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하고 따뜻하고

나도 한입 먹자, 하며 그녀는 뜨거운 떡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덥석 떼어 입에 넣었다.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쉰 것을 먹고 있었다는 것을 들켰다는 게 부끄러웠고, 괜찮지? 하고 물어가며 동생에게 그걸 먹이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고, 지금 이 집에 어른이 없다는 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실은 어느 것을 가장 부끄럽게 여겼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꼭 다문 입속에 떡이 뜨겁게 엉겨 있었는데 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만 주눅이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쉰 떡을 입에 넣었으니 곧 뱉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기네 어머니는 떡을 우물우물 먹으며 살풍경한 부엌을 둘러보고, 설탕을 입에 묻히고 있는 나나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끝까지 떡을 뱉지 않고 삼킨 뒤, 이 떡의 맛이 좋으니 자기네 밥이랑 바꿔 먹자며 나나와 나를 벽 건너편으로 데려갔다.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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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은 사진 한 장이 너무 에드워드 호퍼 작품 같아서, 새벽이라서, 알랭드보통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호퍼를 당신의 책에서 처음 알게 돼서 그냥 이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세상에,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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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읽기를 중단한지 좀 됐다. 번역이 어색하고, 네팔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알레고리가 너무 단순하고 유치했다. 혹시 이런 것까지도 번역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는 주로 번역되지 않는 언어의 번역본을 읽는다는 것에 회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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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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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감상을 적다보면, 안 보이던 지점이 보일 때가 있다. 보고 나오면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뭔가가 쓰고 싶어서 써보면 다시 읽히는 지점들이 있는 경우. 때로는 영화 자체보다 그 후의 내 해석이 마음에 들어서 영화에 다시 애정을 가지게 된 영화도 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은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서사평론집이다. 그가 읽어주는 영화를 보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우연히도 신형철 평론가가 다룬 영화들 대부분이 내가 봤거나 보고 싶어했던 작품들이었다. 본 영화에 대한 큰 인상에 있어서는 대체로 느끼는 바가 비슷했다,고 하면 내가 오만한 것이고, 내가 어렴풋이 감지하고 지나쳤던 것이나 아예 놓쳤던 부분까지 훨씬 더 섬세하게 읽어주어 굉장히 재미있게 들었다. 마치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것 같은 꼼꼼한 해석이 이 책의 제목과도 같았달까.

본 영화지만 작가의 해석과 평가가 너무 후하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었는데, 그건 [청포도 사탕]. 이 작품을 읽은 방식이 이 글의 가장 처음에 말한, `꼼꼼하게 다시 읽다보면 점수가 후해지는` 그런 경우에 속하는 게 아닐까 감히 짐작한다. 저마다 자유롭게 영화를 보고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작가는 이 영화에 대해 느끼는 부족함과 작위성을 지적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영화.라고 마무리했다. 자세히 알고 보면 사연 없는 사람 없듯이 창작자의 의도에 너무 관심을 가지다보면 그 의도가 좋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서도 냉정해지기 힘들어질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감독이든 소설가든 감상하는 이가 그 의도 자체를 굳이 애써서 읽어내려하지 않아도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야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반면 [사랑니]에 대한 감상 역시 신형철 평론가와 나는 다른데, 이 경우는 [청포도 사탕]에 대해 쓴 것과 달리 같은 영화를 서로 다르게 봤다는 사실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평론이었다. 차이는, 누가 봐도 작위적인 설정과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그 의도의 선함으로 인해 사소한 단점으로 평가되는 것인가([청포도 사탕]), 보는 사람에 따라 작위적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작위성이 드러나기 전에 감독이 성의있게 그 토대를 쌓아두었는가([사랑니])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랑니]는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졌다.

반면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는 신형철 평론가를 통해 본 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궁금했는데, 알게 된 이상 그 영화를 볼 자신이 없어졌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영화를 실제로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다른 관객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읽는 편이 훨씬 좋다.

다른 사람이 이미 창작하고 공들여 쌓은 서사를 정확하게 읽고 쓰고자 하는 노력과 욕심(원래는 불가능할 것인 뻔한데도)만큼 평론가의 평론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덕목은 없는 것 같다. 그의 정확함과 겸손함이 이미 본 영화임에도 다시 읽는 것이 즐겁도록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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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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