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온통 악당 아니면 악녀 뿐인. 탐정도 경찰도 기업가, 의사 하다못해 고용인 내지 종업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엑스트라까지도 어딘가 한군데는 뒤틀려있는 이런 소설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그래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른 인간을 찾아서랄까.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배경이 되는 도시, 무생물의 나무, 날씨까지도 뭔가 음흉한 범죄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살맛, 인간의 냄새 운운하기엔 너무도 타락한 도시 사람들 속에서 그나마 제일 순수(?)하고 착한(?) 필립 말로. 얄팍한 우정에 헌신한 대가로써 그가 얻는 것은? 난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책의 마지막 몇 장을 먼저 읽어버리는 우를 범했다. 결과는 그러면 그렇지.

  

자네가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걸세.(61쪽)


이 멋진 말과 함께 테리 레녹스를 배웅하는 필립 말로는 그럴 듯했다. 이거야말로 정녕 남자들의 우정이란 거구나. 만취해서 거리에 개처럼 팽개쳐지는 한 남자의 무엇을 보고 말로는 선뜻 손을 내밀었을까. 그가 원래 그런 인간이어서? 탐정이란 그의 직업의 특성상 전혀 상관없는, 그러나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정체불명의 한 남자를 거두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라서? 어쨌든 두 남자의 만남과 이별을 참 의미심장하게 낭만적으로 그려나가는 소설의 시작은 멋졌다. 우정이란 여자 남자를 떠난 만인의 로망이니까.


갑자기 소설이 잔혹해지는 시점, 말로가 살인사건 사후 종범 혐의로 연행되어 무자비한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호기심은 급상승했다. 유능한 탐정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낸 남자의 가치가 무엇이길 레, 덩치 커다랗고 주먹이라면 어딜 가도 빠지질 않을 주인공이  이런 수모를 당해야하나. 무릇 영웅은 시련 속에서 태어난다지만. 그의 오만과 냉소, 말기 암 수준인 잘난 척을 빼면 필립 말로가 아닌데. 눈은 활자를 따라가면서도 머리는 또 다른 소설을 썼다.     


이 친구, 그저 경찰을 미워하는 녀석이구먼. 너는 그게 다야, 탐정 새끼. 그저 경찰을 미워하는 녀석일 뿐이라고.(83쪽) 그레고리우스 경감은 뼛속까지 썩은 악당 중의 악당이다. 이 악당 앞에서의 필립 말로는 그야말로 하이에나의 먹이 감이다. 악당이지만 나름 귀엽고 미련하고 둔한 메넨데스. 그는 역시나 결국 경찰에게 개기다 죽을 쑨다. 유일하게 깔깔깔 웃고 싶어지는 캐릭터랄까. 난 거물급 악한이야, 말로. 돈을 쓸어 담지. 내가 짜낼 수 있는 녀석들을 짜내서 한 몫 챙기기 위해서는, 짜낼 수 있는 녀석들을 짜내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거든. (128쪽) 이런 웃기는 과시를 하는 머리 나쁜 악당의 말로는 너무 뻔해서 동정을 금치 못했다.


난 악녀가 무섭다. 악녀가 나오는 영화도 꺼리고 악녀가 등장하는 소설은 말할 것도 없다. 필립 말로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고 약간 어리숙한 바보로 만들어 버린 아일린 웨이드가 등장했을 때 그래서 불안했다. 그녀의 지고지순 연기에 홀딱 빠져들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이라고 짐작하다가 맞아떨어지니 입맛이 썼다. 이 여자의 비뚤어진 욕망, 질투가 실비아 레녹스의 타락과 파멸, 비참한 죽음보다 나을 것도 없다. 저이는 버려진 개나 다름없어요. 저 사람에게 집 좀 찾아주지 그래요. 잘 길들여져서 성격은 제법 순하거든요.(10쪽) 최소한 데리고 살던 남자를 차 밖으로 집어던지고 떠나는 실비아 레녹스는 나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버려진 남자에게 하등의 동정을 느낄 이유는 없으니까.

 

술 아니면 담배 그리고 데메롤.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유혹들이다. 여기에서 죽어나가는 인간들에게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죽을 법 하다는 삶이 죽음보다 나을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설령 그것이  필립 말로 우리의 주인공일지라도. 그래서 이별 뒤에 짠하고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 따위 반갑지 않았다. 원래 진짜 악당은 이렇게 끝까지 살아서 남은 자의 뒷머리를 강타하는 것일까. 세뇨르 마이오라노스. 당신을 악당 중의 최고 악당으로 임명합니다. 마지막에 그 매디슨의 초상을 집어넣은 게 치명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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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3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말로 작품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겨울 2006-08-30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작품을 첫 번째로 읽었어요.^^ 나머진 이 거보다 약하다는 거지요?

물만두 2006-08-3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건 취향에 따라 달라요^^

프레이야 2006-09-12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겨울 2006-09-1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혜경님.^^
재미나게 읽고, 쓰고, 덤으로 적립금까지
좀, 민망합니다.

비연 2006-09-1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레이먼드 챈들러 작품은 다 좋죠..

겨울 2006-09-1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반갑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온전한 매력을 아직은 잘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