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노혜경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 이렇게 또박또박 들려주는 책, 참 오랜만이다. 골치 아프다고 지레짐작하며 이런저런 핑계대면서 외면했던 얘기들과 정면으로 맞선 기분이란, 무릎 다소곳이 꿇어앉아 혼나는 아이같달까.


현대자동차 식당아줌마들의 정리해고 반대 투쟁기의 기록이라는 <밥.꽃.양>을 나는 물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되면서 어째서 이런 일이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사소한 의문을 가졌을 뿐이다. 인권영화제 내의 인권, 노동자 안의 노동자, 인간 속의 여성이라는 약자 중의 약자, 다수를 제외한 단 하나의 소수라는 가파른 주제가 꽤 둔중한 파문을 일으킨 것은 호소력 있는 저자의 말투가 한몫을 했다.


아무리 그럴듯한 세상이 되어도, 어디의 누군가는 불평등을 감수하고 소리죽여 살아간다는 것을 무심코 잊는다. 과거보다 노동자들의 목소리 커졌다. 무수한 권리 행사한다. 그런데 먹고 살만해진 그들은 더 낮은 계급의 노동자들을 디디고 존재함을 까맣게 잊어먹는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가 아닌 잿빛의 혹은 푸른빛의 작업복을 입은 당당함을 넘어선 거만함으로 그들보다 힘이 덜 센 노동자들을, 여자들을 핍박한다.


저자 노혜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혹은 사실을 확인하고 깨닫는 순간의 모멸감과 참담함이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나와 너무나도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십대의 여공들은 학교라는 조건에 미혹당하여 취업과 동시에 입학을 하게 마련이다. 빠듯하게 돌아가는 3교대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부당한 잔업과 폭언에도 불구하고 엎드려 있어야하는 까닭은 학교라는 미끼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쫓겨나면 학교에서도 퇴학처리 된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겁을 집어먹고 어떤 무지막지한 횡포에도 그저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대우가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중학교를 졸업한 여자애들에게 행해졌었다.

그리고 그 극단에 임금협상을 위한 파업을 감행한 어느 날의 일이 있었다. 노조에 가입된 대다수의 성인 남자들이 주도한 파업에 이용하기 위한 도구로 기숙사에서 혹은 학교에서 곤한 잠에 빠져있던 십대들은 강제로 밖으로 내몰렸다. 말 그대로 강제, 무섭기로 소문난, 무작위로 폭력을 휘둘러대는 조장이나 기숙사장들에 의해 나가라면 나가고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는 그런 파업의 도구였다. 그 파업으로 그들이 무엇을 얻어갔는지 모르지만 단지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대다수의 학생들에게는 단지 무섭고도 무서웠던 며칠 낮과 밤으로만 기억되었다. 단순하고 무식한 다수의 어른 노동자들의 권리 행사를 위해 몇 명의 아이들이 다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입원까지 했다.


힘이란 그것을 휘두르려고 맘만 먹으면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약하다 싶을 때 무자비해진다. 군대에서의 서열이 그렇고 학교에서의 선배, 직장 곳곳의 서열이 그렇다. 인권에 대의와 소의가 있을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큰 목적을 위해 몇 명 정도는 희생해도 상관없다는 논리가 가당키나 한건지, 노혜경은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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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2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2005-12-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인지, 똑같은 잘못을 두고도 남자에 비해 여자에게 많이 관대한 편이에요. 살아온 환경, 상처에 사로잡힌 어쩔 수 없는 동지의식, 연대감이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