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4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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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자주 하는 것 같다. 지금 6권까지 번역되어 나왔는데, 여차하면 그냥 원서로 볼 마음이 든다. 책도 가볍고 손에 쥐기에 적당한 크기라 번역본도 꽤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나는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해미시 멕베스 순경이 좋다. 왜? 이번 4권을 읽으면서 내가 이 주인공을 왜 좋아하는 지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그러다가 프리실라에게 가까워지기 직전에야 비로소 자존심 덕분에 가까스로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해미시 멕베스는 원숭이 같은 털복숭이 남자에게 홀딱 반해 정신을 못 차리는 저급한 취향의 여성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그런 남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프리실라."

(p35)

 

신분 차이가 완연한 프리실라 할버턴스마이스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시골 순경의 태도. 멋지지 않은가. 비위나 맞추려 한다든가 마음에 들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고 끝까지 나름의 품의를 지키려는 해미시. 굿.

 

그와 해미시는 유전자 지문 감식법으로 해결한 사건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프리실라는 다시 데이비엇 부인을 상대하게끔 남겨졌다. '이게 바로 해미시와 결혼하다면 내가 살아가게 될 그런 삶이란 말이군.'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해미시가 직접 총경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야망이 있음을 보여 주는 어떤 신호가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프리실라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데이비엇 부인의 심문 같은 질문도 그럭저럭 견뎌 낼 수 있었다.

(p59)

 

해미시를 좋아하는 것을 아직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해미시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은 프리실라. 하지만, 야망이 없는 남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녀는, 해미시가 시골에서 순경으로나 만족하며 살려고 하는 것이 비겁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이런. 야망이 뭔지나 아는 지. 야망을 가진 남자가 어떤 종류인 지 알기나 하는 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구만.

 

해미시는 한숨을 쉬었다. "날 여기 묶어 두는 게 내 아둔함이나 수줍음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쯤이나 당신 머리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난 로흐두를 사랑하고, 로흐두 사람들도 좋아하고, 여기에 있는 게 행복해요. 내가 왜 꼭 사회의 통념에 맞춰 로흐두 밖으로 나가 승진을 하고 돈을 벌고 하는 식의 성공을 해야 하는 거죠? 난 성공했어요, 프리실라. 요즘 나처럼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요."

(p228)

 

이 대목에서, 난 해미시 멕베스 순경을 좋아한다고 소리지를 뻔 했다. 이 얼마나 당당한가. 자신의 삶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고 남과 비교를 하지 않으며 자신의 행복에 충실한 모습. 이게 자칭 성공했다 하는 사람들이 봤을 때 대수롭지 않은 인생이면 어떤가. 이런 경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영리해야 이럴 수 있는지를 이해 못 할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해미시의 이 말 한방이 얼마나 좋은 지.

 

 

그때 데이비엇 부인은 블레어 경감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프리실라의 차가운 반응에 속이 쓰리던 참이었다. '블레어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데이비엇 부인은 생각했다. 그 말은 블레어라면 무조건 그들 앞에서 굽실거리며 아첨하리라는 사실이 보증된다는 의미였다... (중략) ... 블레어는 거의 뛰다시피 그들 곁으로 왔다. 데이비엇 총경도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블레어에게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전형적인 형사였다. 해미시는 특이하고 별나고 사람 기분을 상하게 했다. 솔직히 말해 진심으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을 사는 사람과 마주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p258-259)

 

역시 한 자리를 하는 사람은, 게다가 그 사람의 부인까지도, 자기 맘대로 안되면 싫어한다. 아주 작은 지위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러하다. 나에게 아첨해주길 원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원하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길 원한다. 나의 불행이 그에게도 자리해서 함께 고뇌하기를 원한다.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사람이 좋다. 권력 앞에 굽신 거리고 애결하고 살살 거리고, 그래서 나의 자존심을 높여 주는 사람이 좋다. 인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현실로도 그걸 목격하고 있으니까. 상당히 가슴 아프게, 절렬하게, 미치게.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부엌 식탁에 나란히 놓인 두 신문을 바라봤다. 광분한 존 벌링턴의 얼굴과 멕베스 순경의 행복한 얼굴이 보였다.

(p267)

 

고작 4권 읽었지만, 해미시 멕베스 순경이라는 캐릭터가 점점 좋아진다.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힘,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누군가를 죽이거나 해꿎이 한 사람들에게도 보이는 따뜻함, 유머 그리고 마을과 주변 사람들의 평온함을 지키려는 보이지 않는 노력들. 슬쩍 슬쩍 불법적인 일을 하면서도 얄밉지 않게 넘어가고, 사랑 앞에 약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부러울 정도로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자세.

 

반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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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6-11-0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실라는전권들에서 만난남자들을보면모두야망이가득한 인물들이고야망없는 헤미시를이해하지못하죠 헤미시가자신의생활에만족한다는걸이해하지못하는 가족들이속물인데 그자신역시 모르지만그런면이있죠 2권의공산주의자부터지금까지나머지권에서는 다행히남친이없죠 근데헤미시가다른여자한테관심이가서 과연두사람이이어질지 지켜보는것도이시리즈의재미중하나죠 썸아닌썸타는두사람의관계

비연 2016-11-06 20:25   좋아요 0 | URL
저도 이게 꿀잼이에요 ㅎㅎㅎ 프리실라가 야망없는 해미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해미시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가게 될 것이냐... 둘이 이어지면 어떤 모양새일까도 기대되구요 ㅋㅋ
 
모든 것이 F가 된다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1
모리 히로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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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지금에야 봐놓고서 호들갑을 떠는 것은 옳지 않다. 이건 너무나 유명해서.. 이미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오고 드라마로도 나왔다는 거다. 시리즈물도 착착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데, 난 이제야 읽고는 어머어머 한다. 정말 리뷰라고 쓰기도 민망스럽다.

 

그럼에도 백만년 만에 장르소설 리뷰를 쓰는 건, 닥치는 대로 읽어서 이젠 시들시들해지고 있는 이넘의 장르소설이라는 분야에서, 어라? 이건 시리즈물로 다 읽어볼까? 라고 생각하게 만든 간만의 책이기 때문이다.

 

S&M 시리즈라고도 부르는 이 시리즈는, 사이카와 소헤이라는 N대학 건축학과 조교수와 니시노소노 모에 라는 같은 대학 건축학과 1학년 학생이 콤비를 이루어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들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이다. 총 10부작까지 나왔다고 하고 이 <모든 것이 F가 된다>가 첫번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후기 보니 이게 원래는 첫번째가 아니었다고 불라불라 하던데, 그냥 생략)

 

이 둘의 인연은, 모에의 아버지가 사이카와의 은사이고 모에의 부모는 사고로 죽었으며 그 사고의 현장에 둘이 같이 있었다.. 로 이어진다. 모에는 워낙 잘 사는 집안이라 사는 데에는 큰 불편이 없으나 (오히려 일반 경험이 부족한 아가씨) 마음에 외로움이 남아있는 아이이고 사이카와에게는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라는 설정이다. 어쨌든 모에는 일종의 천재이고 사이카와는 천재는 아니라도 뇌구조가 대단히 괜찮은(이건 이 책에서도 설명된다) 남자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외딴 섬에 연구소를 두고 완전 격리된 상태로 생활하던 천재 과학자 마가타 시키 박사의 방에서 두 손과 두 발이 절단된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밀실도 이런 밀실이 없는데 어떻게 이걸 뚫고 사람이 죽어 나올 수 있는가가 해결해야 할 대상이었고. 이 마가타 시키 박사는 14살에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다중인격이랄까, 심신상실이랄까로 일단 풀려났던 인물이다. (조금 으시시하다) 그러나 공학 측면에서의 그녀의 천재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이 책은 철저하게 이공계적인 접근방법을 취한다. 내용의 전개나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나 대부분이 숫자와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트릭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아주 오래 전이라 좀 촌스러운 구석이 없지는 않으나 읽다 보면 오 이런 용어를 장르소설에서도 쓸 수 있구나 뭐 이런 감탄도 하게 된다. 그러나 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작가 모리 히로시의 생각들이 군데군데 배여난다는 것이고 그게 좀 재미있으면서도 옳다구나 싶다는 거다.

 

"오뚝이 인형 말입니까?" 하마나카가 되물었다. 상대방의 말을 되묻는다는 건 인식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증거이고, 대부분은 생각이 정지되었다고 봐도 좋다. - p46

 

헉. 들켰다... 시간 벌자고 되묻는 거,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일인가 보다, 나만이 아니라. 하하. 되물음으로써 나의 머리가 생각하기다보다는 잠깐 이해하는 데 시간의 간극을 벌이고자 하는 것, 이걸 날카롭게 지적하네.

 

"오호, 육수도 파는구나..." 모에가 일어서서 철판 쪽으로 다가간다. "우아! 이거 야키소바네요.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꽥! 야키소바를 한번도 안 먹어봤다고!?" 가와바타가 절규한다. 모두들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p79

 

나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야키소바를.. 그 맛난 야키소바를 ... 대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안 먹어본 일본인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고!

 

"기억과 추억, 뭐가 다른지 아나?: 사이카와가 담뱃불을 끄면서 물었다.

"추억은 좋은 일투성이, 기억은 싫은 일투성이요."

"그렇지는 않아. 싫은 추억도, 즐거운 기억도 있어."

"그럼 뭐예요?"

"추억은 전부를 기억하고 있지만, 기억은 전부를 추억하지 못해."

- p281

 

... 이 대목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다시. 추억과 기억을 이렇게 정의한 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추억은 전부를 기억하지만 기억은 전부를 추억하지 못한다.... 그래 그렇구나.

 

"일본에서는 같이 놀자고 할 때 섞어달라는 표현을 쓰지요.' 사이카와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섞다, 라는 동사는 영어로 '믹스mix' 입니다. 이것은 원래 액체를 한데 섞을 때 쓰는 말입니다. 외국, 특히 구미에서는 사람이 어떤 집단에 끼기를 원할 때 '조인트joint' 한다고 합니다. 섞이는 게 아니라 이어질 뿐... 다시 말해서 일본은 액체 사회이고, 구미는 고체 사회인 겁니다. 일본인은 저마다 '리퀴드liquid' 인 셈이지요. 유동적으로 혼연일체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사회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구미에서는 개인은 '솔리드solid' 이니 결코 섞이질 않습니다. 아무리 모여도 반드시 부품으로서 독립되어 있다... 흙벽을 쓰는 일본 건축, 기와를 쓰는 서양 건축과 딱 판박이군요."  - p414

 

이런 얘기를 장황하게 쓰면, 뭐랄까 작가의 장광설을 듣는 것 같아 살짝 기분이 안 좋아지곤 하는데 이 내용은 왠지 크게 공감이 갔다. 일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곘지. 그래서 혼연되어 섞이지 못하면 외로움을 느끼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것일게다. 개인이 완전한 개인일 수 없는 사회. 그래서 어딜 가나 무리지어 다니는 사회. 그게 일본, 우리나라 혹은 중국 같은 아시아권의 특징인 걸까. 구미의 사회는 개인이 개인으로서의 존재감만으로 함께는 있으나 언제든지 튕겨 나갈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 같고 말이다.

 

좋은 책이다, 여러가지로. 이후의 S&M 시리즈들을 망설이지 않고 보관함에 넣게 만든다. 아직까지는 진부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모리 히로시의 작품을 몇 권 더 읽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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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알리바이
로맹 사르두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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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사르두. 프랑스의 신진 소설가 중 한 사람이며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기욤 뮈소, 막심 샤탐 등과 같은 프랑스 현대 소설가들과 어깨를 겨루는 사람이라고 한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 형식의 작품들에서 중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묘사로 각광을 받았다고 하는데, 지금 이 소설은 철저하게 현재가 중심이며 배경도 미국의 뉴햄프셔주이다.

2007년 겨울, 뉴햄프셔의 어느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스물네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인 채 똑같이 총에 맞아 죽은 현장이 목격된다. 뉴햄프셔주의 경찰총경인 스튜어트 셰리든과 부하 형사 가르시아는 이 사건을 수사하고 싶어하나, 무슨 일인지 FBI에서 사건 일체를 가져가고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은 채 그들만의 수사를 하게 된다. 뒤이어 발견된 여러가지 증거들 덕에 셰리든은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고 우연히 이 죽은 사람들 중 일부가 벤 O. 보즈라는 추리소설작가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지역의 유서깊은 대학인 듀리스디어 대학의 젊은 교수 프랭크 프랭클린에게 이 사건의 협조를 구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흐름을 타게 된다...이 벤 O. 보즈의 소설은 그닥 유명하지는 않으나 살인장면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묘사로 현실과 환상이 상존하는 류였기 때문에 더욱 의심을 샀던 것이고.

이야기는 상당히 짜임새 있게 진행된다. 프랭크 프랭클린과 벤 O. 보즈, 그리고 셰리든의 3자 대결 구조가 볼 만 하고, 거기에 FBI 요원인 멜란치턴이나 듀리스디어 대학 학장의 딸인 메리의 이야기들이 가미되어 한번 손에 들면 놓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게다가, 결말 부분에 가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속도감이 붙어서 어어어~ 하다가 이런!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을 종이 위에 옮기는 소설가나 문학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현실과 상상력의 모호한 경계에 놓이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누구는 상상을 뛰어넘어 현실을 직접 반영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게 될 수도 있고. 그럼에도 우리에게 더 흡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 가상의 세계인지도 모르겠고. 지은이가 이번 작품을 통해서 <상상력, 결국 허구가 인간에게 현실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고 헀다시피 말이다.

특히, 로맹 사르두라는 소설가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옮긴이가 역자 후기에 적었다시피 프랑스의 추리소설과 요즘 많이 나오는 일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일본의 소설들에 비해 무게감이 있고 마치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듯이 처음에는 그냥 그렇게 시작했던 이야기들이 갈수록 좋아지는 디테일과 이야기로 사람을 은근히 매력시키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좀 담담하다고나 할까. 현대 작가라 프랑스의 예전의 작가들에 비해서는 요즘 세대의 소설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적인 글솜씨는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 문학을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 책은 많이 재밌다)

이 책의 내용은 이 제목 '최후의 알리바이'로 다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의문스러워하지만, 끝에 가서는 정말 경악스럽게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도 이 책의 좋은점이라고나 할까. 일본 추리소설에 조금 식상해있던 내게 꽤 멋진 의미로 다가온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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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잠들 수 없어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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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는 가끔 참 신기하다. 인간의 심성을 뼛속까지 꿰뚫을 것 같은 냉정하고 통찰력있는 이야기들을 자유자재로 써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 무섭다 못해 섬뜩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가 하면 장난스럽고 가볍지만 사람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서 넌지시 알려주는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이 책은, 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

며칠 많이 아팠다.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도 일어날 기운이 좀체 생기질 않았고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 읽기 정도 뿐이었다. 그렇지만 몸도 안 좋은데 마음까지 우울해지는 책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뚫어져라 서재를 쳐다보며 고른 것이 이 책이다. 새삼 알게 된 건데, 내 서재에는 무지하게 우울한 책들만 가득했다. 이 책 하나 고르는 데 몇 십분의 시간이 소요될 만큼.

'인정이란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다' 라는 속담의 의미에 대한 확연히 다른 두 관점을 말함으로써 이 책은 시작된다.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면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차갑게 대할 줄 아는 것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하다' 라고 말헀던 담임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뒤이어 들어온 교감선생님은 그 의미를 제대로(!) 정정해준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어 도와주면 자신이 언젠가 곤란한 일을 겪을 때 누군가 도와준다. 이 세상은 그렇게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이란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많이 도와주라' 라는 뜻이라는 것. 이 이야기는 처음의 의미에서 시작하여 두번째 의미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어느날 평화롭기만 하던 마사오의 집에 난데없는 유산산속이 일어난다. 어머니가 20년 전에 잠깐 도와주었던 '방랑의 애널리스트' 사와무라 나오아키라는 사람이 죽으면서 어머니에게 5억엔이라는 돈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돈벼락'을 맞은 이 가정은 엄청난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동네사람들의 눈초리, 세상사람들의 질시, 자선을 빙자한 협박전화와 우편물 등등. 게다가 어머니의 과거를 의심한 (그러면서도 자기는 쉴새없이 바람을 피워댔던) 아버지는 급기야 집을 나가게 되고 이 와중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궁금해진 마사오는 동기인 시마자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캐는 탐정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나둘씩 드러나는 진실들은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어찌보면 따뜻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평온한 생활로 위장된 평범한 가정의 진실과 의심, 그리고 위기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제자리를 찾고, 죽은 사람과 남겨진 사람간의 사랑과 신의는 다음 세대에게까지 고스란히 넘어가게 되고...그리고 주인공인 마사오에게는 인생의 가르침이 남겨진다.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 속에서도 반짝 반짝 빛나는 그런 교훈으로.

미야베 미유키가 1992년에 지은 작품이고 중학생인 주인공 덕분에 어찌보면 참 처연하고 불행한 상황도 엉뚱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변모할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답답한 상황인데도 경쾌하게 쓴 필체 때문에 머리 아파 배 아파 누워있는 내게는 유쾌한 한 편의 소설로 다가와서 좋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유명한 작품들, '이유'라든가 '모방범', '낙원' 등등등의 소설로만 이 작가를 알고 있다면 이 소품집같은 소설로 다른 면모를 확인해보기 바란다. 괜챦은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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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7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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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네 상대로 시건방진 말을 하는 것 같은데요. 요물이란 있지 않을까 의심할 때는 반드시 나타나고, 없다고 여기면 결코 아니 나오는 법. 두렵다고 생각하면 낡은 우산도 혀를 내뽑은 채 손짓을 할 테고, 고목에 걸린 헌 짚신도 삿갓 안을 들여다보겠지요. 세간에서 요괴로 불리는 무리는 모조리 사람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니, 당연히 스스로 내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p87)

항간에 떠도는 백가지 기묘한 이야기.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이 끌리는 것은, 기기묘묘한 이야기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글솜씨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요괴소설이지만 그 저변에는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깔려 있어서이다.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이고 사람의 일이라는 게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혹은 받아야 하고)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아야 한다는 권선징악의 내용이 내포되어 있으며 따라서 하늘 아래 '이상한' 일은 없다는 내용. 그게 왠지 대단히 심플하게 느껴져서 좋다.

팥을 이는 요괴의 이야기인 아즈키아라이. 여기에서 여러지방의 괴담을 탐문하고 수집하는 것을 즐기는 특이한 사내 모모스케는 미모의 인형사인 산묘회 오긴, 잔머리 모사꾼 어행사인 마타이치, 소악당인 신탁자 지헤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여러 곳에서 신출귀몰한 연극을 하게 된다. 사람의 잠재적인 죄의식 등을 이용한 이런 연극들은 감추어졌던 진실들을 하나씩 밝히게 되는데...

여우를 죽여 파는 일을 업으로 삼다가 결국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하쿠조스, 도박을 즐기는 악한이나 여자를 너무 즐겨 화를 벌게 되는 사내와 사람 죽이는 것이 천성인 사내들의 이야기인 마이쿠비, 병적으로 사람 베는 것을 즐기는 남자의 손에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을 위해 축생의 둔갑이라는 기묘한 비상식적인 상황을 멋들어지게 연출하는 시바에몬 너구리, 말장수이지만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 우마카이 초자가 가족을 잃으면서 미쳐가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비밀이 담긴 시오노 초지, 버드나무의 혼이 깃든 여인숙 야나기야와 그 주인장인 기치베, 그리고 죽어간 부인들과 아이들의 슬픈 이야기인 야나기온나, 그리고 죽은 자를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의 이야기 가타비라가쓰지

이 세상은 참으로 서글퍼. 그 노파만이 아니라고. 너도 나도, 인간은 모두 같아.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면서 가까스로 살고 있는 거라고. 그러지 않으면 살아있지 못해. 더럽고 악취 풍기는 자신의 본성을 알면서도 속이고 어르면서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우리 인생은 꿈같은 게 아닐까. (p502)

읽으면서, 무섭다거나 좀 특이하다거나 그런 느낌보다는 왠지 슬프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면 나만의 감상일까. 사악한 사람들은 발버둥을 치며 삶을 영속하려고 하나, 마음 어느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식이나 두려움까지는 떨치지 못하고 점점 흉포해지는 모습들이 슬프고, 사람이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많은 잔인한 심정들이 더 무섭게 느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진리는 그런 마음들을 민담이나 기담 등으로 변모되어 전해지게 된다. 아마도 교고쿠 나쓰히코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역시나 천재답다. 그리고 살면서 참 겸손해야겠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뜬금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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