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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긍정파워 - 행복과 성공을 부르는 긍정의 심리학
미아 퇴르블롬 지음, 윤영삼 옮김 / 북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서평단 도서에 이 책이 떴을 때 무조건 손을 든 이유는 제목의 포스 때문이다. 절대적으로다 내게 부족한 ‘자기 긍정 파워’. 제목만으로도 뭔가가 속에서 불끈 하지 않는가. 사실 이런 책은 읽을 기회가 없었다. 문학, 추리, 감상적인 산문 류가 취향인지라. 책읽기에 배어든 일정부분의 허영심은 그 이름이 ‘책’인 이상은 당연한 거라고 본다.

평소 자존감이 낮다는 자각을 해서인지 책은 흥미진진이다. 누군들 보다 나은 삶을 꿈꾸지 않고, 누군들 자신감이나 자존감의 가치를 모르랴. 아는 얘기다. 익히 아는 단순한 얘기지만, 그 가치만큼 실천하거나 얻기 어려운 거니까, 이렇듯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세뇌훈련을 시키는 것이리라.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은 지극히 사소한 비방에도 거의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울부짖으면서 말이다. (36쪽)

성격형성에서 자존감이 결여된 경우인가. 애초에 자신감이건 자존감이건 어려서부터의 훈련이 중요하단 건 누구나 아는 얘기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자신감)’이나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가치에 대한 인식(자존감)’이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자신감이 아무리 높아도 자존감이 낮으면 비록 성공한 인생을 살아도 행복하거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게 요지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들의 탈선이 그 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 살면서 수없이 듣고 읽는 말이다. 자기 학대, 반항, 좌절감, 질투심으로 타인에게 보이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가혹한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러면 충고랍시고, 당신이 가진 것, 누리는 것의 가치도 대단하다고 떠들지만 당사자에겐 소귀에 경 읽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말, 충고, 코치는 쉽다.




나는 지금까지 수치스러운 일을 겪어왔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경험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정신적, 육체적 학대로 얼룩진 관계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51쪽) 정말, 균형 잡힌 높은 자존감을 가지면 저렇게 될까.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학대를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자존감이 부족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자존감이 높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존감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지 않나. 저자는 마약 중독자였다고 고백한다. 사랑은 계속 실패하고, 교도소에 가는 등의 결코 평범하지 않는 경험들과 그녀가 리더십코치로서 만난 사람들과의 결과물이 일명 ‘자존감 프로그램’인 이 책이다. 그녀가 설득력 있는 언변가라면 글보다도 말이 호소력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과거를 디딤돌 삼아 현재의 삶을 무조건 긍정하고 즐겨라. 자기애를 극대화 시켜라.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바로, 당신’이라는. 세뇌를 넘어 최면을 걸어라?  




진실과 자신의 생각은 상당히 다를 수 있다. 자신이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이러한 솔직함은 정직과는 아무 상관없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느끼는 생각을 주변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이러한 솔직함이다. 어떤 사람의 스웨터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생각? 의견일 뿐이다. 굳이 이야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106쪽)

그러고 보니 생각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타인의 험담을 꽤 한 듯싶다. 인성의 결여도 자존감을 높이는 적이라는 말씀이다. 어째 뒤로 갈수록 공자님 말씀 투다. 어떤 사람은 맨 앞장만을 읽고 던져버릴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직접적인 사례를 통해 고개를 주억거릴 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저 제목만으로도 한 권의 가치와 맞먹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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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누구누구에게 보내는 식의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상의 여지가 없어 보여서다. 그랬는데, 한 권의 책을 다 읽고서야 그 제목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보다 적절한 제목이 없어보였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는 외로움에 사무쳤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대니얼 고틀립이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 애잔한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줍다보면 귀에 익은 평범한 말들이 보석처럼 마음에 와 박힌다. 그 자신이 교통사고로 인한 전신마비 환자이면서도 ‘자폐’ 진단을 받은 아기 샘을 향한 사랑과 연민과 염려에 사무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저절로 눈에 그려진다. 병이나 장애를 보기 전 인간임을, 뇌가 다친 것뿐 영혼이 다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 앞에서 저절로 목이 잠긴다.    

 

샘, 살아가면서 규율, 자제, 목표, 계획, 그리고 포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자제해야 하는 충동, 해서는 안 되는 생각, 억제해야 할 망상에 대해서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동안 지켜봐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네 마음 속 풍경은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격하게 흔들리다가 어느새 차분해져 있고, 정신없이 날아가다가 일순 느릿느릿 기어가고, 막무가내로 떼쓰다가 온순해진다.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가 동굴처럼 텅 비어 있을 때도 있다. 밝은 빛과 잔잔한 물이 모두 네 마음속에 있다. 다만 그것 이 언제 자리바꿈을 할지 모를 뿐이다. 그게 마음이다.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185쪽)




그게 마음이다, 라는 이 구절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마치 듣기를 기다렸던 말처럼. 내용 중에 ‘파이 이야기’의 호랑이가 등장한다. 오래전, 꽤나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라 기억에 생생한데, 그 비유가 근사했다. 파이의 호랑이가 우리 내면에 있다는 거. 우울증, 강박증, 중독, 공격성, 증오, 시기의 이름으로 나타나지만 함께 거주하며 공존해야 할 존재라는 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인 동시에 전부가 되는 조건이라는 거. 내 안의 그것,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때로는 정체불명의 그것을 ‘호랑이’라고 명명하니 은근히 귀여운 생각조차 든 것이다. 정신관련 분야의 책들을 읽다가 빠지는 함정의 하나는 너무 식상해서, 뻔해서 쉽게 흥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한번은 듣거나 읽거나 아는 글이라고 지레짐작,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기 일쑤다. 무엇보다 마음을 치료하는 방법들이 대개 아주 쉽다는 거다. 너무 간단해서 허탈할 정도로, 세상에 마음이 아픈 사람이 하나도 있을 법하지 않다. 그런데, 그럼에도 자꾸만 손이 가고, 읽어지고, 이렇게 의외의 감동과 위안을 얻는다. 단지 실화여서일까?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누구라도 좋으니, 어쩌면 나는 이 말이 그렇게 간절히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설렁설렁 부는 바람, 흩뿌리는 비 때문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이즈음, 사정없이 마음이 요동을 쳐댄다. 십대에 혹은 이십대에 그보다 더 어린 아이 적에 받은 상처들이, 꼭꼭 여며서 마음의 그늘 아래 숨겨둔 반갑지 않은 이방인이 슬그머니 나들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일상이나 사람들에 쫓겨 잊고 있었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떠오를 기미가 보이면 잽싸게 다른 관심사를 찾아서 바쁜 척 하기도 했던 것들이다. 물론 일 년에 한두 번씩 근심이 지나쳐 잠 못 이루는 밤의 시를 읊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낯선 상황이라 갈팡질팡 헤매는 중이다. 이럴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피해자겸 가해자는 가까운 가족들이다. 마치 마음속에 사악한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어 이간질을 하는 것처럼 시시때때로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근데, 웃긴 건 상처를 받는 것만큼이나 주는 것도 괴롭다는 거다. 화가 나서, 분해서, 쏘아 붙이는 말의 독은 내게도 치명적이다. 이런 내게 대니얼 고틀립이 말한다.




샘,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 심리분석학자 칼 융은 그 악마를 ‘그림자’라고 불렀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도, 그림자를 떼어낼 수도 없다. 그림자는 나 자신의 일부니까.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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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1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멋진 글이네요.
어서 읽어봐야겠는데... 진심어린 리뷰 참 좋습니다. 우몽님!^^

겨울 2007-09-20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진심이 울컥울컥 솟구치는 책입니다.
어서 읽어보시길. 맘에 쏙드는 구절에 마구 밑줄을 긋게 돼요.

짱꿀라 2007-09-2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괜찮다고 하는 소리가 있던데, 몽상님 리뷰보고 더욱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2007-09-21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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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심코 마시던 인스턴트커피의 상표를 확인하고는 오만상을 찡그린다. 평균, 하루 한잔씩 꼬박꼬박 마시던 커피다. 비극적인 칠레 대통령 아옌데 살해의 이면에 다국적기업 ‘네슬레’가 있었다니. 그동안 마신 커피들이 되넘어 올 것 같다. 말 되는 일보다 말 안 되는 것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아기, 어린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주권국가의 대통령을 살해하는 음모에 이르렀다는 잔혹함 앞에서 숨이 턱 막힌다. 기아문제가 교과서에서 가르칠 수 없는 터부 중의 하나라니. 숙명적인 기아가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확실한 수단이라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조나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는 토머스 멜서스(18세기말 영국국교회 성직자)의 이론이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켜 끔찍한 사태를 외면케 하고 무관심을 조장한다니. 세상에나.




마음 한편으로 그 나라에서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음을 안도하는 마음, 가난하고 병들었음에도 왜 끝없이 아이를 낳을까 라는 통속적인 의문을 품었던 마음이 참으로 부끄럽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멜서스만큼이나 잔인하고 비겁하다. 지글러는 이런저런 생각이나 반성할 시간적 여유도 사치라고 호통 친다.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도움을 요청한다. 왜, 어째서라는 짧은 의문조차도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들에겐 사치스럽고 어리석은 관심일 따름이니까. 이 책에는 구조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내부 혹은 외부적인 다양한 기아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다양한 나라, 인종, 정치, 사회, 문화의 차이에 의한 셀 수 없는 모순에 갇혀 진퇴양난에 처한 현실을 토로한다. 일회성 도움보다는 장기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고 좌절하고 다시 도전하는 식이다.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강대국, 다국적 기업들의 자발적 협조가 없이는 근본적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이를 외치며 세계정복을 꿈꾸는 인간을 창조한 신을 원망하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기아 앞에 붙는 숙명이라는 단어가 피처럼 붉게 느껴진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노라면 식욕이 뚝뚝 떨어지고, 눈앞의 진수성찬이 부끄러워진다. 음식을 남기고 버리는 것에도 죄의식을 느낀다. 다분히 감상적이지만, 다이어트가 필요하거나 하고 있는 사람은 필히 이 책을 필독하시길.  이런 정서적인 반응에 대해 저자는 쓸모없노라고 신랄히 비판하리라. 현재 죽어나가는, 어린이무덤에 묻히고 있는, 아무 죄도 없는 작은 생명에게 필요한 건 먹을 거라고. 고작 마시던 커피 맛을 잃는 정도의 유치한 감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라도 말이다.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이다.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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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4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프레이야 2007-07-16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상적인 동정이 아닌 합리적인 실천으로 해결되어야할 문제입니다.
다국적 기업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꼭 필요하구요.
지금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하고 연민할 시간도 사치라고 하는 저자의 말이..

겨울 2007-07-17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아로 고통받는 다수의 국가들이 프랑스 등의 식민국가였고 현재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어요. 상카라라는 청년 대통령이 빈곤과 기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홀로서기에 성공하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나선 프랑스라는 이름이 갖는 지적,미적, 예술적 가치가 얼마나 허울인지요. 가난하고 약한 나라는 계속해야 무능하기를 바라죠. 호구니까.
 
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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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마라. 누구에게도 그녀를 빼앗기지 마라. 그 어떤 것에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를 돌봐줘야 해. 네 생명보다도 더 귀하게.   -훌리안 카락스-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몇 번을 말해도 역시 마지막 장이다. 그 수많은 마지막 중에서도 이제 일순위에 오른 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일생에 단 한번 찾아오는 사랑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것이 잔혹한 운명의 저주였다는 걸 알고 악마가 되어버린 남자의 저 회한. 자신이 빼앗기고 돌보지 못한 사랑. 잔인한 아버지들에게 휘둘리고 버림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치기 급급했던, 그렇게 손을 잡지 못하고 놓아버린 사랑에 대한 저 절절한 회한 앞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의 회한은 곧 그의 구원이다. 아이러니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에 침몰된 미켈과 누리아의 스스로를 태워 올린 헌신 앞에서 숙연히 침묵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삶을 구원했기 때문임을 안다. 그들을 동정하는 것은 잠깐이다. 다른 여자, 다른 남자를 바라보는 사랑을 위해 죽는다는 신파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그러므로 다니엘과 베아트리체가 이룬 사랑은 훌리안을 옭아맸던 사랑의 저주가 풀리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두 손을 들어 만세라도 부르고 싶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푸슈킨의 저 시를 입버릇처럼 흥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삶에 속아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저 구절에 철저히 반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삶에 대한 배반은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응징할 것이다. 참고 기다리고 용서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의 본질이 딱 절반씩 도사리고 있다. 그리하여 선하거나 악한 의지에 따라 누구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 훌리안은 선하고 푸메로는 악하다고? 그 둘은 선하거나 혹은 악할 수 있다. 인간백정 푸메로에겐 무능한 아버지와 최악의 어머니가 있었다. 다니엘의 좋은 아버지와 돌아가신 천사 같은 엄마가 아닌. 훌리안에게도 불완전한 의붓아비와 욕망에 눈이 먼 생부, 약하지만 나쁘지 않은 엄마가 있다. 훌리안은 사랑했지만 운명에 맞설 기백도 용기도 없어 도망쳤고 그 그림자가 일생을 지배했다. 푸메로는 어머니를 엽총으로 사살한 그 시점에서 이미 인간과 악마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인간을 향한 헌신과 희생과 희망, 구원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는 인물은 단연 페르민이다. 그의 구원자는 다니엘이다. 그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과 악몽은 다니엘이 내밀어준 손의 온기에 의해 치유된다. 그는 다니엘의 또 다른 아버지이자 친구, 스승이면서 그림자다. 그는 훌리안에 대한 다니엘의 호기심과 열정을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지지한다. 이보다 굉장한 축복이 있을까.




 이토록 가슴 졸이며 마지막 몇 장을 읽었던 소설이 언제였던가 싶게 가물가물하다. 폭풍우 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몇 시간의 죽음의 사투를 벌인 기분이다.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자신만의 책 한 권을 선택하는 어린 다니엘과 만났을 때까지는 신비와 흥미가 전부였다. 멋진 일, 적당히 우울하거나 슬픈 뭔가가 일어나리라는 기대감에서 시작된, 책을 덮는다. 그리고 상상으로 통곡(기쁨 혹은 슬픔의)한다. 눈물만한 최상의 정화는 없지만 그저 상상만이다.  좀 더 어려서 이 책을 읽었다면 거리낌 없이 울 수 있었을 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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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7-1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그 구렁텅이에서 허우적 거릴때 저도 누군가의 손을 간절히 잡고 싶더군요.

겨울 2007-07-16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잉크냄새님.^^
어쩌면 이 책 속에서 그때 잡지 못한 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애시 베이비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인생이, 사람이, 삶이 아름다워 같은 말들의 더 이상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할 감성도 말라버려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 침몰 중이라지만 이 적나라한 소설은 뭔가. 몇 번이나 구역질을 느끼며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용케 끝까지 읽은 이유는, 인간에 대한, 아야, 호쿠토, 무라노에 대한 연민이 있어서다. 보이지 않는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절대 없노라 단정할 수 없듯이. 바보 같고, 미친놈 같고, 머저리 같은 그들의 사는 법을 두고 어떤 판단의 잣대도 들이댈 수 없다.




이건 픽션이다.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이건 가네하라 히토미라는 작가의 머릿속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녀는 그녀가 만든 세계, 인물들 속의 신이다. 라는 전제는 내게 있어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울고, 웃고, 분노케 하고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치미는 혐오와 경멸로 책을 던져버리게 만드는 힘. 이 소설이 충격과 논란의 한 가운데 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책을 찢건 던지건 읽는 이의 자유다.




이 책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위장한 인간의 본질에 속고 있거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사람일지도. 하긴 잘난 척 고상한 척 하지 마. 너도 별 수 없어. 라는 질타는 불편하다. 닭 한 마리 토끼 한 마리 죽이는 것 쯤, 발가벗긴 아기 위에서 자위하는 것 쯤, 피가 흐르는 상처를 물고 빠는 것 쯤, 요즘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 사고보다는 양호하다는 생각이다. 학교에서 제자가 선생님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욕을 내뱉는 것보다도. 소설은 세상의 거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 역시 지금 얼마나 무라노 씨를 만나고 싶은가. 얼마나 간병 받고 싶은가. 얼마나 죽여주길 바라는가.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서 죽여주세요, 하고 울며 간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울면서 죽음을 애걸하고픈 이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p. 186)




나에게 죽음을 주세요. 날 죽이고 당신도 따라 죽으라는 말 따위는 안 해요. 그런 바보 같은 말은 절대 안 해요. 당신의 그 가느다란 손가락과 화사한 손바닥으로 날 죽여주길 바랄 뿐이에요. 부탁이에요. 뭐든 드릴 테니. 제발. 죽여. 주세요. (p. 187)




좋아해요. 라는 수없는 고백에도 무반응이거나 어쩌다가 돌아오는 네. 라는 답이 전부인 무라노를 향한 아야의 독백이 처절함을 넘어 귀여운 건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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