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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경제기적 - 프란츠 알트의
프란츠 알트 지음, 박진희 옮김 / 양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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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산업국가의 대다수 사람들은 경제적 빈국들의 인구증가를 최대의 환경문제로 바라보고, 환경문제가 출산율 제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무슨 천박한 논거인가. 우리 행성이 직면하고 있는 중심 문제는 가난한 나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중심 문제는 부유한 나라들의 잘못된 에너지, 교통정책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자동차가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제어를 해야 한다면 인구 조절이 아니라 자가용에 대한 ‘산아제한’이 필요하다.


생태학적 교통 전환이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자동차의 덫에서 빠져나올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눈앞의 이익과 편리만을 위하여 미래를 저당 잡히는 현실을 알면서도 몰라라하는 자동차만능주의를 저자는 ‘중독’이라고 부른다. 평소 자동차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나 같은 몽상가에게는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아침과 저녁으로 자동차의 흐름을 피해 요리조리 인도와 횡단보도 사이에서 미로 찾기 게임을 한다. 정체된 차들과 소음, 매연 속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밑도 끝도 없는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자동차 대신에 말과 마차가 유유히 달려가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정신없는 성난 파란불 빨간불 대신에 울창한 가로수의 넉넉한 그늘을 꿈꾸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어리석은 잡념이라고 스스로를 질타한다. 몇 년 전만 해도 텅텅 비어있던 골목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주차장으로 전락하여 그 좁은 틈새에서 밀고 당기는 싸움을 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사람 하나가 차지하는 공간에 비해 길쭉한 차체가 차지한 땅의 크기를 재면서 사람들이 미쳐가는구나 했다. 애초에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는 이제 인간이 삶을 위협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자동차를 기반으로 한 개인 교통수단의 억제, 과연 가능할까. 환경파괴를 계산에 넣는 현실적인 에너지 가격의 도입, 철도에 유리하도록 도로를 점차적으로 폐쇄, 주차장 부지 축소, 차 없는 도심 만들기, 여름 스모그가 발생했을 때의 주행 금지, 대중교통으로서의 택시 이용,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 아닌가. 자전거 도로의 확충, 보행자 도로의 확충, 절실하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자동차 대신 자립’이란 단념이나 포기의 윤리가 아닌 수준 높은 삶의 양식이라고? 물론 미래에는 전기, 태양 수소, 바이오연료로 움직이는 태양자동차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혁명의 날이 오기까지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개선하고 보존할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에 구속된 인간으로서 살 것인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건강한 인간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복잡하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자동차 속의 사람을 환경친화적인 느리게 걸어가는 인간이 따라잡을 수가 있을까? 개인의 자각과 실천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는 집단의 권력 앞에서는 너무 무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의 밥벌이가 너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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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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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며 <가지 않은 길>이란 프로스트의 시를 떠올렸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 환상을 한 번이라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마는, 작가는 선택에서 제외된 길을 되짚어 올라가 봄으로써 미완의 첫사랑을 완성시킨다.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냐는 의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노련하고도 노련한 작가의 솜씨는 재미라고는 도통 없을 법한 이야기를 맛있게도 써내려 가니까.


‘나목’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오만과 몽상’ 등의 초창기 적 소설들을 20대에는 나오는 족족 사서 보았다. 왜였을까.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한 작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소설이라면 무조건 읽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산문집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였다. 읽노라면 공감을 하지만 지루해서 몇 번을 쉬었다 가는, 내 세대와는 거리가 먼 얘기들이라고 단정을 해서, 언젠가부터 책꽂이에서 그녀의 소설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굳이 하는 이유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청산유수와도 같은 이야기가 막힘없이 흘러가는 이 소설은 새로울 것 없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세대에게는 분명 감동과 살가움을 던져 주었을 풍경과 기억들이 여전히 낯설고도 멀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지만 감정들이 춤을 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설 자체보다도 오래전에 기억하던 작가의 새로운 책을 만났다는 기쁨, 날 때부터 소설가로 살아가도록 태어난 사람이라는 부러움과 동경, 주름 깊은 작가의 평화로운 얼굴에서 휴식을 얻어간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그 남자의 어머니였다. 그 남자가 입던 런닝구와 빤쓰를 주워 입고 행복해하는 노파를 보며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것은 가슴이 저미는 감동보다는 외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질기 디 질긴 정의 굴레였다. 그 남자의 철없는 패악과 냉대를 감수하고 또 감수하는 늙은 노모를 보면서, 아들내미의 밥상에 맛난 밥과 반찬을 올리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양색시 노릇으로 동생들을 먹여 살린 춘희를 보면서, 희생이란 얼마나 일방적인 것인가를 새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페이지의 다음 글이 참 좋았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첫사랑의 남자를 향한 그 단호함이 소설 읽기를 끝낸 내 마음과 닮아서였나. 


........ 우리엄마 너무 말랐더라.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는 무너지듯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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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2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2005-05-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감사! 고쳤어요. ^^

프랜치스 2005-05-0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를...^^

겨울 2005-05-0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랜치스님, 반갑습니다. ^^
 
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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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7년 만에 썼다는 장편소설을, 나 또한 7년 만에 그의 소설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단편집은 사거나 혹은 얻어 볼일도 생기지 않아 ‘상실의 시대’와 ‘태엽 감는 새’ 이후, 세 번째의 책인 셈이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표지와 손안에 들어오는 크지 않은 사이즈도 그렇고 서점에 갈 때마다 들었다 놨다 했던 별로 매혹적이지 못한 첫 인상을 불식시키듯, 소설은 뜨겁고도 깊다. 그래서일까? 다무라 카프카라는 15세의 소년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생생히 그려진다. 자칭, 카프카라고 부르는 소년의 모험처럼 여겨지는 가출에는 현실에서의 탈출과 함께 미지의 세계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그 나이의 소년 소녀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꾸었던 것이기에 공감하게 된다. 또, 누구보다 혹독한 사춘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더욱 카프카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소설이 흘러가는 방향과는 관계없이 멋대로 소년을 응원하고 멀리 더 멀리 떠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신비롭다. 세상과 동떨어진 별세계 같은 고무라 도서관에서 만나는 오시마상과 사에키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성정체성은 남자인 도서관 사서, 오시마상은 머물 곳과 방향을 잃은 카프카의 손을 잡아 한없는 친절을 베푼다. 그는 혈우병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 어딘가 조금씩 어긋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끼리의 만남을 통해 카프카는 한발 한발 신비로운 존재에게로 다가서는데, 그 정점에 불혹의 나이를 넘긴 도서관 관장, 사에키상이 있다. [해변의 카프카]라는 그림 속 소년을 사랑했던 15세의 소녀 사에키상과 카프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찾아온 역시 15세인 소년의 만남이 우연일리는 없다. 그들의 관계맺음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라는 단정도 있지만, 소설 속 공간이라는 환상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사에키상은 어릴 적 헤어진 카프카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어머니 그리고 누이와 동침하는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저주를 피해 달아났지만, 본능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이끌리고 만 두 사람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해당한다. 카프카는 어쩌면 그를 죽인 것이 자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카프카의 반대편에는 나카타상이라는 기기묘묘한 노인이 있다. 그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퇴행한 이질적인 존재다. 읽기도 쓰기도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양이와 대화하는 것과 길 잃은 고양이를 주인에게 찾아주는 일이다. 그가 고양이 유괴범 ‘조니 워커’를 살해하는 과정은 너무도 필연적이라 잔혹이나 비극의 냄새 같은 건 전혀 나지 않는다. 하늘에서 개구리와 거머리가 떨어지는 사건조차도 나카타상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다. 그는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후, 나카타상이 마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길을 떠나고 입구의 돌을 찾아 제자리도 돌려놓는 과정은 순례의 길처럼 경건하다. 그는 조니 워커라는 이름의 카프카의 아버지를 살해했다. 그것은 카프카에게 씌워진 저주다. 그가 열고자 하는 문은 카프카의 굴레를 벗기는 도구와도 같다. 저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그 문으로 여행을 끝내려는 사람들이 떠나간다. 카프카도 그 통로에 서서 15세의 소녀인 사에키상과 이별한다. 그리고 묵묵히 돌아 나온다.


이후의 카프카가 어떻게 살아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16세가 되고, 17세가 될 지도 모른다. 그는 15세의 자신이 떠났던 여행과 만남과 사랑을 까마득히 잊고, 그저 그렇고 그런 샐러리맨이 되어 지친 몸을 누이고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15세의 소년이 15세의 소녀를 만나는 달콤한 꿈을 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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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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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자건 정신과 전문의 이라부 앞에만 서면 우악스런 손아귀와 뇌쇄적인 외모의 간호사의 포로가 되어 무장해제 당한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 병의 특효약이라며 엄청나게 아픈 주사가 한 방. 얼이 빠져 있다가 뒤늦게 항의를 하지만, 이런 치료도 있는 거지, 뭘. 하고 시치미를 뚝 뗀다. 죽을상을 하고 병원 문을 들어섰던 환자들이 조만간 환한 웃음으로 나가는 것은 물론이다. ‘이라부 종합병원’에는 하마처럼 생긴 괴짜 의사가 있다.   


살면서 부닥치는 절박한 순간들이 있다. 요행히 피해 갈 수도 있지만 정면충돌로 만신창이가 되기도 한다. 눈에 띄는 육체의 상처는 보이는 병원 어디로든 달려가 치료받지만 마음의 병은 교묘하게 감추기에 바쁜 게 현대인이다. 가족, 친구, 연인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신경증, 강박증, 피해망상, 절망감을 주사 한 방으로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사는 어딘가에 이라부 이치로 같은 정신과 의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한달음에 달려가련만, 아쉽게도 이것은 픽션이다.


이라부의 치료법은 비타민 주사 한 방과 허를 찌르는 몇 마디의 질문과 대답이 전부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묘한 해법이 숨어있다. 아니, 환자의 관점과 입장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체험하고 내키는 대로 무지막지하게 돌진하는 게 이라부의 치료법인 셈이다. 문제발견, 돌진, 충돌.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 거기인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선단공포증에 시달리는 야쿠자 세이지는 적대적 관계인 야쿠자 요시야스가 단도를 품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을 잃는 의존증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그간의 불안증을 훌훌 털어낸다. 인간은 누구나 고슴도치라는 것을, 털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스스로를 방어하는 나약한 몸부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중그네에서 추락하는 공중그네의 달인 고헤이와 3루수로서 1루에의 송구에 실패하는 신이치의 병은 결국 나 아닌 타인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의 문제였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허탈하게 웃지만 그 과정은 미로 찾기처럼 험난(?)하였으니 배꼽을 쥐고 깔깔 웃으며 그들의 여정을 바라보지만 가슴 한쪽이 짜한 것도 사실이다. 대머리 장인의 가발을 벗기지 못해 강박증에 시달리는 다쓰로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가발은 권위와 체면이라는 허울이고 그것을 벗기는 상상을 함으로써 다쓰로는 시류에 편승한 스스로의 비겁을 단죄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향해 아무도 손가락질을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와하하 웃는 천진한 어린아이와도 같이 이라부의 손에 의해 장인의 가발이 벗겨지는 찰나, 다쓰로는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한 묘한 감정에 빠진다.


그렇다. 소설은 그렇게 웃음 한편으로 울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한다. 세상은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어울려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뻔한 진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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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20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중그네를 타고 싶어요..;;;

겨울 2005-04-2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만 해도 멀미납니다.

잉크냄새 2005-04-2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소설일것 같네요.
아, 이 병원 약도를 알게되면 저에게도 보여주시길...^^

겨울 2005-04-2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약도 저도 궁금해요. ^^ 이 소설을 사면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공짜로 주는데, 역시나 묘한 코믹 잔혹극 같은 소설입니다. 이런 류의 가볍고 얇은 일본 소설들이 꽤나 많이 번역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왤까요?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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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래일까. 거대함과 신비로 무장한 이 거대한 포유류는 어쨌건 비범하다. 해안으로 밀려든 고래 떼를 살리기 위해 고래 등에 올라탄 소녀를 다룬 <웨일 라이더>란 영화도 떠오른다. 영화에서 고래는 마오리족의 전사를 등에 태우고 나타난 신화 속의 영물로 등장한다.


사람들이 재밌어 죽겠다고 표현하는 소설을 그냥 지나치기란 정말 어렵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 레 그런지 궁금해서 잠을 설칠 정도니까. 붉은 빛이 도는 표지의 이 책은 두께부터가 압도적인데, 술술 거침없이 읽힌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재미로 무장한 소설 중의 소설로써 손색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읽은 것에 대한 되새김질이 없다. 돌아가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랄지,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 이미지랄지, 감정이입이 되어 분리가 안돼는 인물이랄지, 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들을 이 소설에서 만난다는 게 요원해 보였다.


적어도 춘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것은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는 이야기구나 단정을 짓다가,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다가, 그럼에도 이건 판타지가 분명하다고, 오묘한 표정의 작가의 얼굴을 보건대 그의 머릿속은 분명 기이하고 기이한 상상과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믿어버렸다.


국밥집 노파의 삶과 금복의 삶은 너무도 변화무쌍하고, 악랄하고, 비극적이라 앞만 바라보고 곧장 읽어내려 갔지만, 코끼리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세상을 향해 첫 인사를 건넨 춘희는 달랐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엄마로부터 방치된 존재, 춘희야말로 실질적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아이와 소통하는 코끼리라니, 정말 대단한 소설이 아닌가. 춘희와 코끼리 점보와의 관계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춘희만이 인간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라는 고리에서 이탈하였음은 물론이고, 자연과 동화되어 성장하고, 훗날 벽돌을 굽기까지 겪는 무자비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은 본성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의 괴물로 묘사된 외모도 비명에 생을 달리한 다른 인물들의 저주받은 욕망과 비참한 죽음에 비하면, 축복이다. 춘희의 비루하고 굶주림의 연속이었던 평대에서의 삶은 결국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술가의 경지로 끌어올려지는데, 정말 그럴법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벽돌을 구워놓고 가마 옆에서 아사하는, 길고 긴 고난과 핍박의 생을 마감한 구도자와도 같은 춘희는 코끼리 점보에 의한 영혼을 구원을 받기에 이르고, 살아서도 유일했던 친구는 죽음까지도 동행한다.


감동이란, 부풀리고 부풀린 이미지들의 총합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나는 오로지 춘희만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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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춘희가 좋아요..;;;

겨울 2005-04-1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그렇지요?

잉크냄새 2005-04-2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복선에 약하고 이야기 서술구조에 쑥맥인 사람에게 이 작가가 인물들의 다음 행적을 시원시원하게(?) 밝혀준 것이 전 오히려 고마웠답니다.^^

겨울 2005-04-2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그런 부분이 읽기를 방해하더군요.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지않는 친절한 작가의 존재가 생경했어요. 누군가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과 견주어 설명을 하던데, 그 소설도 역시 읽기는 읽되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