 ㅎㅎ;;
그래서 『기나긴 이별』은 언제 읽으실 건가. 헤헤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은 없고, 로맨스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듯,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다. 물론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과 ‘고전’의 개념 사이에는 선천적인 긴장이 한 겹 깔려 있다. ‘고전’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핵심 기준이 있어서 그중 하나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필독’이다. 만약 이 분야의 아름다움을 몸소 겪고 이 분야의 최고 성취를 즐기고자 한다면 ‘필독’으로 선정된 고전은 일단 읽어야 한다. ‘고전’의 높이를 통해 우리는 취향의 기준을 세워 다른 작품을 평가하고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고전’의 두 번째 기준은 다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읽기를 통해 신선한 즐거움과 깨달음을 끝없이 찾아낼 수 있다.
두 번째 기준은 추리소설에 불리하다. 추리의 핵심은 수수께끼 그리고 수수께끼 풀이이며, 수수께끼를 풀기 전의 의혹과 추측, 수수께끼를 푼 다음에 오는 깨달음은 추리소설을 읽는 근본적인 기쁨이다.
(중략)
이 이야기는 결과를 미리 아는가 모르는가의 여부가 감상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추리 작품의 한계를 선명하게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한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준다. 추리 작품을 소개할 때에는 결말을 말해서 그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느낄 즐거움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특별한 도덕적 책임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이야기가 어째서 다른 문학 분야보다 추리소설에서 ‘고전’을 만들어 내기 어려운지 설명한다는 점이다. 수수께끼,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화려하고 복잡한 실마리, 마지막에 이르러 극적으로 수수께끼를 푸는 장면 등 추리소설이 독자를 끌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독자가 한 번 즐거움을 얻은 뒤 다시 읽으면서 그런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독자에게 다시 읽을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

추리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영어로 설명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것 같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이전에는 ‘죄’에 대한 징벌이 인간 세상의 법률이 아닌, 죽은 뒤에 하느님과 마주했을 때 받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 전통의 핵심 개념과 근본 가치인 동시에 교회를 없어서는 안 되는 기구로 존재하게 하는 토대였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고해와 참회를 하고자 했고, 이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고자 했다. 인간 세상에서의 사실 확인과 처벌은 상대적으로 다음 문제였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죽은 뒤 천당에 갈 수 있다. 죄를 지었더라도 죽기 전에 참회하고 죽은 다음 ‘연옥’에 들어가 충분한 벌을 받으면 천당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죄를 짓고도 참회하지 않으면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지고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이런 원리를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교회의 지위가 추락하고, 기독교가 여러 방면에서 의심과 공격을 받으면서 더는 숭고한 진리라는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죄’는 더 이상 개인 양심의 문제이거나, 죽은 후 천국에 가거나 또한 19세기의 유럽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친족이나 이웃과 단단한 유대를 맺지 않는 생활로 들어서면서 범죄가 발생할 여지도 늘었다. 누가 누군지 서로 잘 알고, 피차의 생활상을 훤히 아는 농촌 생활에서는 범죄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이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에 범죄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이주가 시작된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두 번째 조건인 ‘미스터리’에 대해 살펴보자. ‘미스터리’는 추리소설이 성립하는 다른 조건인 ‘there is something mysterious’(뭔가 이상하다)를 알려 준다. 추리 용어로 말하자면, 소설에는 반드시 ‘수수께끼’가 있어야 한다. 소설이 시작되면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사건의 전체 혹은 일부가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빙산’ 유형의 화자, 즉 ‘하드보일드 맨’에게 그가 본 세계를 말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독자의 마음에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강함이 있지만, 그 강함은 이 세계에 대해 우리가 가질 리 없는 한 가닥의 냉정을 가진 데서 나온다. 헤밍웨이의 펜 아래에서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맨’의 형상은 훗날 해밋과 챈들러에게 영향을 주었고, 두 사람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으며 무슨 일에든 놀라지 않는 캐릭터를 그렸다.
이 캐릭터들에게는 항상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자 집에 낯선 사람 둘이 침입해 일언반구도 없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문장 끝에는 마땅히 느낌표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장을 보면서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무서울까 상상한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렇게 쓰지 않고, 해밋이나 챈들러도 그렇게 쓰지 않으며,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게 쓰지 않는다.
그들은 주인공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 아침에 일어나니 두 사람이 마침 그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묻는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다. 물어도 답이 없으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는 답을 찾기를 포기하고 생각한다. 어쨌든 인생은 그런 거지. 아침에 일어나니 누군가 쳐들어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일이 발생하는 그런 거.
그는 놀라는 일이 없다. 우리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법한 일이 일어나도, 심지어 자기가 얻어맞아 쓰러지는 일이 있어도 그의 반응은 한결같다. ‘세상은 늘 그렇지. 항상 그래. 이런 일이 터지는 걸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어도 소용없잖아.’ 언제나 이런 태도와 말투다.

‘하드보일드 탐정’에게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사람을 매혹하는 부분은 ‘하드보일드 맨’의 모습 뒤에 숨겨진 연약함이다. ‘하드보일드 탐정’을 이해하는 방식 가운데 한 가지는 셜록 홈스와 비교하는 것이다.
첫째, 하드보일드 탐정은 홈스처럼 똑똑하지 않다. 달리 말해 보자. 그들은 19세기 과학, 과학적 방법, 과학 기술에 대한 강한 동경과 믿음 아래 만들어진 홈스와 다르다. 홈스는 우리가 모르는 일을 과학적으로 일사불란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풀어 보여 준다. 홈스라는 캐릭터 뒤에는 19세기 과학관, 즉 과학이 계속 발전하여 언젠가는 모든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홈스는 과학의 이데아를 대표하며, 과학 추리의 능력으로 안개 속을 헤치고 진상을 드러낸다.
과학은 남은 흔적으로 사건 현장을 복원할 수 있고, 현장에는 반드시 충분한 흔적이 남아 훌륭한 과학 추리와 과학 기술을 통하면 사건을 되짚어 갈 수 있다. 홈스는 완벽하며, 사실을 복원해 드러낼 수 있다. 그는 19세기 과학의 꿈을 대표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이런 조건이 없다. 그들은 베이커 거리 221B에 앉아 사건을 탐색하지 않는다. 조금도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물증을 수집하고 물건을 검사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조사하면서 수수께끼를 풀고자 동분서주한다.
둘째, 그들은 홈스처럼 범죄자보다 위에, 심지어 영국 경찰청의 경감 위에 있지 않다. 범죄를 마주하고, 사건과 관련된 누구와 마주하더라도 어떤 유리한 점을 쥔다는 보장이 없다.
사립탐정이 경찰을 만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홈스의 경우, 난제에 부딪힌 영국 경찰청의 경감이 막다른 길에 이르러 공손히 협조를 청하고, 홈스는 그들을 도와 답을 찾아낸다. 하지만 챈들러가 그리는 세계에서 경찰은 사립탐정을 막고 오도하며 이용하기도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미녀를 만나도 좋은 점이 없다. 홈스는 어떤 미녀도 만난 적이 없지만 챈들러 이전의 통속 탐정소설에서는 언제나 미녀가 나왔다. 미녀는 보통 탐정이 해결하려는 사건의 약점으로, 탐정의 매력에 굴복해 실수로 혹은 일부러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를 제공했다. 경찰은 어째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가. 그들은 탐정만큼 똑똑하지도, 용감하지도, 남자답지도, 여성을 끌어들일 만큼 매력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단 탐정이 등장하면 그는 재빨리 어떤 미녀를 정복하고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만들어 낸다.
챈들러의 말로는 운이 없다. 미녀를 정복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미녀를 만나면 일이 꼬인다.
셋째, 하드보일드 탐정 곁에는 숭배하는 마음으로 사건 해결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왓슨이 없다. 챈들러가 쓴 말로 시리즈는 모두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홈스는 하나의 현상이고 놀라운 광경이다. 우리는 왓슨의 눈을 통해 이 놀라운 광경을 우러러본다. 왓슨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특수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인데, 그 관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러러보는 앙각仰角이다. ‘하드보일드 맨’ 소설의 일인칭 시점은 우리에게 ‘하드보일드 맨’의 생명관을 통해 그의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게 하며, 나아가 우리와 세계 사이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왓슨을 통해 하나의 현상과 놀라운 광경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말로의 일인칭 서술을 읽으면서 우리는 말로의 주관과 편견을 피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그의 주관과 편견 속에서 정리된 한 덩어리의 경험, 즉 로스앤젤레스의 기이하고도 다채로운 세계다.

챈들러는 해밋을 소설 창작의 모델로 삼아 ‘해밋의 소설처럼’ 쓰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학적으로 해밋이 "진정으로 뛰어난 대작가"는 아니라고 평가하며, "이루고자 하는 일은 모두 잘해 냈지만 하지 못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챈들러가 ‘진정으로 뛰어난 대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자신이 젊은 시절 시인이 되기를 바랐던, 순문학 작품을 쓰고자 했던 꿈을 버렸기 때문이다. 해밋은 순문학 작품을 쓰지 못했고, 애초에 쓰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와 달리 챈들러는 순문학 작품을 쓰고 싶어 했지만 스스로 포기했다. 적어도 챈들러는 자기 자신과 해밋 사이의 차이를 그렇게 이해했다.

챈들러는 말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모두 일곱 권 썼고, 이 일곱 권은 하나같이 훌륭해서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나 또한 다른 수많은 이와 마찬가지로 일곱 권 가운데 『기나긴 이별』을 편애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나긴 이별』이 어째서 일곱 편의 작품 중 가장 도드라지는지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한다. 소설에서 레녹스라는 인물이 생생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레녹스는 잘생기고 우아하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지닌 데다 어두운 과거와 깊은 수수께끼를 품은 인물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특한 매력이 있지만 속에는 신비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인격에 결함이 있으나 알 수 없는 엄격한 규율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약함과 강함이 그의 내면에서 도리 없이 결합해 있다. 말로는 이런 사람에게 이끌리고 결국 어지럽고 피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전의 말로 시리즈에서는 레녹스처럼 존재감 있는 인물을 찾을 수 없다."
좀 더 간단하고 직접적인 설명으로 바꿔 보자. 『기나긴 이별』은 챈들러가 아끼지 않고 내놓은 ‘원 플러스 원’ 작품이다. 다른 말로 시리즈에서는 말로를 판다면 이 소설에서는 말로 외에도 말로만큼이나 멋진 레녹스를 얹어 준다. 레녹스의 출현은 말로를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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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8-25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늘 그렇지. 항상 그래. 이런 일이 터지는 걸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어도 소용없잖아.’ 언제나 이런 태도와 말투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기나긴 이별 내용 좋네요!

AgalmA 2020-08-25 03:37   좋아요 1 | URL
해밋, 챈들러, 기나긴 이별 내용이 넘 웃겨서 공유하기로 했죠😁😁
 

기억할 만한 지나침.

신해철 「일상으로의 초대」 오르골 받았을 때처럼 기뻐서 기념으로 남깁니다^-^

친필 사인에 크게 관심 없는데 하루키는 정말 갖고 싶었거든요.

5000권 중에 단 250권만 있었다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친필 사인본.
카리스마 넘치는 까마귀 인장이길 바랐지만 고양이 인장도 감사하죠😹

이번 사인본엔 하루키 인장이 까마귀, 고양이 얼굴, 고양이 발, 하루키 이름 중 '春' , 책 더미, Haruki Murakami 영문 이렇게 6개가 있던데요. 사인하며 인장을 어디다 찍을까 생각하는 하루키 작가 떠올리면 배시시 웃음도 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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