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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독해법은 늘 그렇듯이 홍상수 감독의 시간 놀이 룰을 보는 것이다. 첫인사를 나눈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영선과 모리는 몇 컷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제법 속내를 아는 사이로 나온다. 감독은 친절하게도 모리의 입을 빌려 이 시간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은 우리의 몸이나 탁자처럼 실제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든 추상적인 틀(과거-현재-미래)일 뿐이니 꼭 거기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그런데 인간인 우리가 이 착각의 놀이에서 살아있는 동안 빠져나온 예는 종교적 해탈밖에 없었다. 그것은 풍문으로만 전해질 뿐 그 본질적 일의성 때문에 현실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다. 대신 인간은 꿈의 영역을 유사대용품으로 향유한다. 알다시피 고대에서부터 인간은 이야기와 극에 사족을 못쓰는 종족이다. 우리는 늘 자발적인 배우이자 멈추지 않는 배우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가 될 수 없었던 딱한/딱 한? 존재가 있었는데, 강아지 '꾸미(꿈)'이었다. 극중 인간의 연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워하고 불편해하는 꾸미의 모습은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수 세기를 같이 겪어오고도 강아지들은 인간들의 이 짓이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 것 같다. 꾸미길, 꿈이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시간 놀이니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상수 감독은 이 시간 놀이에 모두 초대한다. 자꾸만 입장이 바뀌는(바꾸려는), 그래서 늘 상황이 우스꽝스러워지는(진지한), 그들(인간)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러한 영화적 시간 놀이는 홍상수 감독의 나비꿈이자 행복이기도 할 것이다. '행복'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모리가 꽃을 한없이 들여다보게 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고 그저 담대히 맞게 된다고 했듯이 말이다. 홍상수 감독은 시간에 공간(앞, 뒤, 옆, 위, 아래)을 만들어 계속해서 주사위를 던진다. 이러다 한번쯤 행복이 나오려나? 주사위처럼 예측할 수 없는 꿈과 장면들을 계속 뒤섞고 싶은 이유다. 개(꿈)를 찾는데 선수라는 모리는 이 영화의 시간 배열 속에서는 꾸미 외엔 아무것도 제대로 찾지 못한다. 홍상수 감독의 위치는 동의자일까, 지휘자일까. 그리고 관람하는 우리는?
모리-권 // 모리-영선 관계를 보자. 모리는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만나지 못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둘은 같은 시간대의 공간에 함께 있지 못하므로 어떤 감정 교류도 할 수 없다. 권은 모리의 뒤늦은 편지만 다른 시간대에서 계속해서 읽고 있을 뿐이고, 모리는 권의 집 앞에 붙여둔 자신의 메모만 또다른 시간대에서 반복해서 발견한다. 권이 없는 시공간에 우연히 영선이 있음으로 해서 모리와 영선은 둘만의 시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급기야 영선은 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제 모리가 떠나면 영선이 일본으로 찾아갈 판이다. 홍상수 감독의 시간 놀이 룰에서 보면, 지금 권이 어떤 사연(병) 때문에 모리와 만날 수 없듯 미래의 영선도 모리와 어떤 사연으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모리는 영선과 사귀게 되길 의도치 않았다. 오히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남희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시공간은 적절히 주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쌓일 시간의 꼬임이 필요했으나 우리의 기대와 매달림과 상관없이 주사위는 계속 던져진다. 다음엔 또 누구란 말인가?
어떤가. 이 꼬리물기들을 보는 심정이? '(절대적/운명적) 사랑' 이란 얼마나 협소하고 우연한 결과인가. '과거-현재-미래'라는 틀을 만들 듯이 '특별한 그/그녀'란 의미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함정에 함께 빠지지 않으면 서로 소통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간이든 상대든 사물이든 모든 틀들을 뒤바꾼다.
이 시점에서 이 대화를 되짚어보자.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일본인들을 깨끗하고 예의 발라서 좋다고 하지만, 모리는 그 점들이 그 사람을 존경하거나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바꿔 말하고 싶다. 깨끗한 일직선의 시간(그들)은 우릴 매료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겐 시간의 꼬임, 누구와도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시간의 돌발과 계속 긴장시키는 시간의 연결고리들, 찾고 보고 싶게 만드는 시간의 향료(기억)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모리-권의 해피엔딩과 모리-영선의 관계의 시작점이 왜 함께 배치되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과연 그것은 끝인가, 시작인가 또는 꿈인가, 실제인가. 모리는 꼬임의 관계가 아닌 강아지 꾸미(꿈)는 발견할 수 있지만 꼬임의 관계인 사람 권(현실)은 찾을 수가 없다. 모리는 인과적 시간의 꼬임이 없는 잠(꿈) 속으로까지 접근하지만 모리와 우리는 재차 목줄이 매인 현실의 시작점으로 끌려나온다. 이 영화 또한 홍상수 감독의 나비꿈이잖은가? 관객 또한 영화적 시간의 꼬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가 끝나면 어쩔 줄 모르고 덩그러니 앉아있다 서둘러 제 현실의 노선으로 다시 돌아오잖은가. 배우인 우리에게 원리는 중요하지 않다. 더, 더 많은 이야기를 달라고, 그 시간 속에 기꺼이 빠져 살겠다고.
그렇게 다음 영화가 계속 시작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演技, 延期, 緣起한다.
ps)
- 이 영화에서 '꾸미' 다음으로 인상적인 장면은 모리와 권이 계동초등학교앞 도로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이다.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그게 모리의 꿈이 아닌가 하는 점보다, 영화 속 정황이 우연인지 연출인지 더 궁금했을 것이다. 모리와 권이 언덕 너머로 내려갈 쯤 오토바이를 탄 남녀 한쌍이 그들 방향으로 달려가고, 그들이 사라질 쯤 맞은편 도로에서 아이를 앞에 태운 남녀가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온다. 스포가 될 듯 해서 더 깊게는 말할 수 없겠으나 대사와 그 정황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장면이기도 하다.
- 육하원칙으로도 이 영화를 분석해보고 싶기도 한데, 언젠가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또 할 말이 생길 것 같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vs <자유의 언덕>에서의 해원의 꿈과 모리의 꿈 설정으로 비교해보고 싶기도 하다.
ㅡ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