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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보는 재미는 남다르다. 대개는 원작이 너무 좋아서 영화를 찾아보지만 영화를 본 뒤에야 원작의 존재를 발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보다 원작에 대한 호기심이 반감한다. 궁금하긴 해도 영화가 좋은 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책,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도 같은 예다. 멋진 영화에 매혹되었지만 그 원작이 짧은 단편이라는 사실에 안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영화에 대해 품었던 환상이 깨질까봐서? 서점에 가서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면서, 사실은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들었으면서도 구입은 못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를 끼워주는 행사에서 망설임 없이 덥석 손을 뻗었다.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가 읽고 싶었던 게 첫째 이유. 덤이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계산속이 두 번째.


‘남자들은 머핀을 싫어해’라는 맨 마지막에 있는 단편부터 읽었다. 이상하게 단편들은 처음엔 좋다가 나중에는 흥미도 떨어지고 대충 읽어지니까 아예 처음부터 끝부분부터 읽는 게 좋다. 독특했다. 별장에서 일중독자 남자를 기다리는 미미. 이런저런 불평을 하면서도 그 상황을 즐기는 여자. 마흔두 살 남자의 긴급 구조대원 타입의 섬세한 섹스어필에 홀딱 빠져든 그녀는 서른한 살이다. 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장품과 옷 몇 벌, 시부사와 다츠히코의 책만 들고, 아, 그리고 아주 큼지막한 물건, 시몬을 옆에 끼고 나는 멋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을 나섰다. 비 내리는 뿌연 바다에 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270쪽) 결국 미미는 기다리던 남자 렌을 버리고 남자의 조카 시몬과 함께 별장을 떠난다는 얘기다.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머핀을 만들었던 이유는 자기만족감 때문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우유부단한 남자와의 담담한 이별을 그린 ‘사로잡혀서’의 여주인공 리에 이야기는 더 쇼킹하다. 8년의 결혼 생활에 아이가 없는 미노루와 리에 부부. 어느 날, 거래처에서 만난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폭탄을 떨군 미노루는 그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고 칭얼댄다.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는 맹한 여자와 가정이란 올가미에 생포되어 사로잡혀 가면서도 미련스럽게 뒤를 돌아보는 남자를 리에는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얼마동안은 방광염이 도져도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게 서글플지 모르지만, 리에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실감했다........자유로워진 몸에는 어떤 집착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240쪽)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조제도 그런 여자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혼자가 된 조제는 우연히 들를 츠네오를 필사적으로 불러 세워 꿈꾸던 것을 이룬다. 동물원에 호랑이를 만나러가고, 바다를 보고, 수족관이 있는 여관에 머무는 것들이다. 조제에게 츠네오는 일생에 단 한번 오는 기회였다. 어쩌면 바짝 마른 종이인형처럼 살았을 조제지만 츠네오를 통해 세상 밖으로의 모험을 시작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우리는 죽은 거야, 죽은 존재가 된 거야. 나머지는 그냥 덤으로 살면 된다.


각 이야기마다 나오는 여주인공은 다르지만 닮았다. 생에 초연하고 달관한 듯, 집착, 불안, 질투, 소유, 이기심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의 삶은 강하면서도 유연하다. 결국에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수의 여자들이 꿈꾸고 원하는 것, 그녀들의 내면과 심리를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 새롭다. 이 소설, 이 작가, 다나베 세이코를 이렇게 뒤늦게 알게 돼서 미안하지만 더 늦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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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웃겼다가 울렸다고 다시 웃기는 이야기. 처음엔 뭐, 이런 이런 사신이 다 있어 하며 건성으로 읽다가 이내 이 말할 수 없이 친절하고 진지한 사신 치바의 매력에 쏙 빠져들고야 만다. 더구나 그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바로 그 얼굴이다. 어둡고 사악한 까맣게 죽은 입술의 창백한 이미지가 절대 아니라는 거다. 

혹시 아나.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날. 내 곁에 서서 말을 걸고 있는 멋진 남자가 치바일런지. 그는 친근한 이웃, 직장동료, 사돈에 팔촌일 수도 있고 우연히 버스를 기다리던 내 앞, 옆의 인상좋은 그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님, 편의점에서 나란히 서서 컵라면을 먹던 낯설지만 익숙한 그 모습이던가. 중요한 것은 그를 볼 수 있는 기간은 딱 일주일 뿐이며 그 후의 내 운명은 죽음이라는 사실. 무섭지 않겠냐고? 전혀. 오히려, 치바와의 만남은 행운이 아닐까?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 속의 치바가 관련된 죽음들은 모두 다 달콤하다. 아니 애잔하다. 사나이의 도리를 다한 후지타 형님의 죽음도 멋지고, 복수를 선택해 죽음에 이른 산장 살인사건의 죽음도 아쉬움이나 미련 따위는 찾을 수가 없다. 모두가 죽어도 좋다라는 신념을 가졌다. 치바가 연애상담사로 나선 어쩌면 가장 슬픈 사연도 마찬가지다. 암에 걸려 일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오기와라는 운명의 여인을 만나 달콤한 사랑에 빠질 찰나에 죽임을 당하지만, 좋아하는 여자를 위한 죽음이라 다행이라 말한다. 살인 용의자와의 동행은 또 어떤가. 어린시절의 유괴에 의한 고통스런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온 모리오카가 흉악한 살인범의 얼굴에서 점점 연민을 자아내는 가여운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과정은 눈물겹다. 어짜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삶이지만 치바와의 동행을 통해 삶도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치바군, 흉기(칼대신 포크)를 품고 후쿠츠를 찾아온 모리오카에게 "이봐, 포크 가져가야지."는 너무 했어. 불행히도 치바군에게 그건 진담이었다. 그는 늘상 그렇게 분위기 파악 못하는 썰렁한 조언을 인간들에게 건네지만 의도야 어떻건 결과는 나쁘지 않다. 인간사회의 법칙에 대한 몰이해가 여유로 비춰진들 어떤가. 그리고 설령 내일 죽는다한들 어떤가. 오늘 죽을 힘을 다해 살았다면.

이쯤에서 드는 의문, 사신이란 무엇을 하는 존재일까, 라는 거.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듯 하지만 그들도 그 부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걸로 보아 생사여탈권과는 무관한 관조자, 동행이라는 거. 홀로 맞서야 하는 죽음 앞에서 말동무처럼.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교훈은 결코 사신을 두려워하지 말라. 비가 내리는 어느날 동행이 되어준 누군가가 있다면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든 얘기를 아낌없이 토하라. 그러면 짊어지고 가는 등짐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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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1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목이 딱입니다. 친절한 치바씨^^

비로그인 2006-10-2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댓글에 한표~^^

겨울 2006-10-2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요? ^^ 마왕도 막 읽었어요.
이사카 코타로, 치바만큼이나 멋진 사람일 것 같아요.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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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하나 혹은 둘의 특별함을 말하는 건 새삼스럽다. 사춘기 시절에는 서른 살을 넘어 까지 산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나이 즈음으로 요절한 예술가들에게 열광할 정도로. 이것의 느낌은 시작이거나 마무리, 절망, 죽음, 가파른 벽 혹은 급한 내리막의 이미지가 마구 뒤섞여 있다.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440쪽)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막 읽은 직후여서일까. 이건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른 맛이 났다.  기대했던 맛과 다르다고 해서 맛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제목이나 일러스트처럼 발랄하고 가볍게 무겁거나 비극적인 얘기들까지 마치 누구나 다 이렇게들 산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서 역시라고 생각했으니까. 


나이에 맞는 옷처럼 나이에 맞는 소설이 있다면, 내게 이 소설이 철지나고, 유행이 지난 옷이랑 비슷했다. 색 바랜 옛 얘기, 그것도 별로 기억하기 싫은 거라면 마냥 반가울 수가 없다. 재인처럼 단지 조건만을 보고서 대충 살아지겠지 라는 낙관만으로 결혼을 선택한 친구도 있고, 유희처럼 불현듯 직장을 덮고 꿈을 찾아서 발가벗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간 용감하지만 무모한 친구도 있었고, 은수처럼 연애할 남자, 결혼할 남자, 평생 친구할 남자로 분류하며 어이없는 줄다리기를 하던 친구도 역시 있었다. 당연히 행복의 척도는 결혼의 유무도 직장의 유무도 남자의 유무도 아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이 서른한 살의 그녀는 그래서 연애가 아닌 결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정작 지켜야 할 것들을 잃었나. 이전까지 결혼의 상대자로서 손색이 없던 김영수가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상황이 되자 단숨에 뒤집어엎는 것처럼. 그의 현재로 과거의 허물을 포용할 순 없었을까. 그랬다면 은수가, 은수가 아니었겠지. 그의 옆에서 그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치기어린 바램일 뿐이다.


달리 보면 이 이야기는 나이 서른에 관련한 왜곡일 수도 있다. 세상 여자들의 모든 서른 너머가 그녀들 같을 거라는 선입견을 심어주니까. 아직도 이런 고민 하냐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분개할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그래서 좀 더 기발한, 무서운 미스테리가 가미되었으면 하는 상상을 했다. 김영수의 과거는 그래서 충분히 흥미진진했다. 아쉬움이 남을 때,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것은 책을 읽는 나의 습성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그 도시는 씁쓸, 심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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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0-1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그렇군요. 저도 그 도시는 여전히 씁쓸해요...결코 심심하지는 않았구요.
달콤한 도시가 가끔 그립습니다.
아, 연애를 한 판 해줘야 하는건가요? 후후^^

겨울 2006-10-13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건강하시죠? 건강이 최고예요. 전 연휴 후유증으로 아직 골골댑니다.
오늘 낮, 햇빛이 참 달콤할 정도로 눈부셨어요.
여기, 지금 여기가 달콤한 나의 도시구나 싶게요.
 
스텝파더 스텝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1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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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소설의 대가 미야베 미유키의 이번 소설은 읽기도 전부터 그 관심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책을 소개하는 몇 개의 문구에서 풍기는 가벼움과 발랄함이 그녀의 기존 소설들을 하나라도 읽었던 사람이라면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데, 책을 다 읽은 후의 지금 느낌은? 무진장 재밌다. 사실, 최근 읽은 서너 권의 일본소설에서 풍긴 가볍다 못해 지루할 정도의 식상함에 잔뜩 심사가 뒤틀려 있던 차였다. 유행도 좋고 신선한 것도 좋은데 마지막 장까지 읽는 것이 고역이 되는 경우는 정말이지 최악인데, 미야베 미유키라면 무조건 결코 그럴리가 없으테니까.  


여기가 어디지? 그렇게 자문하자 비로소 기억과 이성이 손에 손을 잡고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도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손님을 문전박대하기 위해서는 다시 기절하는 수밖에 없다. (7쪽)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딘가에 떨어지라고 했지. 내 머리 위에 떨어져달라고 부탁한 기억은 없다. 그것이, 떨어져버렸다. 친절하기도 하시지.(20쪽)

나름대로 명석 치밀한 자칭 프로도둑이 벼락을 맞아 지붕에서 떨어졌다가 깨어나는 순간의 사유다. 작가 혹은 도둑의 이 절묘한 유머감각에 난 단숨에 반해 버렸다. 물론 일란성쌍둥이들의 기행과 귀여움도 재미의 극치를 이루지만 이 도둑의 친절한, 상냥한, 어설프고 순박한 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매력 있지만 비현실적인 인물과 만나는 몇 시간이 얼마나 즐거울지는 전적으로 읽는 이의 마음에 달렸지만 말이다.


난 유독 쌍둥이에 약하다. 그게 일상이건 소설이건 쌍둥이라는 존재는 경이롭다. 학창시절 짝꿍도 쌍둥이였던 적이 있는데 날마다가 신기했었다. 이 소설 속의 열세 살, 사토시와 타다시의 긍정적인 사고와 명랑함, 당돌함에 프로도둑이 맥을 못 쓰고 쩔쩔 매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유기 당했노라 주장하지만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 주장의 신빙성은 증명되지 않았다. 진실 같은 건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애초에 도둑이 벼락을 맞아 지붕에서 떨어졌다는 설정부터 판타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만화의 주인공 같은 전직변호사인 도둑 중의 도둑이나 화상이 보여주는 여유와 따듯함은 뭘까. 범죄냄새 짙은 사건과 사람들의 사이사이를 누비며 적당히 사기 혹은 날치기를 병행하여 적지 않은 돈을 버는 생활을 의도적으로 가볍게 보여주는 건?

하늘을 흐르는 강이 어디서 끝나는지 누가 알까? 운명도 미래의 일도 그와 같은 것이다. 가야 할 곳으로 갈 따름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흘러가면서 즐겁게 살자.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니까. (358쪽)


인정 많은 총각도둑에게는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아니 애초에 세상이 그런 사건 사고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겠지. 납치, 협박, 감금, 인질, 유괴, 갈취, 뺑소니 등등 소소한 사건들마다 우리의 이 신사적인(?) 도둑이 등장하고 그는 산타클로스처럼 멋지게 돈과 정의를 분배한다. 법? 윤리? 양심? 없다. 단, 부모가 없어도 아이들은 자라지만 아이가 없으면 부모는 자라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정겨운 이름과 함께 죽여도 죽지 않고 생글 거릴 것 같은 착한 아이들(?)과의 동고동락에서 그는 그의 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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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9-2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에 간혹 멋진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장르문학에 인색한 저같은 사람도
눈이 번쩍 뜨입니다. 흘러가면서 즐겁게 살자. 한때는 거부하다가 지금은
힘이 점점 딸려서 그리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을, 하늘이 무지 파래요

겨울 2006-09-2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가 찬기운 가득한 푸름과 깊어진 목련의 초록잎을 보고 형형색색의 고운 빛깔만 가을이 아니구나 새삼 생각했어요.
소소한 스트레스들을 날리기엔 추리소설 읽기만한 유희도 없어요. 제가 워낙 스트레스에 예민(?)해서. 님, 감기 조심하세요.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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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통 악당 아니면 악녀 뿐인. 탐정도 경찰도 기업가, 의사 하다못해 고용인 내지 종업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엑스트라까지도 어딘가 한군데는 뒤틀려있는 이런 소설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그래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른 인간을 찾아서랄까.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배경이 되는 도시, 무생물의 나무, 날씨까지도 뭔가 음흉한 범죄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살맛, 인간의 냄새 운운하기엔 너무도 타락한 도시 사람들 속에서 그나마 제일 순수(?)하고 착한(?) 필립 말로. 얄팍한 우정에 헌신한 대가로써 그가 얻는 것은? 난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책의 마지막 몇 장을 먼저 읽어버리는 우를 범했다. 결과는 그러면 그렇지.

  

자네가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걸세.(61쪽)


이 멋진 말과 함께 테리 레녹스를 배웅하는 필립 말로는 그럴 듯했다. 이거야말로 정녕 남자들의 우정이란 거구나. 만취해서 거리에 개처럼 팽개쳐지는 한 남자의 무엇을 보고 말로는 선뜻 손을 내밀었을까. 그가 원래 그런 인간이어서? 탐정이란 그의 직업의 특성상 전혀 상관없는, 그러나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정체불명의 한 남자를 거두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라서? 어쨌든 두 남자의 만남과 이별을 참 의미심장하게 낭만적으로 그려나가는 소설의 시작은 멋졌다. 우정이란 여자 남자를 떠난 만인의 로망이니까.


갑자기 소설이 잔혹해지는 시점, 말로가 살인사건 사후 종범 혐의로 연행되어 무자비한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호기심은 급상승했다. 유능한 탐정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낸 남자의 가치가 무엇이길 레, 덩치 커다랗고 주먹이라면 어딜 가도 빠지질 않을 주인공이  이런 수모를 당해야하나. 무릇 영웅은 시련 속에서 태어난다지만. 그의 오만과 냉소, 말기 암 수준인 잘난 척을 빼면 필립 말로가 아닌데. 눈은 활자를 따라가면서도 머리는 또 다른 소설을 썼다.     


이 친구, 그저 경찰을 미워하는 녀석이구먼. 너는 그게 다야, 탐정 새끼. 그저 경찰을 미워하는 녀석일 뿐이라고.(83쪽) 그레고리우스 경감은 뼛속까지 썩은 악당 중의 악당이다. 이 악당 앞에서의 필립 말로는 그야말로 하이에나의 먹이 감이다. 악당이지만 나름 귀엽고 미련하고 둔한 메넨데스. 그는 역시나 결국 경찰에게 개기다 죽을 쑨다. 유일하게 깔깔깔 웃고 싶어지는 캐릭터랄까. 난 거물급 악한이야, 말로. 돈을 쓸어 담지. 내가 짜낼 수 있는 녀석들을 짜내서 한 몫 챙기기 위해서는, 짜낼 수 있는 녀석들을 짜내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거든. (128쪽) 이런 웃기는 과시를 하는 머리 나쁜 악당의 말로는 너무 뻔해서 동정을 금치 못했다.


난 악녀가 무섭다. 악녀가 나오는 영화도 꺼리고 악녀가 등장하는 소설은 말할 것도 없다. 필립 말로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고 약간 어리숙한 바보로 만들어 버린 아일린 웨이드가 등장했을 때 그래서 불안했다. 그녀의 지고지순 연기에 홀딱 빠져들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이라고 짐작하다가 맞아떨어지니 입맛이 썼다. 이 여자의 비뚤어진 욕망, 질투가 실비아 레녹스의 타락과 파멸, 비참한 죽음보다 나을 것도 없다. 저이는 버려진 개나 다름없어요. 저 사람에게 집 좀 찾아주지 그래요. 잘 길들여져서 성격은 제법 순하거든요.(10쪽) 최소한 데리고 살던 남자를 차 밖으로 집어던지고 떠나는 실비아 레녹스는 나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버려진 남자에게 하등의 동정을 느낄 이유는 없으니까.

 

술 아니면 담배 그리고 데메롤.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유혹들이다. 여기에서 죽어나가는 인간들에게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죽을 법 하다는 삶이 죽음보다 나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설령 그것이  필립 말로 우리의 주인공일지라도. 그래서 이별 뒤에 짠하고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 따위 반갑지 않았다. 원래 진짜 악당은 이렇게 끝까지 살아서 남은 자의 뒷머리를 강타하는 것일까. 세뇨르 마이오라노스. 당신을 악당 중의 최고 악당으로 임명합니다. 마지막에 그 매디슨의 초상을 집어넣은 게 치명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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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3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말로 작품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겨울 2006-08-3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작품을 첫 번째로 읽었어요.^^ 나머진 이 거보다 약하다는 거지요?

물만두 2006-08-3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건 취향에 따라 달라요^^

프레이야 2006-09-12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겨울 2006-09-1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혜경님.^^
재미나게 읽고, 쓰고, 덤으로 적립금까지
좀, 민망합니다.

비연 2006-09-1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레이먼드 챈들러 작품은 다 좋죠..

겨울 2006-09-1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반갑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온전한 매력을 아직은 잘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