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 이후 이렇게까지 책을 안 읽고 산 적이 있었던가 싶게 독서를 안 하고 있다.

이게 다 스마트폰 때문이야, 라고 하기엔 스마트폰 쓴 지가 너무 오래고, 이게 다 더워서야 하기엔 덥기 전에도 이미 책은 안 읽기 시작했고, 이게 혹시 제주살이 때문인가 하기엔 서울살이랑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으니, 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 되었나 모르겠다.

나는 전형적인 활자형 인간이고 텍스트로 된 것이면 뭐든 읽어치우려는 경향까지 있어서 활자중독인가 의심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런 형의 인간이라고 스스로 한때나마 생각했다는 자체가 우습기 짝이 없다.


매일이다시피 '책 좀 읽어야 하는데' 라면서 '소송'을 옆에 두고 있는데 딱 한 달 전까지 읽은 지점에 그대로 있다. 물론 카프카 씨가 별로라서 그런 건 아니다. 어쩌면 이제야말로 카프카 씨가 조금쯤 이해가 되네, 예전에 읽었던 '변신'은 아무 것도 아니네, 그런 생각도 한 참이다. 왤까 왤까, 나는 왜 책을 집어들지조차 않고 있나, 그러다가 또 하루가 지나려는 저녁에 문득, 영화라도 보자 싶어졌다. 눈으로라도 뭔가를 읽고 싶다는 맘이 든 모양.


제주에 와서 가장 극심한 고통이라면 - 고통,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양심도 없구나, 정말 - 보고싶은 영화를 못 본다는 것인데,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라며 스스로를 속이고 올레티비나우에 가입해서 홍상수 씨의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깔깔깔 웃으면서까지 봤던 장면들이 많았지만, 이자벨 위뻬르와 권해효, 문소리의 아래 대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확치는 않으나 대충 옮겨보면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권해효 - 인간은 책임지려고 애쓰면서 살아야 한다. 거기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은 없다.

위뻬르 - 아니, 나는 그럴 수 없다. 어차피 인간이란 책임질 수 있는 것만 책임지게 생겨먹었다. 그 이상은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다.

문소리 - 아니, 권해효 말이 맞다. 인간이란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엉망이 될 것이다.

위뻬르 - 후, 그런가? 나는 아무래도 못하겠지만 그렇다 치고, 이 과자가 참 맛나구나.


이 간단한 대화 속에 거창한 철학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영화 본 이후 내내 머릿속에 남는 화두이긴 하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위뻬르 쪽에 다가서 있다. 그 편이 솔직하다 생각하기 때문인데, 모두다 위뻬르처럼 생각할 때 과연 세상이 엉망이 안 될지에 대해선 또 자신이 없다.


그나저나 이 영화에서 가장 웃긴 캐릭터가 유준상인지, 문성근인지, 김용옥인지, 우열을 가려내기 힘들구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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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7-3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왈왈! 치니님은 그동안 너무 많이 읽었으니까 좀 쉬어도 돼요. 대신 그 활자에 대한 열의가 나한테 좀 왔으면.. =_=(풀죽..)

치니 2012-08-02 15:45   좋아요 0 | URL
아녀, 아녀요. 그동안도 턱 없이 작은 독서량이었는데, 더 더욱 이렇게...ㅠ
아무튼 네꼬 님에게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뿅 ~ 보내드리고 싶사옵니다 ~

당고 2012-07-3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푸하-
저도 책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
이렇게도 살겠어요 ㅎ

치니 2012-08-02 15:46   좋아요 0 | URL
이게 정말 어찌 된 영문인지 몰겠어요. 눈알이 빠질 것 같아도 읽어대던 시절이 있기나 했었나 싶고. ㅎ

라로 2012-07-3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믿기지만 뭐~~~그렇다니까 그런 줄 알겠음!!
근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맞아???
언제 서울 안 와?????
레이니랑 함께 얼굴 좀 보자,,,맛있는 거 사줄께.(이런 말에도 유혹을 못 느껴???)

치니 2012-08-02 15:47   좋아요 0 | URL
언니, 믿어 믿어요, 증말이라니까요. 쩝.
서울엔 몇 번 갔지만 늘 일이 있어 그 일만 보고 오느라 미리 연락할 새가 없었어요.
9월에 한 번 갈 터인데 그때도 역시 부모님 행사 차...맛있는 거, 으암, 유혹 느끼긴 하는데 으암, 헤.

2012-08-02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02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