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코스투라 1 - 그림자 여인 시라 샘터 외국소설선 9
마리아 두에냐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샘터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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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코스투라 1>의 부제는 '그림자 여인 시라'입니다. 온라인 상의 책 소개글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라는 문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1권에는 재단사인 그림자 여인 시라가 스파이 활동을 하는 내용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간에 시라가 의상실을 차리기 위해 위험한 일을 한 번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그런 본격 스파이 활동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라 코스투라는 2권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1권에서는 그저 이 여인이 스파이로 활동하기 전까지의 살아온 이력, 그리고 인물의 변화를 다룹니다.


솜씨 좋은 재단사의 딸로, 어머니가 다니던 의상실에서 바느질을 하며 연인과 소박한 행복을 계획했던 시라는 뜻하지 않게 한 남자를 만납니다. 결혼을 앞두고 타자기를 사러 갔다가 만난 이 남자는 쉬이 짐작하다시피 위험하고 나쁜 남자입니다. 위험하고 나쁜 남자의 매혹은 강렬합니다. 시라 역시 라미로 아리바스에게 빠져버리고 맙니다.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엄마도 버리고 결혼하려던 정인도 버리고 시라는 라미로와 모로코로 떠납니다. 화려하고 행복한 생활은 잠시. 두둥. 라미로는 그녀를 배신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그녀를 떠나버리고 맙니다.

여기까지가 라 코스투라의 서막입니다. 그 이후는 시라가 어떻게 상처를 극복하고 시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기까지 시라 주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 스페인 내전의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전쟁 때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위험한 스페인에 혼자 남겨진 엄마도 데려오지 못하는 가운데 시라의 죄책감과 마음의 짐은 깊어져만 가죠.

그러다 우연히 시라는 잊고 있었던 바느질을 다시 시작합니다. 시라를 거두고 있던 칸델라리아가 시라의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한 눈에 알아봅니다. 시라의 의상실을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모로코에 파견와있던 군부 유력인사들과 남편을 따라 남의 나라로 와서 할 일이라고는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각종 파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없는 그들의 아내들을 고객으로 하는 고급 의상실이 칸델라리아의 장사꾼다운 기질과 시라의 타고난 재능으로 인해 모로코 테투안에 들어서는 거죠.

1권에서는 거의 이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아마 2권에 이르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유력인사들과 그들의 아내 혹은 정부가 시라와 어떻게 해서 인연을 맺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확실한 재능은 신뢰를 부르는 걸까요, 철 없이 예쁜 소녀에서 그림자 여인으로 거듭난 시라가 과연 2권에서는 또 어떠한 변화와 활약을 보여줄지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 1권의 역할인 듯 합니다. 아직 2권을 읽어보지 못한 저로서는 그래서 1권에 대한 어떠한 평가를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 상황 당시의 스페인의 모습, 그리고 그보다 더 자세하게 다뤄진 모로코 탕헤르와 테투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야기의 빠른 전개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 캐릭터의 뚜렷한 개성 또한 <라 코스투라 1>이 술술 읽히게 하는 가장 큰 매력 포인트입니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을 제쳤다는 자극적인 홍보문구가 이런 연유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시라의 시각에서 1인칭으로 쓰였다는 점도 다소 독특한 인상을 줍니다. 그 당시에 이런 여인이 있었다더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을 직접 겪은 주인공이 회고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주워들은 영웅담이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피부에 와닿는다고 해야할까요.

암튼 이제 2권을 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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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개정판이 나온다면 교정교열을 좀 더 세심하게 보셔야 할 듯 합니다. 제가 적어놓은 오타만 10개가 됩니다 

   55쪽 마지막줄 오타 '놓치'
-created on 2013-06-01 17:27:53 +0000

84쪽 2문단 마지막줄 '활력을'->'활력이'
-created on 2013-06-02 03:18:03 +0000

131쪽 8번째 줄 '라프전쟁' -> '리프전쟁'
-created on 2013-06-02 05:13:06 +0000

134쪽 마지막줄 '점식' -> '점심'
-created on 2013-06-02 05:42:43 +0000

189쪽 4줄 '얼마큼'
-created on 2013-06-02 06:32:32 +0000

263. 3문단. 5-6째줄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따위'
-created on 2013-06-02 07:44:06 +0000

282. 각주 "다 (됐)습니다."
-created on 2013-06-02 08:11:32 +0000

391쪽 5문단 마지막줄 '해안지방으로(의) 대피시킬 계획인데요'
-created on 2013-06-11 13:52:47 +0000

405쪽 각주. 모로코의 전통요. 전통요리 아닐까
-created on 2013-06-11 14:04:02 +0000


419쪽 8줄 끝 '정치의 정자로' '정자도'
-created on 2013-06-11 14:1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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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서울
방현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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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서울은 방현희 작가의 단편 일곱 편을 엮은 단편집입니다. 제목과는 달리 모든 소설의 배경이 서울은 아닙니다. 중국, 영국, 일본을 배경으로 하거나, 서울 혹은 대한민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지만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타국에서 온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거나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집의 제목이 '로스트 인 서울'인 것에 대해 곰곰 생각해봅니다. 서울에 와서 길을 잃고, 또 서울에서 길을 잃어 다른 곳으로 떠나지만 대부분의 주인공은 그 곳에서도 길을 잃습니다. 서울과 상관 없는 사람들은 또 그 사람들대로 그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서울'에서 또 길을 잃고 맙니다.

 

첫번째 단편은 표제작인 '로스트 인 서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렉안나와 그렉안나의 무력한 애인은 이 소설집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에 굉장히 부합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렉안나는 먼 우즈베키스탄에서 서울까지 왔지만 결국은 길을 잃고 말고, 그녀가 길을 잃으니 그녀를 통해 길을 찾은 듯했던 무력한 애인 역시 그녀도 잃고 또 길도 잃습니다. 먼 타국이든,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든, '서울'이라는 공간은 그렇게 사람들이 쉽게 조난 당하고 그렇지만 쉽게 구조받지 못하고 적지 않게 사라지는 그런 도시입니다. 이 작품 안에서는 그렉안나나 그 애인과 대척점에 있는 가해자처럼 보이는 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방식이나 다른 원인이나 다른 경로일 수는 있겠으나 그 역시 그 곳에서 아직 구조되지 못한 조난자이기 때문에 그렉안나를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곁에 두지 못했던 겁니다.

 

두번째 단편은 '세컨드 라이프'입니다. 아내와 중국으로 여행간 남편이 그곳에서 자신의 또 다른 인생을 보는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인생을 보지 못하는 아내가 아무리 증언해도, 남편은 아내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내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형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사랑에 대한 아련한 감정이, 낯선 땅에서 또 다른 인생을 보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북경에서의 삶이 그의 두번째 삶인 걸까요, 아내가 증언하는 아내와의 시간이 두번째 삶인 걸까요.

 

세번째 단편은 '탈옥'입니다. 주가조작으로 감옥 신세를 지게 된 주인공이 또 다른 작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탈옥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실패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왠지 스포일러 같지만, 주인공이 탈옥에 성공한다면 아마 이 작품은 현대소설의 범주에 쉽게 들지 못하겠죠. 현대의 소설들은 대부분, 성공담이기보다는 실패담이고, 설사 그것이 성공담이라 해도 '그리하여 그들은 결혼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라든지, '그리하여 결국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자유를 되찾았습니다'와 같은 방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탈옥을 위해 떼어내도 상관 없는 장기를 하나하나 떼어낸다는 나름대로는 완벽한 계획을 세웁니다. 수술할 때 빠져나가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완벽한 계획을 꿰뚫어보는 인물이 존재합니다. 빅브라더인 셈이죠. 근대 이후의 인간들은 언제나 탈출에 필패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하는 것 같아 서글픕니다.

 

네번째 단편은 '그 남자의 손목시계'입니다. 나의 엄마를 늘 때리는 남자, 그걸 보고도 그저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꾸만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거북한 남자, 그 남자가 애지중지 모으는 손목시계와, 그 손목시계의 출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남자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몰래 뒤를 밟는 나는, 엄마가 맞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피해있는 나에서 결국 한치도 나가지 못합니다. 이 남자는 왠지 그렉안나와 강의 폭력적인 정사를 비밀 공간에 숨어 훔쳐보고 듣던 그 남자와 같은 인물로 읽힙니다.

 

다섯번째 단편은 '후쿠오카 스토리-위급 상황에서의 이별에 관한 섬세한 보고서'입니다. 후쿠오카에서 외롭게 공부하던 시절 만났던 네 명의 연인들은 이제 서울에 삽니다. 그러다 작은 보트를 타고 다시 그들의 기원으로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장은 무슨 일인지 기절해 쓰러져버리고 설상가상으로 바닥에는 구멍까지 납니다. 그 위기의 순간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쌓여있었던 불만을 쏟아냅니다. 결국 그들은 죽지 않고 목숨을 구하지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인 목숨은 붙어있지만, 그들의 관계, 그 관계 속의 한 명 한 명, 그리고 후쿠오카 시절에서 시작해 다시 후쿠오카로 가서 끝나는 그 8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여섯번째 단편은 '로라, 네 이름은 미조'입니다. 서울이 싫어 머나먼 영국으로 시집갔지만, 그 곳은 또다른 서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랜 해외생활 후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은 아직도 그러네 어쩌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보면 그 곳 역시 같습니다. 한국에 사는 미조와 영국에 사는 로라는 그저 사는 곳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만 옮겼을 뿐입니다. 엄격한 남편에게 '그곳의 룰'을 따를 것을 끊임없이 종용받던 로라는, 언젠가부터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기 시작합니다. 소화해낼 수 없는 문화를 소화하는 것보다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소화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졌을까요. 그렇게라도 다 소화해내고 싶었던 걸까요.

 

일곱번째 단편은 '퍼펙트 블루-기이한 죽음에 관한 세 가지, 혹은 한 가지 사례'입니다. 원래의 피부색에서 흰색으로, 그리고 다시 파란색으로 바뀐 후 결국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이클 잭슨이 분명한 인물이 등장하고, 연예인이 된 후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게 된 M이 등장하고, 그 M을 흉내내다 그 M으로 보이게 된 M2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일곱번째 단편에서, 앞 여섯편을 읽으면서 일관적으로 느꼈던 거의 모든 것들을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헤쳐놓고 보면 방현희 작가의 단편들은 굉장히 모던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단편들 속에서 그것이 자연스럽고 모던하고 치밀하게 잘 드러났느냐 하면, 저는 다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알레고리들이 너무나 직접적이고 일차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렉안나와 강의 이야기도 너무 상투적입니다. 물론, 인테리어 일을 하는 주인공과의 만남이나 그를 통해 마련된 벽과 벽 사이의 비밀공간의 설정이 이 상투성을 조금이나 희석시켜주긴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등장인물을 보여주는 방식 때문인지 '사랑과 전쟁'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퍼펙트 블루도 그렇습니다. 직접적으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또 '프로포폴'이니 하는 사실들을 실제로 거론하는 것이 뭐랄까, 아마추어처럼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비슷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설정에 치중한다는 느낌인데, 그 설정마저도 너무 익숙한 모티프여서,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사고는 굉장히 현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서사나 플롯은 전근대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런 점들이 개인적으로는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요즘 서평을 쓰면서, 또 소설을 공부하면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좋은 소설은 누가 봐도 좋은 소설이고, 또 누가 봐도 좋아하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겠지만, 몇몇 손꼽는 작품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다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내가 읽어내지 못한 것을 다른 독자는 읽어낼 수 있고, 나는 좋지 못하다고 느끼는 방식을 다른 사람은 좋다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제가 쓰고 있는 이 서평들이 이 소설집이 좋은 소설집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기준은 전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와 비슷한 취향이나 관점을 가진 독자들은 저와 비슷한 감상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의 기준만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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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제너레이션 - 좀비로부터 당신이 살아남는 법
정명섭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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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책의 등장인물입니다. 좀비 불신론자죠. 산통 깨졌나요? 죄송합니다. 낚이셨나요? 그것도 죄송합니다. 

어쨌든 저는 좀비 불신론자입니다. 놀래키는 영화를 싫어해서, 시체인 줄 알았던 좀비가 벌떡벌떡 일어나고 안 보이는 데서 좀비가 갑자기 나타나는 좀비 영화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괜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처럼 계속 "에이, 좀비가 어딨어?! 그거 다 상상의 산물이지!"하고 좀비 존재를 불신하고 있다가, 언젠가 정말 좀비가 나타나면 속수무책으로 꼼짝없이 당하고 나도 좀비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안 믿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나름대로 몇 가지는 기억하려고 애 쓰며 읽게 되더군요. 안 믿긴 안 믿는데, 혹시 모르니까요. 그리고 대부분의 비극은 사실 어느 정도 예고되는 경향이 있어서 '미리 준비하고 대비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후회를 남기니까요.

좀비 제너레이션은 그런 책입니다. 그러니까, 좀비 불신론자이던 한 카페의 사장인 주인공이 어떻게 좀비 제너레이션으로 편입돼 좀비들에게 감염되지 않고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전하고 매뉴얼까지 쓰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책이죠. 좀비가 나타났을 때의 징후나 대피장소, 이동수단, 무기 등에 대한 매뉴얼이 함께 제시됩니다. 이러한 매뉴얼들은 서사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제시되기 때문에 겹치는 내용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실제로 겪은 후에 주인공이 다른 이들을 위해 남기는 매뉴얼인 셈이니까요.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면 이 책은 쉽게 읽힙니다. 좀비를 믿지 않던 자가 어떻게 좀비를 만나 그를 물리치고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다루는 모티프는 여타 액션영화에서도 흔히 보아온 모티프이기 때문에 친숙합니다. 이러한 친숙함은 독서의 속도를 높이고, 대충 빤한 결말을 예상하는 와중에도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읽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러니까 나도 결국은 좀비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고 훗날 '나는 다 알고 미리 준비했지'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미 좀비의 존재 자체를 좀 더 친숙하게 여기는 서양과는 다른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반영해서 쓴 소설입니다. 주인공이 좀비를 피해 대피하는 경로는 상수-합정 구간이라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져서 좀 더 실감이 난달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여진 역사 속 좀비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들은 어디까지 믿어야하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고도 다소 아쉬웠던 점은 오타나 비문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일일이 다 체크를 해뒀는데 이것도 한 번 정리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소재 자체는 그렇게 뻔하지 않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너무 뻔했다는 점입니다. 재미있는 책을 빨리 내는 것도 좋지만, 좀 더 꼼꼼하게 교정과 교열이 이뤄졌으면 좋겠고요, 좀비 소재가 이미 현대인들에게는 충분히 익숙한 만큼 좀 더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고 싶습니다. 다음 번에는 말이죠. (아직 좀비 서비이벌 가이드를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 책과는 또 어떻게 다를까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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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의 [마법의 순간]과 원빈 스님의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을 비슷한 시기에 읽었습니다.

 

코엘료의 [마법의 순간]은 작가가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추려서 묶은 책이고 원빈 스님의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은 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을 추려서 묶은 책입니다.

 

우선 원래 처세술이나 잠언집 같은 종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저의 취향을 밝혀야겠습니다. 두 책 다 대단한 감흥은 없었습니다.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어서 큰 실망은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불호' 취향을 뒤엎을 만한 놀라운 감동이나 반전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코엘료는 지금까지 펴내온 책들의 면면을 볼 때 오히려 트위터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고하는 글들이 평범하게 느껴졌습니다. 똑같은 삶의 지혜라도 유명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는 사람이 전하면 감동이 더 큰 법입니다. 게다가 코엘료는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이다보니 뭔가 그런 삶의 지혜가 빛나는 문장 속에 들어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140자라는 트위터의 글자수 제한 때문이었을까요. 다 맞는 말이긴 한데 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들이기도 했습니다. 아- 작가는 이런 것들을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하고 감탄할 만한 부분이 없어서 아쉬웠달까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원빈 스님의 책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역시 하시는 말씀이 다 옳은 말씀이기는 한데 너무 구구절절 옳은 말씀을, 너무나 평범한 문장으로 써놓으셔서 페이스북이 아닌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기대는 전혀 충족되지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는 살지 마라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그 말씀들 모두 옳은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그걸 몰라서 답답한 사람들이 이 책을 주로 읽을텐데 그러한 답답한 마음이나 고민에 대해서 구체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경험을 곁들여서 쉽게 썼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작은 행복이 소중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하고 욕심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뭔가 그 이상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보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책을 굳이 비교하자면, 그래도 트위터는 140자라는 제한된 글자수 내에 하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담다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파울로 코엘료가 문학작가이기 때문에, 그래도 좀 더 문학적인 향취가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여기까지 쓰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만 종교에세이에서 문학적 향취를 기대하는 걸까요? 종교에세이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자명한 진리를 쉬운 말로 해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할 뿐인 걸까요? 서로 기준이 다를 뿐이라면, 신뢰할 만한 누군가의 명쾌하고 단순한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 책들은 그들에게 좋은 책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좀 더 경험에 근거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듣는 대신 그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느끼고 싶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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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타이거! 그리폰 북스 9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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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책들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 나왔던 비슷한 책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평가되는 책들 말입니다. 예를 들면 입센의 [인형의 집]이 나왔을 때 문학 속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제시로 주목받았고 지금까지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습니다.


앨프리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 역시 SF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읽은 건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그 전부터 익히 들어왔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기 전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부담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작품이 내게는 별로 대단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부담감과 대단한 작품이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흔히 고전으로 손꼽는 작품들을 읽을 때 이런 부담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면 저는 이미 등장 당시 파문을 일으키고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고전들 이후의 작품들도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문학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작품들 이전의 작품들만 읽다가 그 중요한 작품을 읽었다면 저 역시 똑같이 놀라고 감탄하고 충격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고전과 최근 작품들을 왔다갔다 하면서 읽고 있고, 또 처음부터 그런 문학사적 의미나 가치를 염두에 두고 읽는 연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나왔을 때는 굉장히 신선했겠지만 지금 봐서는 크게 놀랍지 않은 작품들(하지만 그런 측면을 떠나 지금도 여전히 훌륭하고 감동적인 작품들)을 읽을 때, 이 작품이 왜 중요하고 왜 그 당시에 새로웠는지를 알아보기 힘든 그런 고전들을 읽기 전에는 늘 긴장이 됩니다.


[타이거! 타이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소설의 팬들 사이에 이 작품은 거의 성경 수준으로 모셔지는 광경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 작품을 읽을 때 그 정도의 감동과 경탄을 경험하길 기대하고 또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대가 그렇듯 이 사람들은 다른 시대를 동경했다.

p.11


초반에 읽은 이 문장은 제게도 기대감을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재미있었습니다. 걸리버 포일이 우주에서 조난당했다는 설정도, (지금은 꽤 익숙한 모티프이긴 하지만),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습니다. 실제로 전개된 이야기도 모두 흥미로웠습니다. 우주에서 조난 당한 평범한 남자 걸리버 포일이 자신을 구할 수 있었지만 외면하고 가버린 '보가'호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면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되고 오직 복수를 위해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만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다양한 상상력의 소설을 읽어보고 영화도 보고 한 저로서는 이 모든 게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다 읽고 나서 우와! 하면서 찬양을 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프리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는 매력적입니다. 정신감응이동이라고 불리는 '존트'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도 앨프리드 베스터라지요. '존트'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뭐가 폭발하는 거지?"

"폭발?"
"터지는 소리 말이야. 꽤 멀리서 들려오는 걸."
"우울한 존트야."
"뭐라고?"
"우울한 존트. 이따금 더 이상 견딜 수 없어하는 누군가가 이 동굴에 한목숨 바친 거지. 거칠고 울적한 그 어딘가로 가는 거야."
"제길."
"맞아. 이곳 사람들은 자기가 있는 곳을 몰라.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우울한 존트를 하는 거야...... 그러면 그 사람들이 산맥 속에서 폭발하는 소리를 우리가 듣게 되는 거야. 쾅! 우울한 존트야."

p.102


이 문단은 꼭 미래의 우주의 미래의 감옥에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고 있는 저에게도 공감대를 불러 일으킵니다. 마치 이 작품 속 미래인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존트하듯이 저도 작품을 통해서 지금에서 미래로 또 미래에서 지금으로 존트가 가능한 기분이랄까요. 이런 게 바로 문학의 힘이겠지요. 


이 문단이 좋아서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누군가는 '존트'가 '존나 트래블'의 약자냐고 물었습니다. 재미있는 연상입니다. 그리고 꽤 설득력도 있습니다. 


잠시 이야기가 샜습니다. 복수라는 삶의 이유를 찾은 후로 다른 사람이 된 걸리버 포일이 능력을 키우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책략을 쓰고 위험한 상황을 빠져나가고 사랑하게 된 여인이 결국은 적이고 그 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줄거리는 그 자체로 재미를 줍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60년이 지난 작품이라서 그럴까요? 이렇게 다층적이고 능동적인 걸리버 포일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놓고도 결국 결말부분에 가서는 좀 시시하게 그를 교화시켜서 착하게 마무리지었던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그 이전의 작품들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들은 앨프리드 베스터가 여기까지 한 것만으로도 크게 감탄하지만요. 


쓰다 보니 결국 [타이거! 타이거!]는 의미 있는 작품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전에 문학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바람직하고 평면적이었다면 걸리버 포일은 그야말로 입체적인 인물이니까요. 이 작품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걸리버 포일이라는 인물이기 때문에 인물이 입체적이라는 것은 이야기 또한 입체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SF소설이다보니 단지 강렬한 복수심을 품었다고 해서 평범했던 사람이 이렇게 강하고 다양한 능력을 갖춘 대단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작품은 베스터가 살고 있던 그 사회보다 훨씬 나중에 도래할 사회였으니까 그래서 모든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가가 만들어낸 사회 속의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니까 말입니다. 


이 작품이 문학사에서 가지는 중요한 의미에 대한 논의에 의견을 보태고 끼고 싶다는 부담감이 없었다면 오히려 더 편하고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점을 의식했기 때문에 이 작품만의 매력을 하나라도 더 발견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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