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바시르와 왈츠를 - 초회한정 커피북
아리 폴만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지구종말까지 해결되지 않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에 대한 증언적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잊힌 기억(드러내고 싶고 행하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로 숨고 싶고 잊고 싶은 우리 무의식)처럼 우리도 가해자이자 공범처럼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나치스에 항거하지 않았던 이들처럼.

만화가 서늘함을 유지하며 완성도를 높이긴 힘든데, 실사에서보다 관객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연출에서 타협에 빠지기 쉽고 결국 전체 완성도가 무너져서 그렇다(연출 실력이 중요해지는 지점). 좋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은 끝까지 그 흐름을 사수한다.
스토리가 무겁기도 하지만 저 노란 포화 색감과 시퀀스, 악몽처럼 조율을 참 잘했다(실제가 더 악몽같아서).
첫 장면은 실사보다 더 공포스럽다. 무서운 첫장면 베스트 10에 넣어도 손색없는 장면.
낙원같은 올리브 숲속에서 소년과 총구로 겨누던 순간, 도로를 사이에 둔 깨질 듯한 침묵의 대결, 살아남기 위한 헐떡거림, 풍선처럼 터지는 머리통, 좀비 세계를 체감케 하는 빈 장소들 .... 만화이기에 더 리얼할 수 있었던 많은 장면들, 괴로워도 잊히는 게 뼈아픈 존재론적 순간들.
공각기동대만큼이나 서늘하고 건조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웬만한 반전영화 뺨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구에서 전쟁을 결코 몰아내지 못한다. 내 죽음만큼 확실하다. 이 모든 불행들을 목격하며 우리는 세계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만 정작 제 기억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있잖은가. 정복할 수 없는 타인과 내 욕망, 이해할 수 없는 외부와 내 이성을, 죽는 순간까지 느끼는 한 이 불화들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 이 불가능들에 대한 기록 자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지도, 최소한 무관심은 되지 않도록.

 

ㅡAgal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먼지아이
정유미 글.그림 / 컬쳐플랫폼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애니메이션과 동화 제작에 있어 한국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곧바로 실패 요인이 된다.
시간 정서를 조율하는 mind. 기술적으로 말하면 연출과 편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의 중추는 extra mind다. 미국, 일본, 유럽, 중국 각 나라마다 독특한 시간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특징이 된다(직접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영화도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라. 디즈니의 유연한 움직임이 주는 실제성, 픽사의 아이디어가 캐릭터와 만나는 모험들, 일본의 빠른 액션과 실사에 가까운 배경묘사와 멋진 효과들, 유럽의 성찰적 시퀀스들, 고전 중국 애니들에서 느껴지는 신화적인 멋. 현재 서로 장점들을 밴치마킹해 상호투합하고 있지만 자신의 특장들은 놓치지 않는다.
한국의 문제점은 우리가 늘 말하는 소프트웨어, extra mind의 부재다. 한국 애니와 동화들은 비슷비슷하고 늘 해외 어디서 본 기시감을 준다. 환원주의, 사대주의 관점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 웹툰에서 그나마 한국적 특장들을 보게 되는데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현재 흥행하고 있는 한국 애니계나 동화의 성공요인은 아이디어를 우겨넣은(그렇다고 썩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는, 어디서 본 듯한, 미심쩍은) 스토리와 (팔고 싶은 게 노골적이게 티가 나는) 캐릭터의 승부수지 자신만의 시간성은 없다. 반짝 성공한 상품은 있으되 작품은 없다. 대박만을 노리고 시장 경제에 무한히 휘둘리는 한 이 상황의 돌파구는 없다. 특히나 거대자본이 필요한 애니계는 서태지 세트가 와도 어려울 것이다.

먼지아이는 한국의 현재적 정서를 담은 독특한 시간성을 담고 있다. 해외수상작이나 돼야 잠깐 주목받을까 한국에선 이런 작품을 계속 인디적 시각으로만 평가될 것이다. 이 기조는 다시 문화속에 자리잡고 우리의 문화관습화되어 그 속에서 아이들이 또 자란다. 세태를 비웃지만 우리가 과거에 이 문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일조했다는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작품 속에서 시간을 제대로 못 다루는 것만큼이나 우린 작품을 제대로 볼 시간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야 좋은 작품이면 보게 만든다는 것도 한국대중정서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꼴이...
창작에서 작가 개인의 무한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 단순히 이 시대에만 국한된 건 아니지만 결국은 착찹한 심경이 되고 만다.

ㅡAgal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증기선이 산으로 끌어올려지고 있고 한 남자가 마주 바라보고 있는 <피츠카랄도> 포스터는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컷이다. 피카소 <게르니카>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처럼 뇌리에 박히는 이미지, 이런 이미지는 예술가가 아니면 만들 수가 없다. 제임스 카메론이 그 유명한 선박사고를 가져와 <타이타닉>(1997) 같은 영화를 만들고 이후 3D 버전으로까지 재현에 용을 썼어도 결국 남은 건 무엇인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그 유명한 포즈? 노래방 뮤직비디오 영상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셀린 디옹의 팝송?

 

 

 

 

 

<피츠카랄도> 포스터 자체가 대변하듯이 베르너 헤이조크의 영화를 접할 때면 나는 '경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예술이 이 현실 너머의 그 무엇을 포착하고 보여주려는 의도이자 예술가 자신과 인간의 내재된 원초성을 끌어내고야 만다는 점에서, 베르너 헤이조크 감독은 예술가로서 혹은 모험가로서 ㅡ위치적 입지가 아닌 목적지향에서ㅡ성공했다. 그것도 영화로. 무수한 변수들을 감안해야하는 영화가 예술의 완성을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피츠카랄도> 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피츠카랄도는 대단한 오페라광인데 파산 상태임에도 아마존 강의 외딴 도시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고 카루소를 공연하길 꿈꾼다. 포주이자 애인인 메리의 지원으로 배를 산 피츠카랄도는 고무농장 활로를 개척하려 한다. 사업의 진척을 6개월 안에 정부에 증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항로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서 피츠카랄도는 밀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최단노선을 계획했지만 그걸 실행할 인력도, 돈도, 능력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고작 축음기로 카루소를 밀림 속으로 들려주는 것이다. 그때 외부인을 배척하기로 유명한 정글 인디언 부족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 배가 밀림을 통과하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그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족의 구원자가 하얀 신의 모습으로 온다는 신탁을 믿고 있었고, 피츠카랄도의 배는 그들의 세계를 바꿔줄 신으로 보였던 것이다. 산을 넘으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던 피츠카랄도는 인디언 부족이 죽음의 협곡으로 신을 시험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했다. 사업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피츠카랄도는 배를 다시 팔아 남은 돈으로 카루소 공연을 선상에서 펼치기로 한다. 피츠카랄도는 변함없는 빈털털이로 자연과 오페라의 하모니를 만끽하며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베르너 헤이조크 스스로의 광기, 피츠카랄도의 탐미에 대한 광기, 인간의 식민지 개척이라는 탐욕의 광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미신적 광기, 즉 내·외적으로 총체적인 인간의 광기를 보여주는 오페라다. 하루살이는 처음 보는 불빛에 어떻게 뛰어들 수 있는 걸까. 생의 충동에너지, 본능.  

 

 

 

 

베르너 헤이조크가 자신의 이상인 이 영화 제작을 위해 4년간 수많은 이들을 착취했듯이(인명 피해도 났다), 피츠카랄도도 자신의 예술애호를 위해 메리(여자)와 아메리카 원주민을 착취하던 것은 얼마나 필연적인가. 베르너 헤이조크가 우리에게 관람석을 마련했듯이 피츠카랄도가 돼지를 위해 붉은 의자를 비워둔 오버랩은 또 어떤가. 그 속을 파헤쳐 볼수록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음에도 우리에게 끝까지 전해지는 이것은 무엇인가.

 

비장함과 유머를 다 갖춘 영화, 그것은 오페라의 성질이기도 하다. 오페라가 없었다면 현실에서 배가 산을 넘지도, 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이 빈틈없음. 예술의 자리.

 

 

 

 

 

 

헌데 이 나라에선 가 트라우마와 부정성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돌이킬 수 없는. 건물이나 다리, 환풍구와 달리 ​라는 사물이 인간 무의식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죽음과 배가 괜히 엮여져 있는 게 아니다. 카론의 배.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현실만으로는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다. 최근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그 개개의 참혹들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고 무한히 떠돌고 있음을 방증해 보여주고 있다.  

이 나라의 광기를 치유해 줄 예술이 오기를 나는, 무척 기다린다. 수 천년이 지나도 그것은 늘 현재로 당도할 것이다.

 

 

 

ㅡAgal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이 영화의 독해법은 늘 그렇듯이 홍상수 감독의 시간 놀이 룰을 보는 것이다. 첫인사를 나눈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영선과 모리는 몇 컷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제법 속내를 아는 사이로 나온다. 감독은 친절하게도 모리의 입을 빌려 이 시간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은 우리의 몸이나 탁자처럼 실제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든 추상적인 틀(과거-현재-미래)일 뿐이니 꼭 거기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그런데 인간인 우리가 이 착각의 놀이에서 살아있는 동안 빠져나온 예는 종교적 해탈밖에 없었다. 그것은 풍문으로만 전해질 뿐 그 본질적 일의성 때문에 현실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다. 대신 인간은 꿈의 영역을 유사대용품으로 향유한다. 알다시피 고대에서부터 인간은 이야기와 극에 사족을 못쓰는 종족이다. 우리는 늘 자발적인 배우이자 멈추지 않는 배우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가 될 수 없었던 딱한/딱 한? 존재가 있었는데, 강아지 '꾸미(꿈)'이었다. 극중 인간의 연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워하고 불편해하는 꾸미의 모습은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수 세기를 같이 겪어오고도 강아지들은 인간들의 이 짓이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 것 같다. 꾸미길, 꿈이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시간 놀이니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상수 감독은 이 시간 놀이에 모두 초대한다. 자꾸만 입장이 바뀌는(바꾸려는), 그래서 늘 상황이 우스꽝스러워지는(진지한), 그들(인간)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러한 영화적 시간 놀이는 홍상수 감독의 나비꿈이자 행복이기도 할 것이다.  '행복'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모리가 꽃을 한없이 들여다보게 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고 그저 담대히 맞게 된다고 했듯이 말이다. 홍상수 감독은 시간에 공간(앞, 뒤, 옆, 위, 아래)을 만들어 계속해서 주사위를 던진다. 이러다 한번쯤 행복이 나오려나? 주사위처럼 예측할 수 없는 꿈과 장면들을 계속 뒤섞고 싶은 이유다. 개(꿈)를 찾는데 선수라는 모리는 이 영화의 시간 배열 속에서는 꾸미 외엔 아무것도 제대로 찾지 못한다. 홍상수 감독의 위치는 동의자일까, 지휘자일까. 그리고 관람하는 우리는? 

 

 

 

 

 

 

모리-권 // 모리-영선 관계를 보자. 모리는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만나지 못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둘은 같은 시간대의 공간에 함께 있지 못하므로 어떤 감정 교류도 할 수 없다. 권은 모리의 뒤늦은 편지만 다른 시간대에서 계속해서 읽고 있을 뿐이고, 모리는 권의 집 앞에 붙여둔 자신의 메모만 또다른 시간대에서 반복해서 발견한다. 권이 없는 시공간에 우연히 영선이 있음으로 해서 모리와 영선은 둘만의 시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급기야 영선은 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제 모리가 떠나면 영선이 일본으로 찾아갈 판이다. 홍상수 감독의 시간 놀이 룰에서 보면, 지금 권이 어떤 사연(병) 때문에 모리와 만날 수 없듯 미래의 영선도 모리와 어떤 사연으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모리는 영선과 사귀게 되길 의도치 않았다. 오히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남희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시공간은 적절히 주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쌓일 시간의 꼬임이 필요했으나 우리의 기대와 매달림과 상관없이 주사위는 계속 던져진다. 다음엔 또 누구란 말인가?

 

 

 

 

어떤가. 이 꼬리물기들을 보는 심정이?  '(절대적/운명적) 사랑' 이란 얼마나 협소하고 우연한 결과인가. '과거-현재-미래'라는 틀을 만들 듯이 '특별한 그/그녀'란 의미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함정에 함께 빠지지 않으면 서로 소통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간이든 상대든 사물이든 모든 틀들을 뒤바꾼다.

이 시점에서 이 대화를 되짚어보자.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일본인들을 깨끗하고 예의 발라서 좋다고 하지만, 모리는 그 점들이 그 사람을 존경하거나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바꿔 말하고 싶다. 깨끗한 일직선의 시간(그들)은 우릴 매료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겐 시간의 꼬임, 누구와도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시간의 돌발과 계속 긴장시키는 시간의 연결고리들, 찾고 보고 싶게 만드는 시간의 향료(기억)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모리-권의 해피엔딩과 모리-영선의 관계의 시작점이 왜 함께 배치되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과연 그것은 끝인가, 시작인가 또는 꿈인가, 실제인가. 모리는 꼬임의 관계가 아닌 강아지 꾸미(꿈)는 발견할 수 있지만 꼬임의 관계인 사람 권(현실)은 찾을 수가 없다. 모리는 인과적 시간의 꼬임이 없는 잠(꿈) 속으로까지 접근하지만 모리와 우리는 재차 목줄이 매인 현실의 시작점으로 끌려나온다. 이 영화 또한 홍상수 감독의 나비꿈이잖은가? 관객 또한 영화적 시간의 꼬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가 끝나면 어쩔 줄 모르고 덩그러니 앉아있다 서둘러 제 현실의 노선으로 다시 돌아오잖은가. 배우인 우리에게 원리는 중요하지 않다. 더, 더 많은 이야기를 달라고, 그 시간 속에 기꺼이 빠져 살겠다고.

그렇게 다음 영화가  계속 시작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演技, 延期, 緣起한다.

 

 

ps) 

- 이 영화에서 '꾸미' 다음으로 인상적인 장면은 모리와 권이 계동초등학교앞 도로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이다.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그게 모리의 꿈이 아닌가 하는 점보다, 영화 속 정황이 우연인지 연출인지 더 궁금했을 것이다. 모리와 권이 언덕 너머로 내려갈 쯤 오토바이를 탄 남녀 한쌍이 그들 방향으로 달려가고, 그들이 사라질 쯤 맞은편 도로에서 아이를 앞에 태운 남녀가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온다. 스포가 될 듯 해서 더 깊게는 말할 수 없겠으나 대사와 그 정황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장면이기도 하다.

- 육하원칙으로도 이 영화를 분석해보고 싶기도 한데, 언젠가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또 할 말이 생길 것 같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vs <자유의 언덕>에서의 해원의 꿈과 모리의 꿈 설정으로 비교해보고 싶기도 하다.
 

 

ㅡAgalma

 

 

 

 


댓글(9)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네오 2015-03-26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連記` 이 단어는 왜 빼셨나요? 이 영화도 두개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요..홍상수,,이제는 별로 마음이 콩닥콩닥하지 않는 존재가 됐죠,,이 영화,,너무 어렵더라고요,,ㅋ 혹시 홍상수 영화중에 좋아하는 영화가 어떻게 돼는지 살작쿵 묻고 싶네요,,저는 여전히 `생활의 발견`이지만요~ 그 냉소가 좋았아요,,그 인간관계에서의 쿨함요~

AgalmA 2015-03-26 15:47   좋아요 0 | URL
지금처럼 네오님이 추가해주시면 되죠 :) 아, 제겐 ˝오, 수정˝을 처음 봤을 때의 설렘 잊혀지지 않네요. 홍상수 감독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이기도 하고요. 생활의 발견, 하하하, 낮과 밤, 옥희의 영화, 옴니버스 단편(제목이 갑자기 생각이...)을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쿨함도 너무 빈발하면 식상해져서^^;
로메르 작품을 본격적으로 보고 비교도 해보고 싶은데...하여간 영화들은 모두 토끼처럼 잘 달아나고 있습니다

네오 2015-03-2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첩첩산중요,,음,,,,오, 수정요, 참 어떻게 말해야할지,, 이동진이 그랬죠 홍상수랑 같은 언어를 써서 감사하다고요,, 오 수정만큼 오해된 영화도 없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이게 그런게 있는것 같아요 성에따라 각자 생각하는게 안드로메다와 지구사이같았어요 우선 남성들이 좋아할만 소재인데 여성들은 여기서 무엇을 발견했을까라고 그 의심을 확장하면 잘 모르겠더라고요~

AgalmA 2015-03-26 16: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첩첩산중^^
과찬할 목적은 아니고요. 구로자와 아키라 ˝라쇼몽˝처럼 ˝오, 수정˝은 우리나라 영화에서 (아마도 처음 아닐까 싶은데?) 작법으로 다가간 회전시점 영화죠. 홍상수는 그걸 꾸준히 영화에 적용시키고 있고요. 생활의 발견에서 아예 회전문까지 나오잖아요ㅎㅎ 홍상수 영화에서 왜 그토록 꿈이 많이 등장할까요. 그건 작법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죠. 긴 분석은 언젠가 말할 날 있겠죠.
여하간 홍상수 영화에서 보통의 관객들은 찌질함, 남녀관계, 폭로성 그런 것만 읽고 치워버리는데, 홍상수 영화에서 읽어야 될 것들은 그의 독특한 작법성이죠. 그런 인물들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그 작법 때문에 인물들이 묘해지는 거니까요. 내가 그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많은 상황 속에서 내가 만들어지듯이요.

네오 2015-03-2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라쇼몽,,회전시점과 회전문이라, 음,,정말그전에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 생각이 안나네요~그런데요 그 찌질한거 여성의 입을 통해서 너무 많이 들었어요, 홍상수는 발전하는데 그들의 생각은 멈춰있더라고요, 저한테는 제임스 조이스처럼 느껴지는데도요, 그 시간 주관적으로 전자렌지에 넣은 피자에 녹는치즈처럼 서서히 스며드는거요, 그는 문학가로 치면 포스트모던스트인데도 그런건 다 생략하고 너무 연애만 한다고하니,

AgalmA 2015-03-27 00:16   좋아요 0 | URL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할 때 정말 그럴까, 다르게 생각해볼 때 진짜 내 생각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다른 이면을 보려고 할 때 문학적 감수성이 나타날 테고요. 그걸 풀어나가는 장치로 철학, 문학, 영화, 사진, 미술, 음악 등의 다양한 표출이 이뤄지는 거겠죠. 가치를 보려고 하면 돌 하나, 구름 한 점도 뮤즈이자 신으로 보이는 법.
다들 너무나 쉽게 보려고만 하거나, 어렵다고 외면하려고만 하니 무가치라 말하는 것이 산처럼 쌓여 갑니다...(본심은 아니거나 생각이 짧거나)삶 조차 무가치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북다이제스터 2015-12-18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꼭 보겠습니다.^^

AgalmA 2015-12-18 19:36   좋아요 0 | URL
홍상수 영화를 이제껏 보지 않으셨다는 게 더 신기합니다. 요즘은 거의 단관 상영이 많아서 그렇다쳐도 초창기 <생활의 발견>, <오 수정>은 큰 이슈이기도 했는데^^....
이제 즐거운 탐험 되시겠네요^^

북다이제스터 2015-12-18 19:4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자칭 영화광인데...ㅎㅎ
앞으로 홍상수 신세계 기대됩니다. ^^
 

 

 

 

 

 

 

 

 

 

 

 

#

가스통 바슐라르가 그 질료들로 영화를 분석했다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분명 '공기' 질료와 밀접한 예술가다.

그의 첫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1963)과 마찬가지로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도 상승과 하강의 구도로 오프닝을 연다. 이러한 구도는 <솔라리스>(1972)나 <희생>(1986)도 예외는 아니다.

이카루스 신화처럼 인간의 운명은 반드시 추락을 향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이름과도 같은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통해 '신성에의 귀의'를 운명에 대한 타개책으로 본 듯하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열기구를 떠오르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불타며 바스러지는 장작의 표피처럼 프레스코화도 세월의 풍파로 균열 가득하지만 그 뜻은 불의 열기처럼 위로 한없이 향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프레스코화가 온통 타들어가는 장면인 이유다. 그리고 맨 마지막 등장하는....(중대한 스포이므로 생략)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육체를 떠난 완성.

타르코프스키가 본 인간이란 존재는 육체를 벗어날 수 없는 수평적 존재, 물이다. 고여서 서로 뭉쳐 있으며 흘러갈 수밖에 없는 존재. 사라져도 다시 비가 되어 피할 수 없이 지상으로 내리 꽂히는 존재. 그러므로 그의 영화 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늘 물과 함께다. 물 없이는 영화도 없다. 농담이 아니다.

타르코프스키가 서방으로 망명하고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러시아의 풍경들을 보며, 그의 심정에 또한 공감했다. 러시아 풍경에서 빠지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과 광활한 허허벌판 말이다. 그가 망명하기 직전 <노스탤지아>(1983)를 완성하게 된 건 뭐라 말해야 할 지...

 

 

이교도 축제 시퀀스를 보고 에밀 쿠스트리차  <집시의 시간>(1989)이 그 영향을 상당히 받았단 인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견해)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물 위를 날아가는 불 - <집시의 시간>에서 도로를 날아가던 스카프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제의장면 또한 <집시의 시간>에서 제의장면과 오버랩되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마술적 리얼리즘 장면이기도 하다.

종교를 있는 그대로의 하나로만 본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이교가 아닌 종교가 없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아들이 있는 러시아 종교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타타르족 수장의 말처럼.

신을 찾고 구하는 건 우리의 본능이지만, 폐쇄적 종교관은 인간의 의식 한계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반의 어린시절>에서 주인공 소년역을 훌륭히 소화했던 니콜라이 부릴야예프의 연기를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마땅치 않아 했던 심정을 이해할 만 했다. 이 영화에서 15세기 사람으로 전혀 보이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부릴야예프는 존재감 자체부터 너무나 근대적이고 반항적이다. 그의 연기는 15세기 사람의 인성으로도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메소드 연기도 아닌 니콜라이 부릴라예프 그 자체로 보인다. 라이언 고슬링이랑은 또 왤케 판박이로 닮았는지;; 니콜라이 부릴라예프는 <전쟁과 평화>시대 사람 같다. 이상하게 어떤 인물은 딱 어떤 시대와 연결돼 보인다. 물론 이 또한 이 시대 내 편견이겠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신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감독으로서의 그가 너무 많이 보인다. 마지막의 이콘 장면과 ○ 장면은 반박을 불사하겠다는 인위적 몽타주.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구도적 작업에 같은 예술가로서 심적 투영도 있었겠지만, 왜 그렇게 神에 매달려야 하는지를 그는 보여주려 한 것일까, 증명하려 한 것일까. '나'라고 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을 가리키는 말이다(타르코프스키는 이또한 놓치지 않고 <거울>(1975)라는 작품도 찍었다). 우리들이 하느님의 모상(模像)에 따라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바깥에서 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미 나 자신이 神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가는 그의 예술로 神을 보여준다.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최후의 심판>을 재현할 수 없어 절망 속에 물감을 벽에다 던져버리고 마구 휘저었던 표시에, 백치 여인이 그 자국을 만지고 냄새 맡으며 울던 장면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여전히 예수상과 부처상 앞에서 인간은 통곡하며 엎드려 절한다. 우리는 15세기 사람과 다르지 않고 더 과거로 가도 마찬가지다.

사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종교적 예술세계에 그토록 경도되어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자신도 이미 같은 바탕의 예술세계이므로. 그러나 어쩌랴, 인간은 늘 이전 예술에서 벨 에포크를 느끼는 것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상징'은 없었다. '상징'으로 보고 싶게끔 만드는 '비유'는 많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인간 자체가 이미 거대한 상징 아닌가.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아버지처럼 시인이자 예술가여서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충실히 묘사하고 영감에 따라 비유했다. 그것이 종소리처럼 울려 퍼져서 모든 인간에게 가닿아 삼위일체가 되길 원했다.

 

 

ㅡAgalma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 1410년

(이 영화의 마지막에 집요하게 보여주던 이콘)

 

 

 

야스오의 강제 기아 수용소

 

 

어서 써. 써보란 말이야. 평범한 용지 위에 보통 잉크로:

그들에겐 식량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모두가 굶어 죽었다고.

모두라구?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데?

이곳은 거대한 초원이잖아. 한 사람당

얼마나 많은 풀잎과 잔디를 먹어 치웠을까?

어디 이렇게 써봐: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역사는 유골들을 어떻게든 제로(0)의 상태로 결산하려 애쓰고 있다.

천 명에다 한 명이 더 죽어도, 여전히 천 명이라고 말한다.

그 한 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상상으로 임신한 태아, 텅 빈 요람,

한번도 펼쳐진 적 없는 철자법 교본,

저 혼자 웃다가, 소리 지르다가, 팽창하는 공기,

공허의 늪을 향해 내달리는 계단,

가지런히 정렬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미지의 공간.

 

 

우리는 육체가 되어버린 초원 위에 서 있다.

초원은 마치 매수당한 증인처럼 침묵을 고수한다.

태양 아래서. 눈부시게 선명한 푸른 빛깔로.

숲 저편에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꿀꺽꿀꺽 들이킬 수 있는 수액이 뚝뚝 떨어진다.

눈이 멀지만 않는다면

일상의 풍경들은 매일매일 어김없이 배급되리라.

저 산 너머 영양 만점 도톰한 날개를 가진 새의 그림자가 비친다.

새들은 텅 빈 주둥이를 크게 벌린 채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다.

낫처럼 생긴 초승달이 밤하늘에 슬며시 나타나

꿈속에 등장한 호밀빵을 쓱싹쓱싹 베어낸다.

이콘에 등장하는 성인(聖人)의 검은 두 팔은

텅 빈 잔을 손에 든 채 허공을 휘젓고 있다.

가시 돋친 철조망의 날카로운 꼬챙이 위에는

인간의 육신이 꼬치 요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들은 대지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전쟁이 어떻게 그들의 심장을 꿰뚫었는지에 관한

아름다운 노래를.

자, 어디 한번 써보시지. 이곳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운지.

그래, 알았어.

 

 

 

- 비스와바 쉽보르스카, 『소금』(1962)

  (국내 『끝과 시작』수록)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12-18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 종일 좋은 글이 많군요. 류불레프 오프닝 씬을 잊지 못합니다. 첫 장면 보았을 때,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가 궁금하더군요. 좋은 영화는 항상 카메라 뒤의 풍경이 궁금해지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탄 탱고를 보았을 때도, 토리노의 말을 보았을 때도 정작 궁금한 것은 카메라 뒤에서 좆빠지게 고생하고 있을 풍경이었거든요. 허허.. 잘 읽었습니다.

AgalmA 2014-12-18 16:05   좋아요 0 | URL
첫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 오프닝 장면 때 카메라맨이 추락사망하는 사고가 있어서 루블료프 때는 더 만반의 대비를 하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더 강도높은 공중씬;.....저도 그런 장면 나오면 카메라 뒤를 정말 존경합니다. 바딤 유소프, 체르니야예프,오브치니코프 등의 동료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죠.
그런 의미에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촬영감독 유하루 아츠다씨는 촬영감독을 그만 두었다는 일화도 뭉클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