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때문에 참 먼 길 간다 ㅎㅎ;;
그래서 『기나긴 이별』은 언제 읽으실 건가. 헤헤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은 없고, 로맨스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듯,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다. 물론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과 ‘고전’의 개념 사이에는 선천적인 긴장이 한 겹 깔려 있다. ‘고전’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핵심 기준이 있어서 그중 하나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필독’이다. 만약 이 분야의 아름다움을 몸소 겪고 이 분야의 최고 성취를 즐기고자 한다면 ‘필독’으로 선정된 고전은 일단 읽어야 한다. ‘고전’의 높이를 통해 우리는 취향의 기준을 세워 다른 작품을 평가하고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고전’의 두 번째 기준은 다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읽기를 통해 신선한 즐거움과 깨달음을 끝없이 찾아낼 수 있다.
두 번째 기준은 추리소설에 불리하다. 추리의 핵심은 수수께끼 그리고 수수께끼 풀이이며, 수수께끼를 풀기 전의 의혹과 추측, 수수께끼를 푼 다음에 오는 깨달음은 추리소설을 읽는 근본적인 기쁨이다.
(중략)
이 이야기는 결과를 미리 아는가 모르는가의 여부가 감상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추리 작품의 한계를 선명하게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한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준다. 추리 작품을 소개할 때에는 결말을 말해서 그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느낄 즐거움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특별한 도덕적 책임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이야기가 어째서 다른 문학 분야보다 추리소설에서 ‘고전’을 만들어 내기 어려운지 설명한다는 점이다. 수수께끼,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화려하고 복잡한 실마리, 마지막에 이르러 극적으로 수수께끼를 푸는 장면 등 추리소설이 독자를 끌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독자가 한 번 즐거움을 얻은 뒤 다시 읽으면서 그런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독자에게 다시 읽을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

추리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영어로 설명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것 같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이전에는 ‘죄’에 대한 징벌이 인간 세상의 법률이 아닌, 죽은 뒤에 하느님과 마주했을 때 받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 전통의 핵심 개념과 근본 가치인 동시에 교회를 없어서는 안 되는 기구로 존재하게 하는 토대였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고해와 참회를 하고자 했고, 이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고자 했다. 인간 세상에서의 사실 확인과 처벌은 상대적으로 다음 문제였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죽은 뒤 천당에 갈 수 있다. 죄를 지었더라도 죽기 전에 참회하고 죽은 다음 ‘연옥’에 들어가 충분한 벌을 받으면 천당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죄를 짓고도 참회하지 않으면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지고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이런 원리를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교회의 지위가 추락하고, 기독교가 여러 방면에서 의심과 공격을 받으면서 더는 숭고한 진리라는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죄’는 더 이상 개인 양심의 문제이거나, 죽은 후 천국에 가거나 또한 19세기의 유럽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친족이나 이웃과 단단한 유대를 맺지 않는 생활로 들어서면서 범죄가 발생할 여지도 늘었다. 누가 누군지 서로 잘 알고, 피차의 생활상을 훤히 아는 농촌 생활에서는 범죄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이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에 범죄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이주가 시작된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두 번째 조건인 ‘미스터리’에 대해 살펴보자. ‘미스터리’는 추리소설이 성립하는 다른 조건인 ‘there is something mysterious’(뭔가 이상하다)를 알려 준다. 추리 용어로 말하자면, 소설에는 반드시 ‘수수께끼’가 있어야 한다. 소설이 시작되면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사건의 전체 혹은 일부가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빙산’ 유형의 화자, 즉 ‘하드보일드 맨’에게 그가 본 세계를 말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독자의 마음에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강함이 있지만, 그 강함은 이 세계에 대해 우리가 가질 리 없는 한 가닥의 냉정을 가진 데서 나온다. 헤밍웨이의 펜 아래에서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맨’의 형상은 훗날 해밋과 챈들러에게 영향을 주었고, 두 사람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으며 무슨 일에든 놀라지 않는 캐릭터를 그렸다.
이 캐릭터들에게는 항상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자 집에 낯선 사람 둘이 침입해 일언반구도 없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문장 끝에는 마땅히 느낌표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장을 보면서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무서울까 상상한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렇게 쓰지 않고, 해밋이나 챈들러도 그렇게 쓰지 않으며,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게 쓰지 않는다.
그들은 주인공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 아침에 일어나니 두 사람이 마침 그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묻는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다. 물어도 답이 없으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는 답을 찾기를 포기하고 생각한다. 어쨌든 인생은 그런 거지. 아침에 일어나니 누군가 쳐들어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일이 발생하는 그런 거.
그는 놀라는 일이 없다. 우리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법한 일이 일어나도, 심지어 자기가 얻어맞아 쓰러지는 일이 있어도 그의 반응은 한결같다. ‘세상은 늘 그렇지. 항상 그래. 이런 일이 터지는 걸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어도 소용없잖아.’ 언제나 이런 태도와 말투다.

‘하드보일드 탐정’에게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사람을 매혹하는 부분은 ‘하드보일드 맨’의 모습 뒤에 숨겨진 연약함이다. ‘하드보일드 탐정’을 이해하는 방식 가운데 한 가지는 셜록 홈스와 비교하는 것이다.
첫째, 하드보일드 탐정은 홈스처럼 똑똑하지 않다. 달리 말해 보자. 그들은 19세기 과학, 과학적 방법, 과학 기술에 대한 강한 동경과 믿음 아래 만들어진 홈스와 다르다. 홈스는 우리가 모르는 일을 과학적으로 일사불란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풀어 보여 준다. 홈스라는 캐릭터 뒤에는 19세기 과학관, 즉 과학이 계속 발전하여 언젠가는 모든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홈스는 과학의 이데아를 대표하며, 과학 추리의 능력으로 안개 속을 헤치고 진상을 드러낸다.
과학은 남은 흔적으로 사건 현장을 복원할 수 있고, 현장에는 반드시 충분한 흔적이 남아 훌륭한 과학 추리와 과학 기술을 통하면 사건을 되짚어 갈 수 있다. 홈스는 완벽하며, 사실을 복원해 드러낼 수 있다. 그는 19세기 과학의 꿈을 대표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이런 조건이 없다. 그들은 베이커 거리 221B에 앉아 사건을 탐색하지 않는다. 조금도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물증을 수집하고 물건을 검사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조사하면서 수수께끼를 풀고자 동분서주한다.
둘째, 그들은 홈스처럼 범죄자보다 위에, 심지어 영국 경찰청의 경감 위에 있지 않다. 범죄를 마주하고, 사건과 관련된 누구와 마주하더라도 어떤 유리한 점을 쥔다는 보장이 없다.
사립탐정이 경찰을 만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홈스의 경우, 난제에 부딪힌 영국 경찰청의 경감이 막다른 길에 이르러 공손히 협조를 청하고, 홈스는 그들을 도와 답을 찾아낸다. 하지만 챈들러가 그리는 세계에서 경찰은 사립탐정을 막고 오도하며 이용하기도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미녀를 만나도 좋은 점이 없다. 홈스는 어떤 미녀도 만난 적이 없지만 챈들러 이전의 통속 탐정소설에서는 언제나 미녀가 나왔다. 미녀는 보통 탐정이 해결하려는 사건의 약점으로, 탐정의 매력에 굴복해 실수로 혹은 일부러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를 제공했다. 경찰은 어째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가. 그들은 탐정만큼 똑똑하지도, 용감하지도, 남자답지도, 여성을 끌어들일 만큼 매력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단 탐정이 등장하면 그는 재빨리 어떤 미녀를 정복하고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만들어 낸다.
챈들러의 말로는 운이 없다. 미녀를 정복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미녀를 만나면 일이 꼬인다.
셋째, 하드보일드 탐정 곁에는 숭배하는 마음으로 사건 해결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왓슨이 없다. 챈들러가 쓴 말로 시리즈는 모두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홈스는 하나의 현상이고 놀라운 광경이다. 우리는 왓슨의 눈을 통해 이 놀라운 광경을 우러러본다. 왓슨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특수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인데, 그 관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러러보는 앙각仰角이다. ‘하드보일드 맨’ 소설의 일인칭 시점은 우리에게 ‘하드보일드 맨’의 생명관을 통해 그의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게 하며, 나아가 우리와 세계 사이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왓슨을 통해 하나의 현상과 놀라운 광경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말로의 일인칭 서술을 읽으면서 우리는 말로의 주관과 편견을 피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그의 주관과 편견 속에서 정리된 한 덩어리의 경험, 즉 로스앤젤레스의 기이하고도 다채로운 세계다.

챈들러는 해밋을 소설 창작의 모델로 삼아 ‘해밋의 소설처럼’ 쓰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학적으로 해밋이 "진정으로 뛰어난 대작가"는 아니라고 평가하며, "이루고자 하는 일은 모두 잘해 냈지만 하지 못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챈들러가 ‘진정으로 뛰어난 대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자신이 젊은 시절 시인이 되기를 바랐던, 순문학 작품을 쓰고자 했던 꿈을 버렸기 때문이다. 해밋은 순문학 작품을 쓰지 못했고, 애초에 쓰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와 달리 챈들러는 순문학 작품을 쓰고 싶어 했지만 스스로 포기했다. 적어도 챈들러는 자기 자신과 해밋 사이의 차이를 그렇게 이해했다.

챈들러는 말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모두 일곱 권 썼고, 이 일곱 권은 하나같이 훌륭해서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나 또한 다른 수많은 이와 마찬가지로 일곱 권 가운데 『기나긴 이별』을 편애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나긴 이별』이 어째서 일곱 편의 작품 중 가장 도드라지는지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한다. 소설에서 레녹스라는 인물이 생생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레녹스는 잘생기고 우아하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지닌 데다 어두운 과거와 깊은 수수께끼를 품은 인물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특한 매력이 있지만 속에는 신비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인격에 결함이 있으나 알 수 없는 엄격한 규율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약함과 강함이 그의 내면에서 도리 없이 결합해 있다. 말로는 이런 사람에게 이끌리고 결국 어지럽고 피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전의 말로 시리즈에서는 레녹스처럼 존재감 있는 인물을 찾을 수 없다."
좀 더 간단하고 직접적인 설명으로 바꿔 보자. 『기나긴 이별』은 챈들러가 아끼지 않고 내놓은 ‘원 플러스 원’ 작품이다. 다른 말로 시리즈에서는 말로를 판다면 이 소설에서는 말로 외에도 말로만큼이나 멋진 레녹스를 얹어 준다. 레녹스의 출현은 말로를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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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8-25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늘 그렇지. 항상 그래. 이런 일이 터지는 걸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어도 소용없잖아.’ 언제나 이런 태도와 말투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기나긴 이별 내용 좋네요!

AgalmA 2020-08-25 03:37   좋아요 1 | URL
해밋, 챈들러, 기나긴 이별 내용이 넘 웃겨서 공유하기로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