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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teen_포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시다 이라, 이 작가에 대해서 나는 좀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듯싶다. 아주 사소한 이유들로 인한 착각이었다. 마약이나 폭력을 연상했던 건, 작가의 원작으로 그린 어떤 만화책(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크 파크) 때문이고, 전작들에 대한 맘에 드는 리뷰들의 기억도 절망, 무거움, 어두움이라는 이미지였다는 것. 책을 읽기도 전에,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단정을 한 것이다.


청결한 하얀색의 겉표지를 벗겨내면, 서늘한 파란색이 짠하고 나타나서 ‘예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책. 맘에 드는 사람, 물건을 찾았을 때 딱히 이유가 없는 것처럼 예쁘다는 기준도 그랬다. 14라는 숫자와 이야기와 네 명의 아이들, 그걸로 설명이 됐다.


불치의 병에 걸린 친구를 위해, 그 나이에 누구나 꿈꾸지만 용기가 없어 포기할 법한 성적 환타지를 실현시키는가 하면, 불륜(그 단어가 매혹적이라는 이유로)의 상대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쳐 싸움(사실은 맞아주기)을 하고, 미필적 고의에 의해 아버지를 죽인 친구를 위해서는 눈물겨운 합작편지를 보내는 14세는 보석 같은 시절이다.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레 나의 14세가 어땠는지를 회상하게 되는데,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4세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수가 있고, 친구가 있어 바닥까지 다다른 절망과 공포에서 탈출할 수도 있다. 14세는 세상이 가장 만만했고, 삶은 꿈과 열정으로 펄펄 끓었으며, 자아는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시기이고, 닮은꼴의 친구들과 맹목적으로 어울리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가출한 임신소녀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선언하는 14세의 다이,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의 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울먹이는, 그래서 피가 다른 아이라면 안심하고 키울 수 있겠다는 고백은 가슴 아프지만 올바르다. 14세는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무한가능성의, 순수와 죄의 경계가 희미한, 무섭고도 슬픈, 14세는 그런 나이다.


책을 읽고 조카아이를 떠올렸다. 14세가 되는 날, 기념으로 선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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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1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세면 중1때이군요...허약함으로 몹시 우울했던 봄날의 교정
그곳에 슬프도록 찬란했던 백목련이 생각납니다.
그 후 아이는 강철여인이 되었지요. 14세의 열병...무섭고도 슬픈 나이 맞아요.

겨울 2006-03-12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세는 앳된 청춘이었어요. 교환일기를 쓰는가 하면 인생은 고해라고 한껏 폼을 잡기도 했고, 앤을 처음 만났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고, 헤어지기 싫어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버스정류장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제 기억에도 백목련이 황홀했어요.

잉크냄새 2006-03-1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1년 늦게 입학하여 14세때 국민학교 6학년이었죠. 사춘기가 늦어서인지 그때의 기억은 그저 즐겁고 신나던 흙의 놀이문화에 빠져있던 시절이네요.

겨울 2006-03-1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여자아이들은 꽤나 조숙하답니다.^^ 저도 국민학교 6학년까지는 못말리는 말괄량이였어요.
 
죽음의 닥터 - 전2권 세트 - 법의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퍼트리샤 콘웰 지음, 허형은 옮김 / 노블하우스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케이 스카페타를 읽다. 공포 영화 절대로 안보는 사람이 공포 소설을 즐기는 것은 아이러니다. 고로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 알지 못하는 것에는 무감각하다. 그것이 설령 허구의 이미지일지라도 일단 눈에 들어와 박히면 공포감은 배가 되어 버린다. 이상한 조화속이다.


두 번째로 읽는 스카페타 시리즈 ‘죽음의 닥터’도 역시나 흥미진진, 잠을 잊게 만든다. 왜 이렇게 재밌고 왜 이렇게 빨리 읽히는 거야, 투덜투덜 불평 아닌 불평을 하면서 읽어치우고 나니 다른 시리즈가 읽고 싶다. 늘 이게 문제다. 읽고는 싶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 사는 족족 쉽게 읽히지만 소장하고픈 욕망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 이것이 좋아하면서도 그다지 많이 읽지 않는 변이라면 변이다.


케이 스카페타의 매력이 누군가는 욱, 하는 성질에 있다고 했는데, 사실이다. 그녀는 그녀의 직업이 갖는 냉혹하고 무감각하고 무자비한 이미지와는 달리 엄청 감정적인 인물이다. 주변의 누구에게나 쉽게 감정이입을 하고 울고, 화내고, 번민, 초조해 한다. 참혹한 모양새로 부검실로 실려 온 희생자 개개인의 처지를 동정하고 연민하며 그들의 죽음에 깃든 비밀과 복수를 다짐한다. 그래서 그녀의 직업 속에 녹아든 사생활은 늘 혼란으로 걷잡을 수가 없다.


그녀에게 사랑은 일과 별개의 것이 될 수가 없어 벽에 부딪친다. 병든 엄마와 누이동생과의 불화도 마찬가지다. 유일하게 아낌없이 그녀 자신을 던져 지켜주고자 하는 존재 ‘루시’도 그녀의 일과 너무 가깝게 있어 그녀에게는 크나큰 고통의 원천이다. 때때로 그녀의 징징거림에 짜증이 나서 주인공이 뭐 이러냐고 웅얼거리다가도 이내 그것 때문에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무엇이든 다 가졌고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이의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어야 하지만 케이 스카페타가 홀로 치루는 의식과도 같은 고통과 사색을 통해 독자인 나는 감동한다. 소설 속의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매력적인 잊을 수 없는 케이 스카페타를 만난 것,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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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0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고 싶어서 보관함에 넣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리뷰.^^

겨울 2006-01-08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다닥 쓴 거라, 약간의 오버가 없지 않은데요?
이거 전에 읽은 '카인의 아들'이 좀 더 재밌었어요.
시리즈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야 제맛인데, 어쩌다보니 거꾸로 읽어나가게 생겼어요. 이 다음엔 '사형수의 지문'을 읽을 계획입니다.

kleinsusun 2006-01-0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카페타, 정말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한번도 안 읽어봤는데....
보관함에 넣었어요.^^

겨울 2006-01-0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 스카페타, 멋진 여성입니다. 그리고 현대 미스테리 소설계에서 독보적인 여주인공이라는 사실. 제가 좀 여성을 편애하는 지라. ^^
 
카인의 아들 - 전2권 세트 - 법의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퍼트리샤 콘웰 지음, 홍성영 옮김 / 노블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앓아누워 열에 시달리는 동안, 초저녁 일찍 잠을 자기 시작하면 꼭 한밤중에 한 번은 깨게 된다. 새벽 한두 시나 혹은 서너 시경인데, 이런 경우 그냥 무식하게 불을 끄고 눈을 감는다고 달콤한 잠이 쏟아지는 일은 없다. 일단 따뜻한 차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면서 몰입에 적당한 소설을 펴든다. 예를 들어, 사두고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않고 있던 퍼트리샤 콘웰의 <카인의 아들>같은, 얇고 그래서 손에 들기에 가벼운 책이다. 베개를 쌓아 등을 기대고 반쯤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한없이 약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홀로 사는 아픈 여자가 새벽에 일어나 소설을 읽는 요상한 그림을 상상해 보라.


그렇게 두 권을 책을 나흘에 걸쳐 읽었다. 적당한 감동과 흥분과 으스스한 공포감에 시달리면서. 눈 내리는 뉴욕의 밤, 공원에서 발견된 여자의 시체. 그녀를 누가 죽였는가는 소설 첫머리에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살인자가 누구인가를 밝혀나가는 그렇고 그런 스토리는 아니다.


하얀 눈 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죽어 앉아있는 이름 없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과 동정심 앞에서 케이 스카페타 박사는 분노하고 아파한다. 살해된 여자는 거리의 부랑아였다. 그녀의 죽음을 원통해할 가족도 친구도 없다. 어쩌다 연쇄살인마의 표적이 된 운이 나쁜 경우일 뿐. 냉정한 이론가 혹은 행동파인 동료들 속에서 케이는 그들이 무심히 넘기고 지나친 사소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번뇌한다. 마음에 쏙 드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런 여주인공을 만나면 정신을 못 차린다.


어떤 인간의 내면은 더 이상 손댈 수 없을 지경으로 사악하고 사악하다. 뒤틀리고 꼬인 그런 인간의 영혼은 눈을 감고도 보고 싶지가 않다. 살인마의 행적을 따라가며 몸서리를 치다가 다시 초점을 스카페타 박사에게 맞추면 차갑게 식었던 가슴과 머리가 따뜻하게 덥혀진다. 악에 대적하는 선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공식이지만 그 선이 결국은 인간을 인간답게 세상을 살게 한다는 것을 배운다.


단지 소설만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주변을 돌아보다 세상이 더 이상 살만한 곳이 아닌 것 같다는 생경한 두려움에 젖을 때가 있다.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범죄와 가정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상처, 울부짖음을 듣노라면 과연 내가 안전할까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소설 속에서 케이 스카페타는 그 암울을 비극을 바로잡아가는 존재다. 끊임없이 번민하고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한 걸음씩 살인마에게 다가가 의연히 맞선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 가여운 영혼의 이름과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모든 이의 안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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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2-31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 스카페타, 욱, 하는 사람이라 좋아요..;;

겨울 2006-01-0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려서 쉽게 상처입고 분개하며 감정적이 되는 감수성도 매력이죠. 그녀는 한없이 약함을 드러내면서도 범죄자의 사악함에 정면으로 맞서요. 시간이 없어 읽기를 미루고 있는 '죽음의 닥터'에서는 어떤 모습일 지 정말 궁금해 죽겠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노혜경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 이렇게 또박또박 들려주는 책, 참 오랜만이다. 골치 아프다고 지레짐작하며 이런저런 핑계대면서 외면했던 얘기들과 정면으로 맞선 기분이란, 무릎 다소곳이 꿇어앉아 혼나는 아이같달까.


현대자동차 식당아줌마들의 정리해고 반대 투쟁기의 기록이라는 <밥.꽃.양>을 나는 물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되면서 어째서 이런 일이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사소한 의문을 가졌을 뿐이다. 인권영화제 내의 인권, 노동자 안의 노동자, 인간 속의 여성이라는 약자 중의 약자, 다수를 제외한 단 하나의 소수라는 가파른 주제가 꽤 둔중한 파문을 일으킨 것은 호소력 있는 저자의 말투가 한몫을 했다.


아무리 그럴듯한 세상이 되어도, 어디의 누군가는 불평등을 감수하고 소리죽여 살아간다는 것을 무심코 잊는다. 과거보다 노동자들의 목소리 커졌다. 무수한 권리 행사한다. 그런데 먹고 살만해진 그들은 더 낮은 계급의 노동자들을 디디고 존재함을 까맣게 잊어먹는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가 아닌 잿빛의 혹은 푸른빛의 작업복을 입은 당당함을 넘어선 거만함으로 그들보다 힘이 덜 센 노동자들을, 여자들을 핍박한다.


저자 노혜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혹은 사실을 확인하고 깨닫는 순간의 모멸감과 참담함이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나와 너무나도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십대의 여공들은 학교라는 조건에 미혹당하여 취업과 동시에 입학을 하게 마련이다. 빠듯하게 돌아가는 3교대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부당한 잔업과 폭언에도 불구하고 엎드려 있어야하는 까닭은 학교라는 미끼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쫓겨나면 학교에서도 퇴학처리 된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겁을 집어먹고 어떤 무지막지한 횡포에도 그저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대우가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중학교를 졸업한 여자애들에게 행해졌었다.

그리고 그 극단에 임금협상을 위한 파업을 감행한 어느 날의 일이 있었다. 노조에 가입된 대다수의 성인 남자들이 주도한 파업에 이용하기 위한 도구로 기숙사에서 혹은 학교에서 곤한 잠에 빠져있던 십대들은 강제로 밖으로 내몰렸다. 말 그대로 강제, 무섭기로 소문난, 무작위로 폭력을 휘둘러대는 조장이나 기숙사장들에 의해 나가라면 나가고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는 그런 파업의 도구였다. 그 파업으로 그들이 무엇을 얻어갔는지 모르지만 단지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대다수의 학생들에게는 단지 무섭고도 무서웠던 며칠 낮과 밤으로만 기억되었다. 단순하고 무식한 다수의 어른 노동자들의 권리 행사를 위해 몇 명의 아이들이 다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입원까지 했다.


힘이란 그것을 휘두르려고 맘만 먹으면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약하다 싶을 때 무자비해진다. 군대에서의 서열이 그렇고 학교에서의 선배, 직장 곳곳의 서열이 그렇다. 인권에 대의와 소의가 있을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큰 목적을 위해 몇 명 정도는 희생해도 상관없다는 논리가 가당키나 한건지, 노혜경은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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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2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2005-12-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인지, 똑같은 잘못을 두고도 남자에 비해 여자에게 많이 관대한 편이에요. 살아온 환경, 상처에 사로잡힌 어쩔 수 없는 동지의식, 연대감이랄 지....
 
아웃사이더의 말
아웃사이더 편집부 엮음 / 아웃사이더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성폭력의 기억, 자책과 분노 사이에서>


이 글을 읽는 지금도 사실 헷갈린다. 내가 가진 그 기억이 정말 성희롱이었을까. 기억의 저장 창고에서 퍼 올린 조각난 몇 개의 불쾌한 기억을 백지에 나열해 놓고 지그시 바라다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어쩌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때의 나는 무지한 어린애였다. 성이 무엇인지도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다른지도 몰랐다. 역시나 먹고 사는 일에 바빴던 부모님이나 시골학교의 선생님도 가난에 덜미를 잡히는 것에만 전전긍긍하던 시절이었다. 친절을 가장한 성인남자들의 사냥함에 속아선 안 된다는 사실도 어떤 행위와 말은 나쁜 것이라는 걸 가르쳐주지 않았다.


때늦은 자각이 자책과 분노라는 이름으로 휘몰아쳐 오지만 지금에 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쫓아가 따질 대상도 없고 새삼 부모님을 붙들고 나 어릴 적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들 원망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을 터. 그것은 비단 나뿐 만은 아닐 거라는 위안 아닌 위안을 얻을 뿐이다. 아마도 어울려 털어놓기 게임을 한다면 어마어마한 비밀들을 접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구체적으로 성폭력이라고 부를 사건에 노출된 적이 없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안도하진 않는다. 당사자들의 고통이 어떠할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까. 태어난 곳의 울타리가 튼튼하여 나는 그런 세상은 몰라요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가난도 차별도 더구나 성적인 폭력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곤란에 처한 당사자더러 너의 어리석음과 무지, 약함 때문이라고 할 것인가.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   

 

<나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다>


장애 여성이라고 비장애 여성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 한번도 여성 장애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나는 놀랐고 부끄러웠다. 장애를 가졌다는 것에 앞서 여자라는 이유로 수치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그녀들. 자원봉사자가 남자일 경우의 난감함, 장애인용 화장실에 남녀 구분이 없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처우들, 또한 일상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을 때의 공포감 앞에는 굳이 장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성이라는 절대적인 사실의 공유자로서 다르지 않다고 역설한다. 여자로서 살아가기에 좋은 세상은 장애를 가진 여성에게도 살만한 세상일 거라고 말한다. 사회의 약자, 소수로 살아가기 위해 투사가 되어야했던 사람, 그녀의 도전과 용기와 인내심에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내가 만났던 장애인의 대부분은 남자라는 사실은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여성 장애인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좁은 방을 배회하며 반자폐적 삶을 짊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밖으로의 한걸음을 겁내고 있는 그들이 어떤 불안이나 공포도 없이 자유롭게 바깥세상으로 나와 활보하기를, 어쩌다 운이 나빠 장애인이 되었지만 그럭저럭 살만하더라는 말을 웃으며 들려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또 그들의 소원처럼 장애가 그들 자신이나 부모,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과 누구라도 원하면 언제라도 자립하여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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