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도덕, 정의는 이제 종말에 와 있다

 
어제 반 고흐에 관해선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고갱에 관해선 별로 이야기가 없었지요?
아쉬운 부분입니다.
고갱에 관해 몇 꼭지 올려서 발란스를 맞추지요.

1890년대를 미술사학자들은 부르기 편하게 후기인상주의라고 합니다.
후기post는 단지 after란 뜻으로 후기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종료를 알리는 것 외에 특별한 말은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 이후라는 것 외에 별로 그 의미가 없듯이 말이지요.

후기인상주의에서 반 고흐와 고갱의 미학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두 사람이 우정이 두터웠고 함께 아를에서 작업했기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을 상징주의로 분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말했지만 반 고흐의 경우 성경책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상징했다던가, 자신이 즐겨 앉던 의자와 고갱이 즐겨 앉던 의자를 그려서 두 사람을 상징했다던가 등등 말입니다.
고갱이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잔에 비유했다는 건 어제 이야기했지요?
그것도 상징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상징주의는 원래 문학의 경향으로 1886년 상징주의 작가들이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다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종교, 도덕, 정의는 이제 종말에 와 있다.
노이로제, 히스테리, 최면술, 마약중독, 학문적 애바위행위 등은 모두 사회적 진화의 증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증세가 처음 언어로 나타났다.
달라진 요구사항들은 새롭고 다양하며 미묘한 아이디어들로 해소되었다.
이 점을 미뤄보더라도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의 다양함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퇴폐주의 시대에 살면서 반 고흐와 고갱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다양함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노이로제란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었고 많은 사람이 문명의 질주에 적응하지 못해 신경과민을 일으켰으며 병적 증세를 나타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빠르게 질주하는 컴퓨터 문화가 정신없게 만들고 많은 네티즌의 글에서 노이로제 증상을 봅니다.

여하튼
이런 노이로제로부터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반 고흐는 리처드 바그너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 강렬한 색을 사용할 수 있으며 정신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는 회화를 음악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관람자들이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화가는 현대인이 겪는 노이로제 증세를 치료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이는 반 고흐의 미학적 특징이자 고갱에게도 적용됩니다.
반 고흐는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답니다.

오, 나의 다정한 친구, 미학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베를리오즈와 바그너가 작곡한 음악과도 같아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네.
자네와 나 그리고 몇몇 사람이 이 점을 알 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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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는 개인적 판단을 근거로 서술되었다 
 

미술사가 대학에서 교과과목으로 채택된 건 1840년대 독일에서였다.
그후 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미국 대학에서의 미술사 연구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현재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대부분의 미술사 관련 저술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던 예술가들을 선별해서 그들의 일대기와 그들을 중심으로 계보를 이루고 좀더 폭넓게 다음 시대·사람·장소에 끼친 영향이 어떻게 작용했고
또 어떻게 평가를 받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간략하게 말하면
미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주된 동기들과 그 해석이 후세에 미친 영향과 결과를 개인적 판단에 근거해서 서술한 것이다.

미술사가 개인적 판단을 근거로 서술되었음을 지적하기란 쉽다.
영국인·독일인·프랑스인·스페인인·미국인 등이 쓴 미술사 관련 저술들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저마다 내용이 같지 않고 편집 방법 또한 각양각색이다.
예를 들면
영국인이 본 미국의 팝아트와 미국인이 본 팝아트 그리고 미국인이 본 유럽의 신사실주의와 유럽인이 본 신사실주의는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다.
스페인인이 쓴 미술사에서 미국의 중요한 예술가들이 언급되지 않고 미국 미술사에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던 스페인 예술가들이 언급되는 것은 그 나라 미술사학자가 자국 미술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빚은 결과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동양 미술을 다룬 미술사에서 중국과 일본 미술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도 한국 미술에는 지면을 아낀 것이라든가
또 한국 미술의 고유성을 무시 혹은 모르는 채 중국 미술의 그늘 아래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미술쯤으로 과소평가하는 내용은 전혀 받아들일 만하지 못하다.
여러 권의 미술사 관련 저술들에서 어느 한 권이 그 외의 것들에 비해서 낫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그 한 권이면 서양미술을 그리고 동양미술까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는 전혀 단정할 일이 못된다.
그 외의 저술들에서 보완될 만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 여러 저명한 학자들의 그룹 연구에 의해 쓰여지지 않고 개인에 의해 편찬되다 보니
자연히 능력의 한계로 영향력을 행사한 예술가들을 선별하는 일과 영향력의 비중을 역사의 저울에 다는 일이 개인의 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에 공감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일대기와 계보의 활약이 충분히 언급되지 못하는 데다
중요한 예술가들이 누락되기 다반사이며,
게다가 서양을 중심으로 동양 미술을 언급하다 보니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이 보기에도 공감하지 못할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 결함이다.
이런 결함은
개인이 역사를 편찬하는 한에 있어서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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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혁명, 1905~10년

 
1905년과 1910년 사이 6년 동안의 서양미술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면 20세기 미술 전체를 거의 이해하게 된다.
1906년 스물 여섯 살의 피카소는 20세기 미술을 대표할 만한 <아비용의 처녀들>을 그렸다.
이 그림은 최초의 입체주의 그림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더라도 당시 예술의 변방 콩고인의 가면이 유럽 예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게다가 예술의 변방 사람들이 사용하던 가면이 유럽인의 전통 미의 의식을 경악시키고 미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형성한 서양미술의 울타리는 타히티 섬에서 말년을 보낸 고갱에 의해서 이미 무너지는 조짐을 보여왔고 스페인 청년 피카소에 의해 아프리카 미술도 서양미술의 울타리 속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1910년은 러시아인 바실리 칸딘스키가 완전추상의 쾌거를 올린 해였다.
그해 이탈리아인들 미래주의자들은 기계문명으로 열려진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미학 선언문을 발표했다.
칸딘스키는 모스코바에서 모네의 건초더미 그림을 보고 과연 대상에 대한 묘사가 회화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대상에 대한 묘사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완전추상에 도달했다.
이는 미술사에 구둣점을 찍을 만한 큰 사건이었다. 달리는 자동차와 공장에서 뿜어나오는 연기를 그리면서 스스로를 문명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자처한 미래주의자들의 기계주의를 찬양하는 미학 선언문과 칸딘스키의 완전추상 의지는 20세기 미술을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서양 예술가들은 추상이란 말이 대상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고갱이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했듯이 대상을 가까이서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창조할 것인지 고민하는 데서 대상을 다르게 묘사하는 것을 추상으로 인식했다.
그렇다면
대상을 비사실주의로 묘사하기만 하면 추상이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이는 추상의 개념이 분명해진 오늘날의 정황에서나 가능한 질문이고 20세기 초에는 대상을 회화적인 목적으로 시각적으로 왜곡되게 재현하기만 해도 추상으로 이해되었다.
한 마디로 추상은 외부 세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면 세계에 눈을 돌려서 예술가 자신의 감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이다.
초기의 추상은 상징을 통한 보편적 인식을 추구하여 자체의 논리를 구축하려고 했으므로 동그라미․정사각형․입방체 등을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런 기하적 형상들이 조형주의로 진전될 수밖에 없었다.

양차대전 사이 때만 해도 많은 추상 예술가들이 동그라미․정사각형․입방체 등을 사용한 기하적 구성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2차 대전 후에는 더이상 기하적 형상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형상들이 과학과 기술에 가까운 것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며 지나치게 비개성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으로 하여금 외부 세계보다는 내면 세계에 집착하게 했고 스스로의 실존 문제를 더욱 시급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이성에 대한 반성이 2차 대전 후 미국과 유럽의 추상 예술가들로 하여금 개성을 나타내는 추상을 추구하게 했으며 이런 추상에 초현실주의,실존주의 철학,선불교 미학이 크게 작용했다.

뉴욕 모마Museum of Modern Art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 주니어는 최초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로 칸딘스키를 꼽았는데 칸딘스키가 "내적 필요성의 예술 art of internal necessity"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가 말한 개성은 2차 대전 후 예술가들에게 추구해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는 말로 모던 철학의 문을 열었는데
전후 추상 예술가들은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 I paint, therefore I am"라고 말하듯이 그림 속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이런 노력은 현재의 예술가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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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웨이는 대중미술에사 진지함을 발견했다
 

팝아트란 말을 처음 사용한 영국 평론가 로런스 알로웨이는 팝아트를 고상한 예술로 보았다.
"우리들은 미술, 건축, 디자인 또는 미술비평에서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지닐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관심이나 재능을 넘어 고집한 자국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접근지역은 대량생산된 도시 문화였다: 영화, 광고, 공상과학, 대중음악. 우리들은 가장 지상적인 것들 중에서 싫어하는 상업문화의 기준이란 없다고 느꼈지만 이를 사실로 기꺼이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논했고 열광적으로 수용했다.
우리들의 논의가 도달한 결론은 ‘현실도피’, ‘순수한 여흥’, ‘휴양’ 그런 영역 밖에서 팝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미술의 진지함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알로웨이는 대중미술에사 진지함을 발견했다.
그는 “나는 팝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또한 ‘팝문화’, 대중문화를 일으킨 미술품들이 아닌 대중 전달 매체의 생산품들에 주목했다”고 했다.
팝아트가 고상한 미술이 될 수 있었던 건 대중적 표상들을 변용시켰기 때문이다.
변용은 과연 사람들을 경악하게 할 만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뜬 매릴린 먼로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의 초상화 <모나리자>와 견줄 만했다.
먼로가 워홀에 의해서 우상으로 변용된 것이다.
원래 변용은 종교의 숭고한 개념으로 남자가 신으로 변용되는 걸 의미했다.
팝아트는 사회 일반의 문화적 경험의 사물과 도상들을 고상한 미술로 변용시켰다.
팝아트는 근본적·사회적·정치적 변천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예술의 개념에서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변천을 꾀한 격변을 초래한 예술이었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서양 전통 미학의 권위를 손상시켰고 미술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전초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워홀이 평범한 것들을 변용을 통해 찬양하는 가운데 기존의 미술사를 더이상 존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워홀에 의해 곰브리치가 말한 고상한 미술품이란 “예술가의 생각이나 개념이 만들기를 우선으로 그 다음 조화를 얼마나 꾀했는가 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미적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났으며,
그린버그가 주장한 ‘순수성’은 미술품의 필요 충분 조건이 아님이 또한 드러났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예술이 모방이라는 개념을 부정했고,
미술이 만들기와 조화시키기라는 필요 충분 조건을 부정했으며,
‘순수성’은 미술품과 관련이 없음을 시위했다.

팝아트 이후 양식과 기교는 미술품의 우열을 가리는 척도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양식이 동일하게 취급되었으며 기교는 수단으로만 받아들여졌다.
다원주의가 형성된 것이다.
예술의 울타리가 모두 무너졌으므로 각 민족의 고유한 미학에 바탕을 둔 미술품들이 아무 편견없이 소개되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아무 데서도 주제를 구할 수 있으며 어떤 양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제와 양식만으로는 미술품을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
곰브리치와 그린버그식으로 자신들의 일반적인 미적 판단으로 고상한 작품과 그러하지 않은 작품을 분류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
다원주의에서는 다원주의에 근거하는 평론이 요구된다.
미술품은 그것이 제작된 원인·의미·참조 그리고 물질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으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만한다.
이는 오늘날 예술가들의 요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사학자와 평론가들을 불신하는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많은 미학 이론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이 주창하는 이론들의 주지하는 바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한 점으로 지적한다면 하나는 미술품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지각한 바에 대한 이해의 촉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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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쇼는 유럽의 모더니즘을 미국에 폭넓게 알렸다
 

추상표현주의가 뉴욕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기 전 유럽에서 불어닥친 모더니즘의 영향을 잠시 살펴보자.
유럽 모더니즘이 뉴욕에 대대적으로 알려진 것은 1913년 2월 17일에 개최된 아모리 쇼Amory Show를 통해서였다.
아모리amory란 말은 병기창이란 뜻이다.
뉴욕 렉싱턴 애비뉴 25번가 305번지에 소재한 제69 기병대의 병기창에서 미국 미술사상 가장 큰 규모의 모던 아트 쇼가 열렸다.
아모리 쇼에 전시된 작품은 1,650점이 넘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유럽인의 작품이었고, 판매된 174점 가운데 123점이 유럽인의 작품인 것으로 봐서 미국인이 유럽 모더니즘에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셀 뒤샹·자크 비용·레이몽 뒤샹 비용 삼형제도 이 전시회에 출품했으며 뒤샹이 출품한 네 점 모두 팔렸는데
네 점 가운데 악명 높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도 있었다.

아모리 쇼는 유럽의 모더니즘을 미국에 폭넓게 알렸다는 의미를 남겼으며, 미국의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이 전시회를 통해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풍속화를 고집하면서 오히려 모더니즘의 오염으로부터 미국 회화를 지키겠다는 신념을 가진 화가들은 사실주의 방법으로 미국의 일반적인 생활상들을 그렸는데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미국인들만의 풍속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풍속화를 그리던 화가들만 아니라 일부 지성적 예술가들도 모더니즘에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는데
뉴욕 스쿨 1세대에 속한 클리포드 스틸의 말은 경청할 만하다.
그는 1959년에 말했다.

“아모리 쇼가 서유럽 데카당스의 불모의 결말들을 우리에게 쏟아부었다.”

스틸을 포함해서 특히 미술학교 교사 예술가들이 유럽 데카당스 그 너머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원시문화와 고대문명에서 교훈이 될 만한 내용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바네트 뉴만은 태평양 섬의 문화와 컬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의 미국 소수민족 예술에 관심을 기울였고,
폴록은 인디언 회화와 댄스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마크 로드코는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돌프 고틀립은 선사시대 이전 바위에 새겨진 조각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마크 토비는 바하이Baha’i 종교와 선불교로부터 직접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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