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웃음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대단한 학식인양 인용하는 사람이 있는지. 동물을 ‘영혼 없는 기계‘로 본 데카르트나 ‘얼빠진 상태‘로 본 하이데거도 대책없이 자기 도취적인 인간 중심주의 관점인 건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다윈도 수세에 몰릴 정도였으니 뭐.
행동 심리학자 스키너에게도 비우호적인 저자 프란스 드 발은 동물을 통해 우리 생물이 얼마나 유사한지 말하는데, 합리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이라고 생각했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아직도 즐거워서 혹은 무엇이 재미있어서 웃는 동물이 있다는 주장을 의심한다. 하지만 유인원이 슬랩스틱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아마도 가벼운 신체적 사고 장면 때문에 그럴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걸어오다가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면, 유인원은 처음에는 염려하여 긴장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 사람이 멀쩡한 것으로 드러나면 분명한 안도감을 드러내며 웃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과 같다. 흑표범 가면을 쓴 사람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마가 웃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한 적이 있다. 보노보에게서도 비슷한 반응을 볼 수 있다.
만약 주변에 있는 남들이 비명을 지르고 낑낑거린다면,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거기서 벗어나는 게 현명한 행동이다. 고통의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고음의 비명이 귀를 찢는다면, 논리적으로 당연한 행동은 귀를 막거나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동물들은 정반대 행동을 한다. 가까이 다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하는데, 심지어 고통의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할 때조차도 그런 행동을 보인다. 이것은 남의 감정 상태에 관한 관심이다. 생쥐와 원숭이를 비롯해 많은 동물들이 곤경에 빠진 동물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행동은 이기적인 시나리오와 들어맞지 않으며, 1970년대와 190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사회생물학 이론들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증명한다. 자연을 서로 먹고 먹히는 살벌한 장소로 묘사하는 사회생물학 이론들에서는 모든 행동을 이기적 유전자로 설명했고,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경향을 ‘약육강식의 법칙’ 탓으로 돌렸다. 진정한 친절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위험을 무시하면서까지 남을 도울 만큼 어리석은 동물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행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신기루 아니면 ‘오작동’ 유전자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타주의자를 할퀴면, 피를 흘리는 위선자를 보게 될 것이다."(Michael Ghiselin,1974)라는 표현은 그 시대의 정신을 잘 요약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면서 반복적으로 인용했다. 이 표현은 이타주의는 가짜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이 표현은 동정심 넘치는 낭만주의자와 희망에 부푼 사상가를 묵살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순진하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었다. 우연치 않게도 이 시대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뿐만 아니라 고든 게코Gordon Gekko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화 <월스트리트Wall Street>에 나오는 인물로, 세상을 굴러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탐욕이라고 믿었다. 사람을 포함한 사회적 동물들이 자연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방식과 명백하게 어긋나는데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개념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받들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이기적 유전자’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들리지 않는다. 행동은 언제나 이기적이라는 개념은 새로 쏟아져나온 데이터에 파묻혀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과학은 협력이, 적어도 내집단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우리 종의 가장 중요한 성향임을 확인해주었다.
우리의 태도는 상황에 따라 변하여,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동물인 동시에 가장 잔인한 동물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데, 배려와 잔인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3세기에 카르타고의 초기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천국에 대해 아주 특이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지옥은 고문이 자행되는 장소인 반면,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지옥을 구경할 수 있는 발코니이며, 그들은 그곳에서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 속에서 타는 모습을 보면서 즐긴다고 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받는 것보다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을 더 힘들어한다. 내게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발코니가 지옥만큼이나 아주 불쾌한 곳으로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