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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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멘토>와 흡사한데,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한다면 ‘나‘란 존재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과 나를 판단하기 어려운 요즘의 인간 상황이 이렇다.

8.
섬망이 지나간 후, 그 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어떤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상실이었을까. 잠깐이나마 경험했던 평범한 삶으로부터 추방된 것?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것? 실제로 갖지도 않았던 것에 대해서 느끼는 이 상실감은 기묘하다. 그저 마취약의 효과로 인해 빚어진 착란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의 뇌는 그것을 구별할 수가 없단 말인가. 그런데 꿈속에서 경찰이 나를 체포하던 순간에 내가 느낀 안도감 또한 곱씹을 만하다. 그것은 오랜 여행 끝에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본 인간이 마침내 낡고 추레한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낄 법한 감정이다. 나는 도시락과 사무실의 세계가 아닌 피와 수갑의 세계에 속해 있는 인간이다.

9.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직 딱 한 가지에만 능했는데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긍심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

10.
작곡가가 악보를 남기는 까닭은 훗날 그 곡을 다시 연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의 머릿속은 온통 불꽃놀이겠지. 그 와중에 침착하게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콘 푸오코con fuoco—불같이, 열정적으로—같은 악상기호를 꼼꼼히 적어넣는 차분함에는 어딘가 희극적인 구석이 있다. 예술가의 내면에 마련된 옹색한 사무원의 자리. 필요하겠지. 그래야 곡도, 작곡가도 후대에 전해질 테니까.
악보를 남기지 않는 작곡가도 어딘가엔 있겠지. 절륜한 무예를 아무에게도 전수하지 않고 제 몸 하나 지키다 죽은 강호의 고수도 있었을 것이다. 희생자의 피로 쓴 시, 감식반이 현장이라고 부르는 나의 시들은 경찰서 캐비닛에 묻혀 있고.

11.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엔 별들이 찬란하다. 다음 생에는 천문학자나 등대지기로 태어나고 싶다. 돌이켜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12.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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