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이전에 에리히 프롬이 적확히 지적했다. 그 이전엔 또 누가?

1.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발성을 통제되지 않은 충동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지만 자발성과 자발적 활동은 자유와 자기 존재의 특징이다.

2.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인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한다. 프랑스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전략과 전술로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세대 혹은 지난 세기의 윤리 문제를 되돌아보고 과거의 악덕과 죄를 바라보며 우리가 이 악덕과 죄를 뛰어넘어서 기쁘다고 단언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윤리 문제도 대부분 해결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지금도 과거와 모습만 다를 뿐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윤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

19세기의 악덕은 무엇이었을까? 첫째가 권위주의, 즉 맹목적 복종의 요구이다. 특히 아이들, 여성, 노동자들에게 권위의 명령에 고민하거나 질문을 제기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라고 요구하였다. 불복종은 그 자체가 죄였다.

두 번째 악덕은 착취, 정확히 말해 야만적인 착취다. 우리는 19세기 직전까지도 상류층의 신사 숙녀들이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고 콩고의 흑인들을 거리낌 없이 착취하였으며,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어린아이들을 공장에서 부려먹었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란다. 이러한 19세기의 윤리 문제와 악덕은 거의 잊고 살았기에 되돌아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19세기의 세 번째 악덕은 성과 인종차별이다. 모두들 이런 불평등에 확실한 근거가 있고 신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에 신의 말씀과 인간 차별 사이에 존재하는 확연한 모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세기의 네 번째 악덕은 탐욕과 축재다. 중산층에게는 저축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아끼고 절약하여 돈을 모으고 절대 쓰지 않으면 부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덕목으로 꼽히지 않지만 19세기에는 덕목이었다.

19세기의 마지막 악덕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이다. 전형적인 사례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관련한 프로이트의 말이다.

"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어떻게 그 요구를 달성할 것인가? … 내 가족은 모두 내 사랑을 자기들을 좋아한다는 증거로 알고 소중히 여기는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내 가족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이다."

프로이트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어도 절감하던 사실을 용감하게 발설하였다. "나의 집은 나의 성이다. 나는 나다. 낯선 이여! 조심해라!"

3.
일단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합리적 권위는 항상 공포와 감정적 복종에 바탕을 둔 압력 행사를 동반한다. 전제 국가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맹목적 복종의 권위이다. 이에 반하는 합리적 권위도 있다. 합리적 권위는 능력과 지식에 근거하며 비판을 허용하고, 그 본질상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복종과 마조히즘 같은 감정적 요인보다는 직업 능력처럼 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인정에 바탕을 둔 모든 종류의 권위를 말한다.
능력 있는 의사를 찾아갈 경우에 나는 그의 합리적 권위를 인정한다. 그가 자기 분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의 처방에 따라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시작되고 전혀 다른 기능과 결과를 낳는 비합리적 권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권위이다.
또 한 가지, 공개적으로 행사하는 권위와 익명의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둘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개적 권위란 예를 들어 아버지가 조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마라.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도 알잖니." 익명의 권위는 엄마가 조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엄마는 네가 그걸 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단다." 조니는 엄마의 목소리 톤에서 엄마가 무엇을 원하고 원치 않는지를 알아차린다. 조니는 엄마의 슬픔, 절망, 공포 등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 때문에 엄마가 암묵적으로 그에게 암시한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흠씬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첫 번째의 권위는 공개적이고 솔직하다. 두 번째의 권위는 익명이다. 관용과 양보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게임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무조건 공개적 권위를 택해야 한다. 그래야 권위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저항했다. 공개적 권위는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익명의 권위는 난공불락의 철벽이며 배후에서 작용하기에 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게임 규칙은 드러나 있지 않아서 감으로 느끼지만 확신할 근거는 없다. 19세기와 현대는 바로 이런 두 가지 종류의 권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익명의 권위는 어떤 모습일까? 익명의 권위는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소망, 무리에서 벗어나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우리는 착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주 많이 변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 마땅하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19세기에 존재하던 의미의 착취가 실제로 끝났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뿐 아니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야만적인 착취의 대상이던 식민지 주민들과 관련해서도 착취는 끝이 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질적 형태의 착취는 아직 완전히 사라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감소 추세로 미루어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4.
프랑스어 이름 — ennui, malaise, la maladie du siècle(세기의 질병) — 은 이미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프랑스인들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중략)
무엇을 질병으로 불러도 되는지를 주입당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분해서 죽겠다고, 삶이 무의미해서 죽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불면에 시달린다고, 아내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할 수 없어 괴롭다고, 술을 마시고 싶어 미치겠다고, 직장이 불만스럽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허용되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질병의 표현 형태로 가능한 온갖 것들을 들먹인다.
그럼에도 불면과 음주와 직장에 대한 불만 토로는 세기의 질병의 다양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

5.
이제 불평등이라는 세 번째 악덕과 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몇 세대만 지나면 미국의 인종차별은 완전히 철폐될 것이다. 성차별 역시 철폐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차별이 등장하겠지만 10년 전에 남편이 아내에게 당연히 요구하던 것들을 지금은 어떤 남편도 아내에게 요구할 수 없다. 오늘날의 공장에 10년 전만 해도 당연했던 말투와 대우로 노동자들을 대하는 공장장은 없다. 이런 의미의 차별은 실제로 폐지되었고, 그런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달성한 동등권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평등은 이런 종류의 동등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등의 개념은 계몽주의 철학에서 절대주의 국가에 저항하며 발전하였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대로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에서 서로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계몽주의 철학과 인문주의에서 말하는 평등의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평등을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같다는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요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비획일주의자들에게 넓은 여지를 허용하는 것이 미국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비획일주의자들에게 일부러 높은 자리를 마련해주지는 않더라도 풍부한 활동의 여지는 주어진다. 이들이 감옥에 갈 위험도, 굶어죽을 위험도 없다. 그럼에도 타인과 같아지려는 경향은 사회적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의 확신,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타인들과 순응하지 못하면 끔찍한 고독이 닥칠 것이며 집단에서 추방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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