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년 전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소설인 <파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대충 내용은 생각나지만 책을 읽고 나서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당시 적어놓았던 소감을 들춰보니 희망과 공포라는 두 글자에 매료되어 있었다. 지옥의 끝에서라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산산히 부서뜨릴 수 있는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나기.

그럼 이번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나서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영화의 줄거리는 소설과 똑같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던 한 가족이 파산 위기에 처하자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다. 하지만 캐나다로 떠나던 화물선은 푹풍우를 만나 침몰하고 구명보트 위엔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벵골 호랑이, 그리고 주인공인 파이가 타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동물들은 먹이 사슬에 따라 죽어가고 호랑이와 파이만 남는다. 이 둘은 227일간 바다 위에서 공존하게 된다. 파이는 이윽고 멕시코 해안에 닿아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일본 선박회사는 배가 침몰한 이유를 알고자 하고 파이는 자신의 생존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상식적으로 이해될만한 스토리로 말이다. 소설에선 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던 같은데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일거라 믿는다.

아무튼 소설과 흡사한 이야기 덕분에 영화를 본 소감 또한 별반 다르진 않았다. 삶에 대한 의지, 즉 희망을 끝끝내 지켜내야 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또하나 덧붙여져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다.

파이는 어렸을 적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차례로 믿게된다. 게다가 어른이 된 지금은 유대교를 가르치는 강사다. 어떻게 여러가지 종교를 믿으면서도 내적인 갈등이나 혼돈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건 모두가 나에게 똑같이 생명을 주신 신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파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이런 밑바탕을 전제로 들으면 달라진다.

파이가 난파한 화물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은 하나다. 하지만 그것의 이야기는 희망으로 가득찬 벵골 호랑이와의 공존을 말하는 것과 절망과 공포감, 끔찍함으로 이루어진 사람들간의 살육으로 이루어진 것 두가지가 있다. 이 두가지 이야기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이 세상엔 잔인한 살인자들도 존재하고 한없이 베푸는 성인들도 존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두 이야기 만큼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믿는지에 따라서 말이다. 결국 태어나서 죽는다는 사실은 매 한가지나 우린 희망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도 절망이라는 좌절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오직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가 문제다. 두 이야기를 모두 믿는다 해도 결국 선택은 내려져야 한다. 파이는 희망을 선택했고 믿었다. 희망을 선택한다고 해서 삶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벵골 호랑이와 단 둘이서 망망대해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희망이 삶을 쉽게 이끌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살만한 것으로는 만들어줄련지 모른다. 반대로 절망감에 쌓인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 것인지 상상해보라. 자, 그럼,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가.

 

2. 영화는 물의 향연이다. 바다가 얼마나 예쁜지, 생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3D를 통해 몽환적으로 보여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3D 영화가 하늘을 배경으로 하거나, 앞뒤로의 움직임을 사실적 입체감으로 표현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마치 하늘 위에서 날고 있는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깊은 바다에 비친 별들 위로 지나가는 보트의 모습, 투명한 바다 속 해파리들의 유영과 고래의 등장, 고요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잔잔한 바다의 모습 등, 움직임이 극히 자제된 영상들이 3D를 통해 신비감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투명함이 주는 깊이감. 3D의 또다른 매력이다. 그리고 이 신비함이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는 희망을 밝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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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0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을 읽진 않았는데 이 영화는 꼭 3D로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안 감독이기도 하구요.^^

하루살이 2013-01-0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반엔 조금 지루한 면도 있지만, 바다를 보여주는 풍경은 꿈속을 여행하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3D로 볼만한 작품으로 강추입니다.
 

 

 

한강

 

 

 

 두타산 쌍폭포

 

모든게 얼어붙었다. 한강도 그 출렁거림의 자태 그대로 멈춰섰다. 산 중의 폭포도 꼼짝하지 못한다. 언다는 건 마치 시간이 정지한듯한 인상을 준다.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즉 변화가 없다는 것은 시간이 사라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도 얼어붙어 있는 것은 아닌지 연초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변화없는 일상의 되풀이. 물론 안정적인 삶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행복을 키워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왠지 모를 권태가 느껴지는 단어다. 느림이 주는 여유가 아니라 바삐 돌아가지만 반복되는 것, 그래서 내가 어디 서 있는지조차 가끔씩 잊어버리게 하는 것. 우린 얼음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님 나를 얼려버리고 얼음 속에 갇혀 지내온 것은 아닐까.

수십년 만의 한파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온통 꽁꽁 얼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살아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얼음을 깨고 봄을 부른다는 것이다. 변화의 싹을 틔운다는 것이다. 그래, 기지개 한번 켜고 봄을 불러보자. 세상이 온통 얼어붙어 있다 하여도.

 

 

 

 얼어붙은 꽃망울 속에서도 봄은 움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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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행동 하나도 정성을 기울여 하는 것이 곧 명상이고 마음 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시선을 가능하면 먼곳에 두고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곧 명상하는 태도다. <지리산에서 보낸 산아초 차이야기 2> 61쪽

멈추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보지 않으면 귀 기울일 수 없다는 말은 숨길 수 없는 진리다. 114쪽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있다.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습관을 갖는 것은 매 순간 순간 새로운 것을 배우고 행하듯 살아간다면 그 정보의 홍수에 뇌가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순간마다 결정하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습관을 만든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습관이 형성되면 우리는 마치 자동기계처럼 행동해버린다. 그 습관의 동기화 따위는 잊어버린채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 습관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왜 이런 습관이 생겼고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나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습관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명상이지 않을까. 작게는 커피나 차를 마시는 일에서부터 크게는 오늘 하루 전체를 돌아보는 일. 그리고 곰곰히 귀 기울이고 들여다보는 일. 명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듯 싶다.

그렇기에 나를 바꾸고자 한다면 명상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나의 습관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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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 관음암과 관음폭포

 

 

강원도 두타산에 있는 두타산성에서 바라본 겨울 관음암은 절경이다. 마치 관음암에서 떨어지는듯 길게 얼어붙은 관음폭포가 그 신비함을 더해준다. 나무들 사이에 숨기듯 안겨있는 관음암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암자는 사람을 피해 숲으로 들어간다. 관음 즉 관세음보살이란 중생의 고통에 찬 소리를 듣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고통을 걷어내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그런데 왜 관세음보살암자는 산으로 들어간 것일까. 왜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않는걸까. 깨우침은 관계를 끊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일까. 깨우친 후에야 비로소 산을 걸어나오는 것일까. 청정한 곳에서의 깨우침은 과연 풍진 세상의 중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설 수 있을까.

반대로 관음암을 바라보고 있는 두타산성은 피로 얼룩진 곳이다. 임진왜란 때 피난 온 백성들을 왜구들이 무자비하게 살육한 곳이다. 이곳 험한 산 중턱까지 산성을 쌓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던 백성들을 쫓아와 죽여야만 했던 그 잔인한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관음암과 두타산성.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인간의 두 건축물이 삶의 비애를 한껏 느끼게 만든다. 피하고자 했지만 피할 수 없는 곳, 피해야만 피하지 않을 수 있는 곳. 삶은 아이러니다.

 

 

 

 

 

동해 등대에서 바라본 두타산, 청옥산 전경. 가운데 부분 제일 먼 곳에 보이는 산줄기가 두타산과 청옥산 정상이다. 두타산, 청옥산을 가려면 동해고속터미널에서 길건너편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 가량 들어가면 된다. 시내버스는 약 30분마다 1대씩 무릉계라 써있는 것(12로 시작되는 버스)을 타면 된다. 두타산의 시작은 해발 150m 정도여서 다른 산들에 비해 낮은 곳부터 걸어올라가야 한다. 그만큼 생각보다 힘든 곳이다. 두타,청옥을 한번에 종주하려면 7~9시간 정도 넉넉히 잡아야 한다. 겨울산행 미끄러운 길을 생각한다면 더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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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의 <끌림>이라는 책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한 걸 그만, 두고 온 거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건데 과연 나는 찾으로 갈 성격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

그것이 물건이라면 포기하겠지만 사람이라면 아주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100% 동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따라오지 않겠다면 어떡해야 할까. 아니, 그렇게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있긴 한걸까.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 위에는 없다.

위의 말은 또 어떤가. 맨처음 했던 가정에 대입해보자. 이번엔 반대로 내가 남겨진 대상이라고 해보자. 홀로 낯선 곳에 떨어져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 믿는 그 사람이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끝끝내 나를 찾으러 올 것인가. 그 믿음이 흔들린다면 세상이 흔들린 거다. 그러나 믿는다. 누군가 흔들리는 나의 손을 잡아줄 것임을. 나또한 흔들리는 누군가의 손을 잡을 것임을. 기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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