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학습만화라는 게 엄청 많이 나온다. 나에게도 초등학교 3학년짜리 조카가 하나 있는데, 사실 아직까지 글자로만 된 책보다 만화로 된 책에 더 눈이 반짝인다. 우리 엄마나 올케는 조카가 만화를 보는 게 마뜩치 않은 눈치이지만, 나는 그것도 그런대로 좋다고 생각해서 가끔 사주곤 한다.

 

만화.. 라고 하면 싫어하는 이유가, 그 옛날의 만화방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은 골방같은 공간에 촘촘하게 박혀있는 지저분한 만화책들과 바람도 잘 통하지 않고 음습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그리고 거기에서 넋을 잃고 만화를 보고 있는 아이들, 혹은.... 어른들...(ㅎㅎ). 그런 곳에 있으면 분명 불량한 학생이거나 백수이거나 뭐 그런 이미지가 커서인지, 만화방이라는 데나 만화라는 것이 그닥 좋은 느낌을 주지 않는 세대가 있다.

 

나만 해도, 만화를 무지하게 좋아하는데, 만화카페라는 곳에서 만화를 봤다. 밝은 조명에 넓은 공간, 하얀색으로 칠해진 책장에 종류별로 꽂혀진 만화책들. 그 때 소파 위에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서 책상위에 하나 가득 만화책을 놓아두고 커피 한잔이나 라면 한사발을 먹던 기억이 난다. 순정만화부터 무협만화까지 안 본 만화가 거의 없지 않았나... 만화는 나에게 상상력의 보고였는데 말이다. 그 때 허영만을 알았고 박봉성을 알았고 이현세를 알았고 이두호를 알았다. 강경옥을 알았고 김혜린을 알았고 신일숙을 알았다. 기타 등등의 수많은 만화가들이 있었지. 김동화나 한승원도 있었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일본만화에 심취했었지. 하긴 지금도 만화책은 가끔씩 사다본다.

 

암튼, 개인적으로 만화책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보지는 않는다. 글자를 너무 안 읽으려 한다면 모를까 만화는 만화 나름대로의 순작용이 있는 게 아닐까. 오히려 만화라서가 아니라, 학습만화를 빙자해 나온 허접한 내용의 책들이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건 만화 뿐 아니라 그냥 책도 마찬가지니까 만화에만 국한해서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조카에게 사주다보니, 꽤 괜챦은 시리즈물이나 단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다 아는 내용이겠지만, 내가 자주 사는 학습만화들은 아래와 같다.

 

 

1. 마법천자문 시리즈

 

 

 

 

 

 

 

 

 

 

 

 

 

 


이건 뭐 너무 유명해서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책 보고 한문 익히는 게 한두명이라야 말이지. 그냥 마법천자문만 있는게 아니라 단어마법편도 나와서 둘다 사줘야 하는 부담이 백배지만..ㅎ 마법천자문은 26권까지, 단어마법편은 13편까지 나온 걸로 확인.



 

 

2. Why 시리즈

 

Why 시리즈는 워낙 종류 자체가 많다. 일단 그냥 Why 시리즈만 보더라도 다밤면의 지식을 넓힐 수 있는 주제들이 그득이다. 최근 것은 <한국사 우정과 경쟁>이나 <해부학> 등이 되겠고.

 

 

 

 

 

 



 

인문고전학습만화라는 것으로도 나온다. 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나 고승들의 책이나 사상들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플라톤이니 일연이니, 홉스 리바이어던 (이 사람은 나도 생소하니..ㅜ)이니 하는 사람들의 철학적인 내용들을 잘 정리해두었다.

 

 

 

 

 


 

한국사 시리즈도 있다. 왕비 이야기, 신화와 전설 이야기 뭐..기타등등.. 주로 한국사에서 주제를 잡아서 그에 대한 얘기들을 쭈욱 나열한 형식이다. 영웅 이야기나 역사를 바꾼 사건 이야기나 다양하다.

 

 

 

 

 

 


 

요즘엔 세계사도 나온다. 중국과 인도는 조카에게도 사주었는데, 중국편을 읽더니, 중국돈 얘기가 나오니까 위안화를 대뜸 이야기해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책에서 봤다고..ㅎ 내가 보고 챙겨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위인전도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위인들만 있는 게 아니라 최근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리처드 파인만이나 제인 구달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데서 나오는 책들도 있던데, 여기서 나오는 책의 내용이 깔끔한 것 같다.

 

 

 

 


 


 

3. 내일은 발명왕 시리즈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를 좋아한다. 과학의 원리를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어서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4. Who? 시리즈

 

위의 'Why People' 시리즈와 비슷한 맥락의 위인전들이다. 출판사가 다르고 인물이 많이 겹치지 않아서 가끔 보고 필요한 책들을 고르곤 한다. 오프라 윈프리까지 나오다니. 요즘의 위인상이란 얼마나 다양한가 말이다.

 

 

 

 

 


 

 

 

5. Why+ 시리즈

 

이건 일본 아사히 신문출판사의 시리즈이다. 일본 서점에 가면 이런 류의 과학 만화 비슷한 것들이 꽤 된다. 워낙 만화가 생활에 깊게 뿌리박힌 나라인지라 어색하지 않은 느낌이다. 조금 더 전문적이라고나 할까.

 

 

 

 

 



 

 

6. 내일은 실험왕 시리즈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도 좋아한다. 다양한 과학 원리가 폭넓게 소개되고 간단한 실험 키트가 포함되어 있어서 눈으로 손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어, 우주의 원리라고 한다면, 해와 달과 지구 모형을 우주 그림이 그려진 판 위에 놓고 빛이 어떻게 비치는가를 볼 수 있게 하는 키트들이 제공된다. 우리 조카 같은 경우는 꽤 집중해서 보는 편이다.

 

 

 


 

 

7. 보물찾기 시리즈

 

보물찾기 시리즈는 세계 각국을 보물찾기의 명목으로 소개하는 탐험 겸 여행 만화라서 세상은 넓고 우리와 다르지만 같은 것들도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만화다. 미국, 스웨덴, 러시아, 그리스, 터키 등등등등 없는 나라 없이 다 나와 있다.

 

 

 

 

 

 


 

 

8. 기타 등등

  

 

 

 

 

 

 

 

 

 

 

 

 


 

 

시리즈가 아니라도, 어린이 대상만 아니라도 꽤 괜챦은 만화들은 또 있다.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도 좋고 먼나라 이웃나라도 좋고 그리스신화를 만화로 각색한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해보면, 나의 개인적인 경우는 메이플 스토리나, 영어/수학 제목 붙은 책이나 보물섬 등의 만화는 같은 만화라도 잘 안 사주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대략 훑어 보면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다른 것들로 채워주곤 한다. 이건 뭐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니까. 생각난 김에 조카 책이나 몇 권 사야겠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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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9-12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는 아이들한테 학습만화 아니면 만화가 아닌 듯 읽히는데
'학습'이라는 이름이 붙을 때에는
아이들한테 얼마나 즐거운 책이 될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른들이 '학습소설'이나 '학습문학'을 즐기지 않듯
아이들도 '만화'라고 하는 문화나 예술을 누리도록
단행본 만화책으로 '이야기'를 찾게 해 줄 때에
즐겁게 책하고 사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비연 2013-09-12 06:50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맞는 말씀이세요~ 저도 만화 앞에 '학습'이나 교과목 이름 붙는 것엔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답니다. 다행히 '학습' 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아도 괜챦은 만화들은 요즘 많이 나오고 있어서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카스피 2013-09-12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20~30대 젊은 엄마들의 경우 어린시절 부모님한테 야단을 맞으면서도 몰래 만화를 보신 세데들인텐데도 여전히 자녀들한테 만화를 안 읽히는 것 같더군요.아무래도 만화보면 공부룰 안할 거란 편견이 뿌리깊이 박혀 있나봐요.
개인적으로 책만펼치면 자는 아이들한테는 차라리 학습만화가 나을거란 생각이 드는데 재미있는 만화를 보다보면 알게 모르게 공부에 도움이 될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죠.
뭐 일본의 경우는 수학의 정석같은 책도 만화로 나왔다고 하더군요^^

비연 2013-09-13 10:4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자기는 만화를 읽어도 애들이 읽는 건 싫어하는 경우도 있는 듯. 사실, 만화로라도 책을 가까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은 정말 만화로 많은 걸 해결하는 나라인 듯. 심지어 관공서에서도 다 만화를..ㅎㅎ
 

 

근황 몇 자 끼적끼적.

 

1.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가디건 안에 입은 반팔 셔츠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집 앞의 은행나무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곧 저 나무들의 잎들이 노란색으로 물들거고 시간이 좀더 지나면 하나씩 둘씩 떨어지겠구나.... 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 아래 있는 자동차 여기저기에 붙어서 떼어내기 바쁘겠구나... 라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착지. 에잇.

 

2. 가을이 되면 왜 이리 마음이 스산해지는 걸까. 낼 모레 프로젝트 결과물을 내야 하고 그래서 똥줄타게 바쁜 요즘. 어제도 10시에 집에 가고 오늘도 아침부터 정신없이 이것저것 처리하다보니 벌써 11시를 향해 시계 분침이 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여기 들어와서 도닥거릴 정신을 가지는 걸 보면, 아마도 난 가을을 타는 건가보다. 아직 시작이나 하는가 싶은 가을을 탄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걸 보면, 역시 난 가을을 타는 게지.. 하하.

 

3. 일하면서 느끼는 건, 사회생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사회성의 지능이 아닌가 하는 거다. 나이가 들수록 이제 실무에서 관리로 넘어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더 많은 일들을 협의해야 하고 더 많은 사항들을 설득해야 하고 더 많은 내용들을 공유해야 하고 더 많은 안건들을 거절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하려면, 역시 사람과의 관계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정말 '지능'이 아닌가 싶은 거다. 몇 가지 독특한 직업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런 것 같다.

 

4. 우리 회사에도 보면, 학교 다닐 때 난다 긴다 천재다 수재다 했던 사람들이 그득그득한데 (난 뭥미..ㅜ) 다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을 못한다기보다는 고객이 거부하거나 팀 내에서 거부당한다. 대화기법이나 일처리능력이나 이런 면에서 자꾸만 부딪히고 자기 얘기만 하고 고객 수준을 맞춰주질 않는다. 물론 그들은 머리가 좋고 그래서 자기들의 이해력보다 아래인 사람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겠지만 사실 그런 '이해력 낮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인거다. 그래서 우리의 '난다 긴다' 팀원들은 잘난 체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 한국말 하는 거 맞냐.. 라는 학교에서는 절대 들었을 수 없는, 지진아들이나 듣는 지적을 당하면서 고스란히 사무실에 남겨진다. 팀장은 미워 죽으려고 하지만, '난다 긴다' 팀원들은 그것조차 그냥 무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바보인거지 내가 바보는 아니니까 라는 올곧은 정신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난 그들의 뛰어난 머리를 부러워하지만, 더할 수 없이 낮은 사회적 지능은 안타까와 한다. 조금만 사회성이 있으면 저런 자폐놀이를 하지 않아도 될텐데.

 

5. 뭐 그렇다는 거다. 아이들을 학교 보내면 공부를 잘 하길 바라고 수재 영재 천재 소리 듣는 걸 뿌듯하게 느끼는 부모가 많겠지만, 난 생각이 좀 다르다. 공부를 너무 잘 하고 머리가 너무 좋으면 학자가 되면 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아니고서야 학자도 요즘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 못 하면 왕따가 된다. 학자가 안되고 직업을 가지게 되면 다 사람과의 관계고, 의사소통이 key가 된다. 따라서 그런 능력을 키워주는 게 부모가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개뿔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6. 바쁘니까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요즘의 시간이 힘들다. 최근에 산 명작들은 다 엄마가 접수하여 읽고 계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나 '카라마조프의 형제' 나 이런 책들은 그저 어딘가 쳐박혀서 좌악 읽고 나와야 하는 고전들인데, 난 사다놓고 표지만 쓰다듬고 있다. 이거 언제 읽을 수 있으려나. 슬퍼하면서 말이지. 책을 못 읽는 일상이 내겐 가장 슬픈 일상이라고 생각.

 

7. 내일 모레 프로젝트 결과물 제대로 내면 난, 내게 선물을 줄 계획으로 몇 가지 예약을 해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건, 이것, 백건우의 피아노 콘서트다. 이번엔 슈베르트다. 계속 베토벤 프로젝트를 수행하더니 이제 슈베르트로 돌아왔다.


 

 

“나이에 대해서는 마음 편하게 생각해요. 워낙 할 곡들이 많아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음악을 이해하는 면이 더 깊어지고, 가까워지고, 어떤 면에서는 더 편해져요. 또 역사적으로 보면 팔순 넘어서도 훌륭한 연주를 하신 분들이 많거든요. 피아노는 성악이나 현보다도 생명이 긴 거 같아요. 그만큼 악기가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레퍼토리가 많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다 못 해서 오히려 걱정이지.” (세계일보, 백건우 인터뷰 中)

 

 

 

 

내가 우리나라 연주자들 중에서 인정하는 몇몇 사람 중의 하나가 백건우이다. 꾸준하고 깊이있고 새로운 것에 대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연주에 인생을 걸고 있다. 쓸데없이 나와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지 않고 성실하게 연주자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 슈베르트의 음악을 제일 좋아한다고 할 순 없지만, (사실 그 전의 베토벤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지만, 시간이 없어서...ㅜㅜ) 이 가을에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는 선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 기대된다.

 

 

 

 

 

 

 

 

 

 

 

 

 

 

 

 

 

 

이 책들도 사다놓고 째리고 있다. 백건우 연주 듣고 와서 한번 스윽 봐줘야겠다. 가끔 클래식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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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3-09-1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객석에 백건우씨 인터뷰를 일전에 읽어보니 자신의 일을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임하고 있는지 알겠더군요. 백건우씨의 슈베르트연주 들어보고 싶네요. 가을이랑 잘 어울리겠다.

일 무사히 마치시고 스스로한테 상도 많이 주시는 가을되세요 ㅎㅎㅎ

비연 2013-09-10 22:55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감사해요~ 열심히 진지하게 일하는 사람은 어느새 표가 나는 것 같아요. 저도 이 가을날에 어울릴만한 연주라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원래 성격이 까칠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흠.. 분명, 남들보다는 '좀' 까칠하다.. 인정..ㅜ) 요즘 들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진 것 같다는 것을 오늘 아침, 갑자기 느꼈다. 그런 느낌을 가지고 나니 왠지 혀끝이 씁쓸하고 뭔가 내가 대단히 잘못 살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 온종일 마음이 불편했다.

 

금요일에 결국, 회사에서 업무를 빌미로 크게 부딪혔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그 사람에게 나의 스트레스와 화가 터진 것은, 아무래도 좀 만만해서가 아니었나 싶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심하게 얘기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불러놓고 난리를 칠 수 있었을까... 조금 망설여지는 기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은 화를 낼 때도 사람을 가린다는 거다. 나도 그런 사람이라는 거고. 만만한 구석으로 열이 나간다는 거지. 순간, 내가 상당히 나쁜 사람으로 여겨졌고 계속 머리에 그 생각이 붙어 떨어지질 않고 있다

 

어제도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면서 난 너무 많은 얘길 했고 내 속을 너무 보였다. 누군가가 싫다거나 누군가를 피하고 싶은 이유는 다 있는 법. 그걸 표를 내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나는 표를 내고 있고 거기에 더해 어제의 만남에서 구차하게 왜 그런가에 대해 장황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게 맞는 얘기냐 틀린 얘기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얘길 내 입을 빌어 했냐 안 했냐가 중요한 거지. 후회되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내가 요즘 사소한 일에 상당히 예민하고 그걸 말하고 싶어 안달날 정도로 까칠해져 있구나 라는 걸 느꼈다는 거다. 좀 calm down하고 스스로를,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겠다.

 

 

요즘 이 책을 읽고 있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고 이제 선선한 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하는 이 즈음. 김화영 교수의 이 글은 정말 나를 진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다. 나는 이 사람이 너무 부럽다. 평생을 카뮈와 함께 하고 그의 글을 번역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을 줄 수 있다. 자신의 글 또한 유려하고 자유로우며 사색적인 여행에 재주가 있다. 어제 그런 얘기를 했었다. 누가 부럽냐... 난 이런 사람이 부럽다. 그 자리에선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김화영 교수를 모를 것 같았다..ㅜ) 나는 김화영 교수의 인생을 부러워하는 것 같다.

 

"어제는 여름이었는데, 벌써 눈앞에 가을!" 보들레르는 이렇게 노래했다. 가을빛 속에 몸을 잠그고 지나간 여름을 생각한다. 보들레르의 가을 노래, 그 마지막 연을 생각한다.

"아! 부디 그대 무릎에 내 이마를 기대고 / 하얗게 작열하던 여름을 그리워하며 / 노랗게 물든 늦가을의 다사로운 빛을 음미하게 해주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김화영 교수는 엑상프로방스라는 곳에서 박사학위를 밟았고 젊은 날 가난한 유학생으로 아내와 함께 살던 그곳에 이제 40년이 지나 다시 가 그곳에서 추억과 문학을 음미한다. 40년의 세월동안 그에게는 두 딸이 생겼고 사위가 생겼고 손자가 생겼으면 흰머리를, 나이든 아내를 남겼다.

 

집 안내. 아래층엔 밖의 눈부신 빛과 대조적으로 어둑한 그늘 때문에 더 안락해 보이는 거실과 침실. 훤칠한 주방. 저 안쪽의 깊숙한 서재. 입구의 욕실. 에나멜같이 반짝이는 주황색 타일 계단을 딛고 오르면 조붓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 세 개와 욕실. 창살 너머로 눈물겹도록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 프로방스의 숲. 인적이 없다. 코케 부인이 오래된 나무 벽장문을 열고 그 속에 차곡차곡 쌓인 시트들을 보여준다. 확 끼치는 신선한 광목 냄새에 나는 비로소 프로방스에 도착했음을 실감한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데 40년이 걸렸다니. 그 먼길 위에 흩어진 내 청춘의 발자국이 간데없다.

 

아... 내 청춘의 발자국이라. 청춘을 얘기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건, 이제 남보다 좀더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고, 그것은 노교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닐게다. 왜냐하면... 청춘은 짧고 청춘이 아닌 시간은 기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청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겠지.

 

화자 마르셀이 어린 시절 바캉스를 보내는 콩브레 마을에서 소금 가게를 열고 있는 사람의 성이 카뮈다. 알베르 카뮈도 젊은 날 이 책을 읽으면서, 한가한 여름날 고요 속에서 먼지 앉은 통을 탁탁 두드려 터는 소금 가게 주인이 자신과 같은 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때로 이런 정치한 묘사는 우리에게 현실보다 더 강렬한 삶의 일부분이라는 느낌을 준다. 문학은 삶에 형태와 윤곽을 부여함으로써 우리를 참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프루스트의 이 대목을 다시 읽을 때면 프로방스의 2층 방, 가볍고 서늘한 어둠의 감촉이 떠오를 것이다. 또한 프로방스에서 보낸 여름날 기억의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프루스트가 그려낸 빛의 '노란 날개'가 떨리고 있을 것이다.

 

프로방스에 머물면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 한 귀절을 떠올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동명이인인 카뮈 아저씨에게서 알베트 카뮈를 연상하다. 그냥 읽고만 있어도 이리 마음이 푸근해지고 행복해진다. 그리고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야 만날 수 있는 그들을 거리낌없이 여기 이 자리로 끌고 와 함께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김화영 교수가 다시한번 부러워진다. 그리고 나도 엑상프로방스라는 곳을 다녀오고 싶어진다. 시끄러운 도시가 아니라 정말 프랑스를 느낄 수 있는 그곳.

 

이런 책을 읽노라면 산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느긋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가부좌 틀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고행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런 구절들 속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화가 되는 느낌이다. 이 가을의 문턱에서, 그리고 일에 치여 나날이 예민해져만 가는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며 이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이제 첫 몇 장을 읽었고 나머지를 다 찬찬히 읽어나갈 생각을 하니 마음에 기쁨이 스민다. 마치, 염색물감이 천을 따라 스며드는 것처럼. 이 책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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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9-09 0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길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즐겁게 웃는 이야기
엮어
어떤 일 있어도
홀가분하게 마주하시기를 빌어요.
곁에는 고운 책들이 있으니까요.

비연 2013-09-09 08:53   좋아요 0 | URL
^___________^

함께살기님, 좋은 말씀 감사해요~

그렇게혜윰 2013-09-09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나올때 확 궁금했다가 잊고 있었는데 비연님 글 읽으니 김화영샘의 유려한 문장들이 떠올랐어요..^^

비연 2013-09-09 08:54   좋아요 0 | URL
앗. 책만먹어도살쪄요님.. 첨 뵙겠습니다^^
김화영 교수의 글들은 참 좋아요, 언제 봐도.
그나저나 아이디가 완전 인상적이세요!

Mephistopheles 2013-09-09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성격 죽었다는 것에 내 스스로가 놀라는 중이랍죠....

비연 2013-09-09 13:20   좋아요 0 | URL
흠... 저도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게 왜 이리 안 죽는 건지.
주말에 마음을 잘 다스리고 왔다고 생각했으나 회사 오니 다시 울컥 중..ㅜ
 

 

그러니까 지금 멘붕 상태라는 거다. 열라 바쁜데, 도와주는 이는 없고 요구하는 이만 많고 아주 스트레스에 짜증이 몰아닥쳐서 밤마다 악몽을 꾸어대고 있다. 어제는, 막 좇기고 막 잃어버리고 막 늦고..  내가 싫어해서 이젠 안 만나는 친구들도 나오고 내가 가급적 안 만나려고 피하는 선배들도 나오고... 계속 깨어댔더니 지금 머리도 아프다.

 

이럴 때는 복잡한 책을 읽으면 절.대. 안되는 거다. 설사 필요하다고 해도 옆으로 밀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머리를 쓰다가는 방전이 되어 버리는 거지. 지금 방전 되면 정말.. 큰일이다. 그래서 어제 밤에 집어든 게 리 차일드의 소설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리 차일드의 소설이다. 일단 읽어보고 재미있어야 다른 책을 사지.. 하면서 오래 전에 사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잭 리처>라는 영화가 나왔고 영화가 그닥 재미가 있진 않아서 책도 다시 안 끌리길래 바로 젖혀두었는데... 어젠 갑자기 눈에 띄었다. 그래. 이거다. 이걸 읽으면 다 잊을 수 있을 거야.

 

왜 하필 61시간일까. 2일도 아니고 3일도 아니고 2일 하고 13시간? 이런 애매한 시간일까, 왜. 암튼 무슨 사건이 나기 61시간 전부터의 일들을 쭈욱 쓰고 있고 지금 200페이지 정도 읽었는데 나름 흥미진진은 하다. 뭔 일이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악당으로 나오는 플라토는 철학자 플라톤의 이름을 가져간 것 같은데.. 플라톤이 알면 아주 자지러질 얘기지. 자기 키 작다고 놀린다고 발목 아래 부분 잘라서 그걸 포름알데히드에 담아 배달시켜주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이 뭘 꾸미는 지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정의로운 영웅 잭 리처가 다 해결해주리라 믿으니 마음이 편하다.

 

이런 류의 소설이 나에게 주는 안도감이란, 절대, 선이 이긴다는 거. 아무리 힘들어도 끝내는 주인공이 정의롭게 이기고 유머를 남기며 떠난다는 거. 그래서 읽으면서 긴장은 되지만, 매우 최악의 심정은 되지 않는다는 거. 그런 거다. 현실은 아니니까. 현실은, 애매모호하고 잘 모르겠고 예측 불가하고 선인지 악인지 구별도 잘 안되고 선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 답답하고 멘붕이고 짜증이고 스트레스이니까, 책에서라도 이런 안도감을 느끼면 좀 신경학상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늘도 이 상태 그대로 집에 가서 라면 먹으면서 다 읽어주리라.

 

뱀꼬리 1) 지금 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내 앞으로 오락가락 하면서 이야기를 종알종알 하고 있다. 사람이 싫으면 발자국소리도 싫은 법인데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지경이다. 내가 저 사람 안 보기 위해서라도 여기 플젝은 다신 안 나오리라 결심하고 있다..ㅜ

 

뱀꼬리 2) 리 차일드 번역본이 꽤 많네. 근데 표지가 다 이 모양이냐...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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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9-0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의 잭 리처와. 영화 속 잭 리처는..어찌 그리 괴리감이 오는지요....
톰 아저씨의 무리수가 아닐런지..

비연 2013-09-03 11:2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이... 톰 아저씨와 정말 안 맞는...;;;; 무리무리..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요시키 형사 시리즈 2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괴담과 트릭, 그리고 로맨틱한 분위기가의 결합. 시마다 소지의 글은 매번 읽을 때마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트릭을 만화처럼 풀어놓는다는 느낌이 든다. 대단히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긴 하지만 좀 억지스럽다는. 특히 이 책은 추리보다는 애정이나 헌신에 더 방점을 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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