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이전에 에리히 프롬이 적확히 지적했다. 그 이전엔 또 누가?

1.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발성을 통제되지 않은 충동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지만 자발성과 자발적 활동은 자유와 자기 존재의 특징이다.

2.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인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한다. 프랑스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전략과 전술로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세대 혹은 지난 세기의 윤리 문제를 되돌아보고 과거의 악덕과 죄를 바라보며 우리가 이 악덕과 죄를 뛰어넘어서 기쁘다고 단언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윤리 문제도 대부분 해결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지금도 과거와 모습만 다를 뿐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윤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

19세기의 악덕은 무엇이었을까? 첫째가 권위주의, 즉 맹목적 복종의 요구이다. 특히 아이들, 여성, 노동자들에게 권위의 명령에 고민하거나 질문을 제기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라고 요구하였다. 불복종은 그 자체가 죄였다.

두 번째 악덕은 착취, 정확히 말해 야만적인 착취다. 우리는 19세기 직전까지도 상류층의 신사 숙녀들이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고 콩고의 흑인들을 거리낌 없이 착취하였으며,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어린아이들을 공장에서 부려먹었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란다. 이러한 19세기의 윤리 문제와 악덕은 거의 잊고 살았기에 되돌아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19세기의 세 번째 악덕은 성과 인종차별이다. 모두들 이런 불평등에 확실한 근거가 있고 신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에 신의 말씀과 인간 차별 사이에 존재하는 확연한 모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세기의 네 번째 악덕은 탐욕과 축재다. 중산층에게는 저축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아끼고 절약하여 돈을 모으고 절대 쓰지 않으면 부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덕목으로 꼽히지 않지만 19세기에는 덕목이었다.

19세기의 마지막 악덕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이다. 전형적인 사례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관련한 프로이트의 말이다.

"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어떻게 그 요구를 달성할 것인가? … 내 가족은 모두 내 사랑을 자기들을 좋아한다는 증거로 알고 소중히 여기는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내 가족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이다."

프로이트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어도 절감하던 사실을 용감하게 발설하였다. "나의 집은 나의 성이다. 나는 나다. 낯선 이여! 조심해라!"

3.
일단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합리적 권위는 항상 공포와 감정적 복종에 바탕을 둔 압력 행사를 동반한다. 전제 국가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맹목적 복종의 권위이다. 이에 반하는 합리적 권위도 있다. 합리적 권위는 능력과 지식에 근거하며 비판을 허용하고, 그 본질상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복종과 마조히즘 같은 감정적 요인보다는 직업 능력처럼 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인정에 바탕을 둔 모든 종류의 권위를 말한다.
능력 있는 의사를 찾아갈 경우에 나는 그의 합리적 권위를 인정한다. 그가 자기 분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의 처방에 따라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시작되고 전혀 다른 기능과 결과를 낳는 비합리적 권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권위이다.
또 한 가지, 공개적으로 행사하는 권위와 익명의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둘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개적 권위란 예를 들어 아버지가 조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마라.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도 알잖니." 익명의 권위는 엄마가 조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엄마는 네가 그걸 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단다." 조니는 엄마의 목소리 톤에서 엄마가 무엇을 원하고 원치 않는지를 알아차린다. 조니는 엄마의 슬픔, 절망, 공포 등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 때문에 엄마가 암묵적으로 그에게 암시한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흠씬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첫 번째의 권위는 공개적이고 솔직하다. 두 번째의 권위는 익명이다. 관용과 양보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게임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무조건 공개적 권위를 택해야 한다. 그래야 권위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저항했다. 공개적 권위는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익명의 권위는 난공불락의 철벽이며 배후에서 작용하기에 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게임 규칙은 드러나 있지 않아서 감으로 느끼지만 확신할 근거는 없다. 19세기와 현대는 바로 이런 두 가지 종류의 권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익명의 권위는 어떤 모습일까? 익명의 권위는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소망, 무리에서 벗어나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우리는 착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주 많이 변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 마땅하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19세기에 존재하던 의미의 착취가 실제로 끝났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뿐 아니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야만적인 착취의 대상이던 식민지 주민들과 관련해서도 착취는 끝이 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질적 형태의 착취는 아직 완전히 사라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감소 추세로 미루어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4.
프랑스어 이름 — ennui, malaise, la maladie du siècle(세기의 질병) — 은 이미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프랑스인들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중략)
무엇을 질병으로 불러도 되는지를 주입당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분해서 죽겠다고, 삶이 무의미해서 죽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불면에 시달린다고, 아내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할 수 없어 괴롭다고, 술을 마시고 싶어 미치겠다고, 직장이 불만스럽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허용되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질병의 표현 형태로 가능한 온갖 것들을 들먹인다.
그럼에도 불면과 음주와 직장에 대한 불만 토로는 세기의 질병의 다양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

5.
이제 불평등이라는 세 번째 악덕과 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몇 세대만 지나면 미국의 인종차별은 완전히 철폐될 것이다. 성차별 역시 철폐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차별이 등장하겠지만 10년 전에 남편이 아내에게 당연히 요구하던 것들을 지금은 어떤 남편도 아내에게 요구할 수 없다. 오늘날의 공장에 10년 전만 해도 당연했던 말투와 대우로 노동자들을 대하는 공장장은 없다. 이런 의미의 차별은 실제로 폐지되었고, 그런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달성한 동등권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평등은 이런 종류의 동등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등의 개념은 계몽주의 철학에서 절대주의 국가에 저항하며 발전하였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대로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에서 서로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계몽주의 철학과 인문주의에서 말하는 평등의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평등을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같다는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요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비획일주의자들에게 넓은 여지를 허용하는 것이 미국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비획일주의자들에게 일부러 높은 자리를 마련해주지는 않더라도 풍부한 활동의 여지는 주어진다. 이들이 감옥에 갈 위험도, 굶어죽을 위험도 없다. 그럼에도 타인과 같아지려는 경향은 사회적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의 확신,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타인들과 순응하지 못하면 끔찍한 고독이 닥칠 것이며 집단에서 추방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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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작품인데도 퇴색되지 않는 인간 심리 묘사, 스토리 구성.
👍👍👍👍👍

"나만도...
초능력자들만도 아니었다.
이 사람들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럼 이 도시에 사는
정상인이란
대체 뭔가."

ㅡ노말시티 5권

"마음에는...

내가 가진 초능력 같은 거
아무런 힘이 되질 못하는 걸..."

ㅡ노말시티 6권


"이 세계엔 더 이상 자연적인 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실망했었지.

이제 자연적인 건
그저 인간 정도일까.

그리고 그 인간마저...나
자신을 보면 더 이상 자연은
없다고 느껴졌어..."

ㅡ노말시티 6권

"이샤
사랑이란 건 상호적인 거 같으면서도
결국 일방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나의 감정일 뿐이고
그녀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 역시 그녀의 감정일 뿐

그게 서로 좋아하면 상호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일방적인 자기 감정으로만 남는다는 것을...
알겠어?"
ㅡ노말시티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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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영화 <메멘토>와 흡사한데,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한다면 ‘나‘란 존재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과 나를 판단하기 어려운 요즘의 인간 상황이 이렇다.

8.
섬망이 지나간 후, 그 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어떤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상실이었을까. 잠깐이나마 경험했던 평범한 삶으로부터 추방된 것?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것? 실제로 갖지도 않았던 것에 대해서 느끼는 이 상실감은 기묘하다. 그저 마취약의 효과로 인해 빚어진 착란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의 뇌는 그것을 구별할 수가 없단 말인가. 그런데 꿈속에서 경찰이 나를 체포하던 순간에 내가 느낀 안도감 또한 곱씹을 만하다. 그것은 오랜 여행 끝에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본 인간이 마침내 낡고 추레한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낄 법한 감정이다. 나는 도시락과 사무실의 세계가 아닌 피와 수갑의 세계에 속해 있는 인간이다.

9.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직 딱 한 가지에만 능했는데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긍심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

10.
작곡가가 악보를 남기는 까닭은 훗날 그 곡을 다시 연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의 머릿속은 온통 불꽃놀이겠지. 그 와중에 침착하게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콘 푸오코con fuoco—불같이, 열정적으로—같은 악상기호를 꼼꼼히 적어넣는 차분함에는 어딘가 희극적인 구석이 있다. 예술가의 내면에 마련된 옹색한 사무원의 자리. 필요하겠지. 그래야 곡도, 작곡가도 후대에 전해질 테니까.
악보를 남기지 않는 작곡가도 어딘가엔 있겠지. 절륜한 무예를 아무에게도 전수하지 않고 제 몸 하나 지키다 죽은 강호의 고수도 있었을 것이다. 희생자의 피로 쓴 시, 감식반이 현장이라고 부르는 나의 시들은 경찰서 캐비닛에 묻혀 있고.

11.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엔 별들이 찬란하다. 다음 생에는 천문학자나 등대지기로 태어나고 싶다. 돌이켜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12.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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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1.
연쇄살인범도 해결할 수 없는 일: 여중생의 왕따.


2.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3.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 가지: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

4.
그런데 나는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이후 살인에 흥미를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20여 년을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충동 없는 살인, 필요에 의한 살인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신은 나에게 내가 저지른 악행의 신성을 스스로 진부하게 만들 것을 명령하고 있다.

5.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박주태가 은희를 죽이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6.
모든 것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글로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면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 녹음했다고 생각한 말이 글로 적혀 있다. 그 반대도 있다. 기억과 기록, 망상이 구별이 잘 안 된다.

7.
몇 년 전, 치과에 갔다가 몰입의 즐거움 어쩌고 하는 책이 있기에 대충 읽었다. 저자는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다. 이보게, 저자 양반, 나 어릴 때만 해도 아이가 하나에만 몰입하면 어른들이 걱정을 했다네. 애가 외골수라며. 그때는 오직 미친 사람들만 한 가지에 몰입을 했지. 오래전의 내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골몰하며 얼마나 깊이 몰입했는지, 거기에서 얼마나 큰 즐거움을 얻었는지를 당신이 안다면, 몰입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안다면, 그 입을 다물 거야. 몰입은 위험한 거야. 그래서 즐거운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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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웃음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대단한 학식인양 인용하는 사람이 있는지. 동물을 ‘영혼 없는 기계‘로 본 데카르트나 ‘얼빠진 상태‘로 본 하이데거도 대책없이 자기 도취적인 인간 중심주의 관점인 건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다윈도 수세에 몰릴 정도였으니 뭐.
행동 심리학자 스키너에게도 비우호적인 저자 프란스 드 발은 동물을 통해 우리 생물이 얼마나 유사한지 말하는데, 합리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이라고 생각했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아직도 즐거워서 혹은 무엇이 재미있어서 웃는 동물이 있다는 주장을 의심한다. 하지만 유인원이 슬랩스틱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아마도 가벼운 신체적 사고 장면 때문에 그럴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걸어오다가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면, 유인원은 처음에는 염려하여 긴장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 사람이 멀쩡한 것으로 드러나면 분명한 안도감을 드러내며 웃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과 같다. 흑표범 가면을 쓴 사람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마가 웃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한 적이 있다. 보노보에게서도 비슷한 반응을 볼 수 있다.

만약 주변에 있는 남들이 비명을 지르고 낑낑거린다면,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거기서 벗어나는 게 현명한 행동이다. 고통의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고음의 비명이 귀를 찢는다면, 논리적으로 당연한 행동은 귀를 막거나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동물들은 정반대 행동을 한다. 가까이 다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하는데, 심지어 고통의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할 때조차도 그런 행동을 보인다. 이것은 남의 감정 상태에 관한 관심이다. 생쥐와 원숭이를 비롯해 많은 동물들이 곤경에 빠진 동물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행동은 이기적인 시나리오와 들어맞지 않으며, 1970년대와 190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사회생물학 이론들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증명한다.
자연을 서로 먹고 먹히는 살벌한 장소로 묘사하는 사회생물학 이론들에서는 모든 행동을 이기적 유전자로 설명했고,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경향을 ‘약육강식의 법칙’ 탓으로 돌렸다. 진정한 친절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위험을 무시하면서까지 남을 도울 만큼 어리석은 동물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행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신기루 아니면 ‘오작동’ 유전자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타주의자를 할퀴면, 피를 흘리는 위선자를 보게 될 것이다."(Michael Ghiselin,1974)라는 표현은 그 시대의 정신을 잘 요약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면서 반복적으로 인용했다. 이 표현은 이타주의는 가짜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이 표현은 동정심 넘치는 낭만주의자와 희망에 부푼 사상가를 묵살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순진하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었다. 우연치 않게도 이 시대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뿐만 아니라 고든 게코Gordon Gekko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화 <월스트리트Wall Street>에 나오는 인물로, 세상을 굴러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탐욕이라고 믿었다. 사람을 포함한 사회적 동물들이 자연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방식과 명백하게 어긋나는데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개념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받들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이기적 유전자’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들리지 않는다. 행동은 언제나 이기적이라는 개념은 새로 쏟아져나온 데이터에 파묻혀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과학은 협력이, 적어도 내집단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우리 종의 가장 중요한 성향임을 확인해주었다.

우리의 태도는 상황에 따라 변하여,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동물인 동시에 가장 잔인한 동물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데, 배려와 잔인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3세기에 카르타고의 초기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천국에 대해 아주 특이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지옥은 고문이 자행되는 장소인 반면,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지옥을 구경할 수 있는 발코니이며, 그들은 그곳에서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 속에서 타는 모습을 보면서 즐긴다고 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받는 것보다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을 더 힘들어한다. 내게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발코니가 지옥만큼이나 아주 불쾌한 곳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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